사진 모델 : YBM e4u 어학원 영어 강사이자 모델인 김남희(29) 씨는 평균 월수입이 400만원인 미래의 골드미스다.
그의 성공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생물학도였던 그는 호주에서 호텔경영학과 관광경영학 석사를 따며 자신을 업그레이드했다. 학위를 살려 1996년 서울의 한 특급호텔에 취업했지만 좀더 역동적인 일을 해보고 싶어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이후 2001년 홍보대행사 예스커뮤니케이션을 차려 몇 년 만에 종업원 30명을 둔 중견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지난해 벅스 부사장에 영입된 그는 매일 야근을 불사하며 고객 유치에 나선다.
30대 싱글녀인 그는 특히 건강관리에 엄격하다. 홍보대행사 대표 시절 업무차 한 달에 네다섯 번씩 골프를 쳤고, 요즘에는 시간이 없어 틈나는 대로 명상을 즐긴다. 그의 일상은 비즈니스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주말만큼은 자신을 위해 쓰려고 노력한다. 일주일에 한 번 스파에서 경락 마사지를 받는 것은 그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다.
함 부사장은 패션 제품을 구매하는 데도 엄격한 원칙을 갖고 있다. 최고경영자(CEO)로서 품위를 돋보이게 할 견고한 디자인의 옷과 가방, 구두를 선호하는 것. 가방은 구찌와 루이뷔통에서, 구두는 발리에서 주로 구입한다.
그는 음식점도 깐깐하게 고른다. 좋은 재료를 쓰는지, 음식 맛은 좋은지, 깔끔한 분위기인지 따져본다. 함께 식사를 하는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다. 서울 종로의 한정식집이나 한남동 ‘뉴욕 스테이크 하우스’는 그가 즐겨 찾는 레스토랑이다. 그의 소비는 삶의 질을 높이는 도구일 뿐 아니라, 비즈니스에서 네트워킹을 강화하는 수단이다.
대졸 이상 학력에 고소득 안정된 직업 ‘기본’
겉으론 화려해 보이지만 그도 솔로로서 외로움은 느끼지 않을까. “결혼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인연이 오면 한다. 하지만 결혼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답한다. “지금은 일에 에너지를 더 많이 쏟아붓고 싶다”는 게 그의 솔직한 심경이다.
함 부사장은 요즘 새로운 계층으로 부상한 골드미스의 전형이다. 골드미스란 탄탄한 경제력을 갖췄으며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30대 싱글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 결혼정보업체 선우는 골드미스의 조건으로 “‘대졸 이상 학력, 고소득 전문직 혹은 중견·대기업 종사자, 연봉 4000만~5000만원 이상, 아파트 혹은 현금자산 8000만원 이상’을 갖춰야 한다”고 꼽는다.
골드미스가 주목받는 이유는 이들이 갖는 사회적·경제적 함의 때문. 당당한 사회인으로서 독신생활을 즐기는 이들은 새로운 산업과 문화 트렌드를 창출하는 경제 주체다. 결혼이 유일한 탈출구였던 과거 여성과 달리 자기 성취에 방점을 찍는 뉴 제너레이션인 셈이다.
연세대 사회학과 조한혜정 교수는 골드미스의 등장에 대해 “후기 산업사회 패러다임의 변화에 걸맞은 인간형이 탄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간 사적 영역에 머물던 여성이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현하며, 급변하는 경쟁사회에 잘 적응하는 파워 집단으로 자리매김했다는 것.
골드미스는 마케터들의 집중 관심 대상이기도 하다. 이들은 패션 · 뷰티 업종은 물론 문화·레저 산업, 외식업의 소비 트렌드를 좌우한다. LG경제연구원 이연수 연구원은 “경제적 여유는 있지만 시간적 여력이 없는 골드미스는 자신을 위해 화끈하게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특화된 상품을 찾는 것은 골드미스의 특징적 소비 패턴 중 하나다. 해외쇼핑 대행사이트로 출발한 ‘위즈위드’는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트렌디한 제품을 판매하며 골드미스의 까다로운 취향을 공략했다. 위즈위드 e패션사업팀 MD 송유진 대리는 “전문지식이 풍부한 20, 30대 여성들은 해외 세일 정보나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새로운 브랜드를 회사 관계자에게 먼저 알려줄 만큼 똑똑한 소비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골드미스를 ‘소비지향적 세대’로만 치부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들을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는 자기계발 욕구와 커리어에 대한 열정이기 때문.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사법시험 공부를 포기할 뻔했던 K(31) 변호사는 “일은 곧 놀이이자 내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곤란에 처한 사람들을 나의 법적 지식으로 도와줄 수 있으니 이만큼 매력적인 일도 없을 거예요. 게다가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많이 버니 감사한 일이죠. 요즘은 매일 영어공부를 하고 꼬박꼬박 돈을 모으며 미국 로스쿨에 갈 준비를 하고 있어요.”
대기업에 다니는 L(31) 씨의 요즘 메신저 대화명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고 나이는 열라 많다’다. 나이가 들면서 하고 싶은 일은 많아졌지만 ‘지금 시작해도 될까’ 하는 불안이 더욱 커졌다는 것. 하지만 그는 새해 들어 자신이 해보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하면서 조바심을 털어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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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 고집 않지만 눈높이 맞는 남자 찾기 어렵다”
“살사 동호회에 나가며 춤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 제가 춤출 때 깔리는 음악의 가사가 궁금해 아예 스페인어까지 공부하게 됐어요. ‘3개 국어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올해 일본어 공부도 시작했죠. 이런 모습을 보시고 부모님이 제게 ‘우리 딸 혼자 살아남으려고 저렇게 용을 쓰니 아무래도 계속 데리고 살아야겠어’ 하시더군요. 그 말이 어찌나 서운하게 들리던지…. 사실 살사 동호회의 주축은 애인이 없는 30대 여성들이에요. 골드미스가 이렇게 자기계발과 취미생활에 매달리는 것은 ‘무너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 같아요.”
화려한 라이프 스타일을 영위하는 골드미스의 아킬레스건은 바로 ‘눈높이에 맞는 남자를 쉽게 찾을 수 없다’는 비극. 선우 조정연 매니저는 “고학력·고소득의 골드미스는 동년배의 능력 있는 남성을 원하지만, 정작 골드미스터들이 원하는 파트너는 평범하고 나이 어린 여성”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엇갈린 현실 때문에 골드미스들은 ‘결혼하고 싶은데 좋은 남자 없네 증후군’에 걸릴 수밖에 없다.
대학 교수인 A(33) 씨는 “20대 시절에는 주변에 괜찮은 남자가 있었는데 강의 경력을 쌓는 데만 몰두하다 보니 모두 놓쳤다”고 아쉬워했다. A씨는 그토록 꿈꿔온 교수가 됐지만, 막상 결혼을 하려니 나이가 걸림돌이 되는 현실이 슬프기만 하다. 그가 소개팅에서 외모가 끌리는 남성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대머리가 아니면 다행!).
‘잘난 여성’은 때론 남성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얼마 전 남자 교사와 소개팅을 한 방송사 기자 S(32) 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로미오 앤 줄리엣’을 보기 위해 들어가는 20, 30대 여성들.
눈높이를 낮춰도 골드미스의 연애는 쉽지 않다. 인라인 동호회에 가는 것이 삶의 낙인 공기업 직원 Y(34) 씨는 요즘 같은 동호회 회원인 남성에게 ‘필’이 꽂혔다. 문제는 전문대 출신인 남성이 Y씨를 연애 상대로 부담스러워한다는 점. 하지만 Y씨는 결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그를 놓칠 수가 없다고 한다.
한 결혼정보업체의 매니저는 “35세가 넘는 여성의 경우 재혼 남성과도 선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볼품없는 싱글남보다 외모와 능력이 출중한 재혼남을 만나겠다’고 먼저 제안하는 골드미스도 있다”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몇 년 전 30대 싱글 여성의 삶을 그린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방송사 기자인 주인공 이신영의 대사는 두고두고 회자됐다. 골드미스가 처한 현실을 처절하게 반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사이에 오직 결혼에만 불을 밝힌 기집애들이 쓸 만한 남자들을 다 채갔다니까. 새벽 도서관에 한 번도 간 적 없고, 독서는 패션잡지 뒤적이는 걸로 대신하고, 자기계발은 성형외과 드나드는 게 전부인 줄 아는 여자애들이 남자들을 다 채갔다니까.”
골드미스는 경쟁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활동적인 특성이 있다. 이들은 결혼 역시 ‘성취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과 매치가 되는 좋은 조건의 남성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건국대 정신과 하지현 교수는 골드미스가 겪는 스트레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경쟁적·활동적·자기주장 확실 ‘특성’
“보수적인 성향의 골드미스들은 어느 연령대에서 무엇을 하는 게 정상인지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비록 일에서 성공을 거뒀지만 관습적인 트랙을 쫓아가지 않았다는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연세대 청년문화원 강윤정 연구원은 “80년대 개방화 이후 사회 안팎에서 터져나온 글로벌 담론과 한국 사회의 독특한 성별구조는 골드미스의 탄생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말한다. 굳이 독신으로 살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지적·경제적·문화적 수준과 조화를 이루는 남성을 찾기 어려워 여성들이 우아한 ‘골드미스’의 삶을 선택했다는 것이 강 연구원의 해석이다.
“골드미스는 교육열 높은 부모 밑에서 성장했고 어학연수, 배낭여행, 해외유학 등 다양한 글로벌 경험을 한 세대입니다. 여성들의 경험과 인식의 확장은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와 한국 남성들이 가진 문제를 직시하게 만든 셈이죠. 여성들이 결혼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남자를 찾지 못하는 현실은 남녀의 문화적 격차가 벌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현실과 타협하지 못한 골드미스들은 해외로 떠나기도 하죠.”
골드미스는 우리 사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설명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혹자는 원해서, 누군가는 비자발적으로 골드미스가 됐다. 그래도 분명한 사실은 골드미스야말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왔다는 점이다. 그것만으로 이들은 당당할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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