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자신이 ‘가시나무’였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직업군인 A(49·서울 서초구 방배동)씨는 2003년 10월의 ‘그날’을 결코 잊지 못한다. 당시 국방부 주관의 전군 기독 준·부사관 수련회에 참가한 그는 뜻하지 않게 ‘아버지학교’ 교육을 받게 됐다. 교육내용이 뭔지도 모르면서 얼떨결에 2박3일의 빠듯한 일정을 보내게 된 그때, 아버지학교 스태프들이 노래 한 곡을 들려줬다. 가수 조성모의 ‘가시나무’.
순간 A씨의 머릿속엔 문득 자신의 분신(分身)이 떠올랐다. 그러곤 곧 무언가가 뇌리를 스쳤다. ‘내가 바로 ‘가시나무’였구나!’
‘좋은 아버지’ 의욕만 갖고 되나 … 교육 통해 변화 바람
강압적인 양육방식에 반발해 고등학교 자퇴와 가출로 방황을 거듭하던 그의 아들(당시 20세). 아들에게 A씨는 절대복종의 대상이었다. 아버지는 자기의 바람과 한 치라도 어긋나면 아들에게 군대식 얼차려까지 시키는 등 엄하게만 대하는 터였다. A씨에게 아들은 또 한 명의 ‘병사’였던 셈.
‘그동안 나는 허울뿐인 아버지였다. 아버지 역할에 대한 자각조차 없는 권위적인 가장이었다. 그러면서도 교회 안수집사로 활동해왔으니 이중인격자가 아닌가. 참으로 잘못 살아왔구나.’ 자성(自省)에 빠진 A씨에겐 이제 세상이 달리 보였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아들의 발을 씻겨주며 화해를 청했다. “아빠를 용서해다오.”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넨 적 없었던 아내도 꼭 안아주었다.
아버지의 진심은 통했다. 아들은 이내 방황을 접었고, 부자의 관계는 회복됐다. 이후 아들은 군복무를 마치고 검정고시를 거쳐 올해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다. 아들이 군에 있던 2004년, A씨는 아들이 겪을 고생을 함께 나누겠다는 다짐으로 이라크 파병을 자원해 무사히 임무를 마치기도 했다.
“아들이 만 3세 때 한글을 완벽하게 깨치고 한자도 많이 아는 등 무척 영민했어요. 취학 후엔 모범생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기대가 매우 컸는데 중학교 때 전학을 가서 급우들에게 따돌림을 받게 된 뒤론 고등학교 때부터 무단결석을 일삼더군요. 당시 아들의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지금보다 더 좋았을 텐데….”(A씨)
아버지들이 달라지고 있다. 자상하고 친구 같은 ‘좋은 아버지’로의 대변신을 꿈꾸는 아버지들이 늘고 있는 것.
탈바꿈을 향한 노력이 가장 먼저 감지되는 곳은 아버지학교. 서울 온누리교회가 1995년 10월 신도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개설한 ‘두란노아버지학교’(www. father.or.kr)의 경우 2007년 1월 현재까지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캐나다, 일본, 러시아 등 세계 30개국 10만명의 아버지들이 거쳐갔다. 이 중 1000여 명의 외국 현지인들을 제외하곤 대다수가 한국인과 한국 동포다. 아버지학교의 국내 지부만도 70개. 지난 한 해에만 3만명의 수료자가 여기서 배출됐다. 아버지학교의 모태는 교회이지만 사회 속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서기 위해 2003년부터는 관공서, 교도소, 군부대, 학교 등으로까지 운신의 폭을 넓혀왔다.
아버지학교 수료자 중엔 탤런트 조형기 씨, 앵커 이인용 씨, 김영길 한동대 총장 같은 유명인사도 있고, 지금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됐지만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과거 암흑세계의 인물도 있다(그는 한사코 자신의 별칭과 본명, 사연이 소개되는 것을 꺼렸다).
왜 아버지가 바뀌어야 하는가? 김성묵(58) 두란노아버지학교 국제운동본부장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정치·교육·문화 할 것 없이 우리 사회의 기본구조가 흔들리는 근저엔 가장 기초적 단위인 가정의 흔들림이 있다. 한 국가의 수준을 결정짓는 것은 결국 가정이고, 그 가정의 수준을 결정하는 사람은 아버지다. 가정은 ‘올바른 가치관을 갖춘 양질의 사람을 만들어내는 공장’인 셈인데, 그 중심에 아버지가 있다. 따라서 이 땅의 아버지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기능에 대해 새롭게 학습하고 자기정체성을 되찾아야 하는 게 당연하다. 한 번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이므로.”
김 본부장 역시 1995년에 아버지학교를 1기로 수료했다. 그는 이혼 직전까지 갔던 ‘문제 가장’이었다. 1970~ 80년대 영업직으로 일할 당시 숱한 접대와 향응에 빠져든 그는 두 아들을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그저 돈만 벌어다 주면 가정은 저절로 꾸려질 줄로 알았다. 그런 상황 자체를 합리화하기도 여러 번. 하지만 1990년 즈음해 아버지학교 개설의 기초 작업을 맡게 되면서 김 본부장은 좋은 아버지로 거듭날 수 있었다.
문제 가장·불량 아빠들 교육받고 180도 변신
매주 토요일 오후 5시부터 5시간씩 5주 동안 실시되는 아버지학교의 교육프로그램은 다양하다. ‘아버지, 아내, 자녀에게 편지 쓰기’ ‘자녀와 아내를 사랑하는 이유 20가지 쓰기’ 등 숙제가 많다. 그럼에도 지난해 11월 아내의 강권과 회유를 계기로 아버지학교 교육을 수료한 회사원 이모(39) 씨는 지금까지도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는 아버지학교 캐치프레이즈가 마음에 메아리친다고 말한다. 그의 경험담.
“토요일 황금시간을 빼앗겨야 하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야 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다른 입교자들도 그런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조(組)의 어떤 40대는 2시간을 못 버티고 사라졌다. 입교 사연은 각양각색이었다. 바람을 피워 가정해체 위기를 맞은 사람, 소원해진 자녀들과의 관계를 개선할 방법을 찾으려는 사람, 말 그대로 좋은 아버지가 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왔다는 사람…. 조 이름과 조 구호를 지어라, 조 포스터를 만들어라, 웬 주문이 그리도 많은지. 게다가 숙제까지 내줬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라는 것과 집에 가서 자녀들과 아내를 허깅(hugging·포옹)하라는 것이었다. 황당, 어색, 부담 100배였다.”
그러나 이씨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원들 간의 분위기가 한결 좋아졌고, 농담도 주고받게 됐다고 된다. 세 번째 만남에선 몇 개월 만난 사람들 같았다는 것. 일을 핑계로 집에만 오면 드러누워 TV를 끼고 살았다는 한 아버지의 고백이 남의 일 같지 않게 여겨지기도 했다. 5주째 수료식에선 수료자 모두 순결서약을 했다. ‘나는 아버지로서 성적으로 순결하고, 영적으로 거룩하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사랑하는 가족과 사회 앞에 서약합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는 길은 쉽지 않음이 틀림없다. 일정 부분 고통이 따를 수도 있다. 아버지학교 수료자 모두가 예전과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 몇 명만이라도 가정의 소중함과 아버지로서의 책무를 실감했다면 좋은 아버지가 그만큼 늘어난 것 아니겠는가.”(이씨)
아버지학교뿐만이 아니다. 기업들도 ‘아버지 제자리 찾기’를 거들고 있다.
“오늘은 ‘육아데이’오니, 전 임직원은 정시에 퇴근하셔서 가족과 뜻 깊은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매월 6일이면 서울 강남구 역삼동 GS타워의 GS칼텍스 본사 전 층에 안내방송이 울려 퍼진다. 잠시 후 오후 6시가 되면 일과를 마무리한 직원들이 앞다퉈 회사 문을 나선다. 여성가족부가 2005년 9월 시작한 ‘육아데이 캠페인’에 맞춰 어린 자녀를 둔 직원들이 정시 퇴근한 뒤 육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풍경이다.
GS칼텍스는 지난해 9월6일엔 육아데이 1주년을 기념, 김송이 연세대 교수(아동양육컨설팅 해피키즈연구소장)를 초빙해 ‘우리 아이 잘 키우는 법’이라는 제목의 직원 대상 강좌를 열기도 했다. 이날 참석한 40여 명의 아빠들은 ‘우리 아이를 알고 나를 알면 백 점짜리 엄마 아빠가 될 수 있다’는 김 교수의 말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GS칼텍스 인사기획팀의 최성묵(35) 대리는 “어떻게 해야 다섯 살배기 딸을 잘 키울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강연을 들으면서 아이 양육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기업들도 남성 직원 대상 아버지 강좌 개설 붐
한국IBM이 ‘일과 삶의 조화’라는 사내 정책에 따라 지난해 11월6일 연 ‘영유아 자녀를 위한 아버지의 역할’ 강좌에도 100여 명의 남성 직원들이 몰려 아버지 교육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반영했다. 유한킴벌리 역시 가족친화 경영 차원에서 지난해 대전공장 직원들을 대상으로 ‘가족과 함께 성공하기’라는 주제의 그룹 독서토론 프로그램을 마련, 도서를 통해 배운 내용을 팀장 그룹에서 직접 실천해보고 베스트 프랙티스를 12월18일에 공유함으로써 일, 가정, 친구, 봉사, 영혼 등의 균형이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는 기회를 가졌다.
이와 별도로 지역단위 아버지 모임에 참여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올해 1월부터 경기도 광명YMCA 생활협동조합의 간사로 일하고 있는 이홍태(43) 씨가 그런 경우다. 아들(11)과 딸(9) 하나씩을 둔 그는 2002년부터 광명YMCA 산하 동아리인 ‘좋은 아버지 모임’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1년간의 공기업 및 중소기업 직원 생활을 아예 청산했다. 이씨는 “아이들과의 지속적인 관계 맺기를 통해 아버지로서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아버지 모임 활동이 너무나도 편안하다”며 “항상 좋은 아빠일 수는 없지만, 언제나 좋은 아빠이고자 하는 회원들과 교류하는 것에 인생의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들의 거듭나기’ 경향에 대해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는 “여성의 사회참여가 활성화되면서 양육이 더 이상 여성만의 몫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됐고, ‘평생 직장’ 개념의 붕괴로 더 이상 직장이 자기와 동일시될 수 없는 존재라는 위기감이 가세하면서 아버지들의 자기정체성 찾기가 소소한 일상의 영역으로 자리이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전 교수는 “아버지 교육이 개인적 특성이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좋은 아버지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특정한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현실적으로 그 이념형을 따르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 상당수 아버지들에겐 자괴감이나 죄의식을 안겨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최근 30대 아버지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고 있는 데 비해 40대 이상은 그렇지 못해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이들의 존재가 ‘거대한 다수’를 이루고 있다고 보긴 힘들지 않겠느냐”면서도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언제든지 용도폐기될 수 있는 아버지들이 자기의 가치관을 실현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양육에 눈 돌리게 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도모유키’ ‘능소화’ 등의 작품을 낸 소설가 조두진(40) 씨는 일곱 살짜리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로서의 소회를 다음과 같이 털어놓은 바 있다.
“나무와 풀 이름을 익히려고 애씁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걸으며 나무와 풀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름이 뭐야?’ 하고 묻는 어린 자식에게 ‘이것도 나무, 저것도 나무, 이건 큰 나무, 저건 작은 나무, 이건 보랏빛 꽃, 저건 빨간 꽃…’이라고 말하는 염치없는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들려줄 나무와 풀 이름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좋은 아빠는 타고나는 게 아니다.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직업군인 A(49·서울 서초구 방배동)씨는 2003년 10월의 ‘그날’을 결코 잊지 못한다. 당시 국방부 주관의 전군 기독 준·부사관 수련회에 참가한 그는 뜻하지 않게 ‘아버지학교’ 교육을 받게 됐다. 교육내용이 뭔지도 모르면서 얼떨결에 2박3일의 빠듯한 일정을 보내게 된 그때, 아버지학교 스태프들이 노래 한 곡을 들려줬다. 가수 조성모의 ‘가시나무’.
순간 A씨의 머릿속엔 문득 자신의 분신(分身)이 떠올랐다. 그러곤 곧 무언가가 뇌리를 스쳤다. ‘내가 바로 ‘가시나무’였구나!’
‘좋은 아버지’ 의욕만 갖고 되나 … 교육 통해 변화 바람
강압적인 양육방식에 반발해 고등학교 자퇴와 가출로 방황을 거듭하던 그의 아들(당시 20세). 아들에게 A씨는 절대복종의 대상이었다. 아버지는 자기의 바람과 한 치라도 어긋나면 아들에게 군대식 얼차려까지 시키는 등 엄하게만 대하는 터였다. A씨에게 아들은 또 한 명의 ‘병사’였던 셈.
‘그동안 나는 허울뿐인 아버지였다. 아버지 역할에 대한 자각조차 없는 권위적인 가장이었다. 그러면서도 교회 안수집사로 활동해왔으니 이중인격자가 아닌가. 참으로 잘못 살아왔구나.’ 자성(自省)에 빠진 A씨에겐 이제 세상이 달리 보였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아들의 발을 씻겨주며 화해를 청했다. “아빠를 용서해다오.”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넨 적 없었던 아내도 꼭 안아주었다.
아버지의 진심은 통했다. 아들은 이내 방황을 접었고, 부자의 관계는 회복됐다. 이후 아들은 군복무를 마치고 검정고시를 거쳐 올해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다. 아들이 군에 있던 2004년, A씨는 아들이 겪을 고생을 함께 나누겠다는 다짐으로 이라크 파병을 자원해 무사히 임무를 마치기도 했다.
“아들이 만 3세 때 한글을 완벽하게 깨치고 한자도 많이 아는 등 무척 영민했어요. 취학 후엔 모범생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기대가 매우 컸는데 중학교 때 전학을 가서 급우들에게 따돌림을 받게 된 뒤론 고등학교 때부터 무단결석을 일삼더군요. 당시 아들의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지금보다 더 좋았을 텐데….”(A씨)
아버지들이 달라지고 있다. 자상하고 친구 같은 ‘좋은 아버지’로의 대변신을 꿈꾸는 아버지들이 늘고 있는 것.
탈바꿈을 향한 노력이 가장 먼저 감지되는 곳은 아버지학교. 서울 온누리교회가 1995년 10월 신도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개설한 ‘두란노아버지학교’(www. father.or.kr)의 경우 2007년 1월 현재까지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캐나다, 일본, 러시아 등 세계 30개국 10만명의 아버지들이 거쳐갔다. 이 중 1000여 명의 외국 현지인들을 제외하곤 대다수가 한국인과 한국 동포다. 아버지학교의 국내 지부만도 70개. 지난 한 해에만 3만명의 수료자가 여기서 배출됐다. 아버지학교의 모태는 교회이지만 사회 속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서기 위해 2003년부터는 관공서, 교도소, 군부대, 학교 등으로까지 운신의 폭을 넓혀왔다.
아버지학교 수료자 중엔 탤런트 조형기 씨, 앵커 이인용 씨, 김영길 한동대 총장 같은 유명인사도 있고, 지금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됐지만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과거 암흑세계의 인물도 있다(그는 한사코 자신의 별칭과 본명, 사연이 소개되는 것을 꺼렸다).
|
왜 아버지가 바뀌어야 하는가? 김성묵(58) 두란노아버지학교 국제운동본부장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정치·교육·문화 할 것 없이 우리 사회의 기본구조가 흔들리는 근저엔 가장 기초적 단위인 가정의 흔들림이 있다. 한 국가의 수준을 결정짓는 것은 결국 가정이고, 그 가정의 수준을 결정하는 사람은 아버지다. 가정은 ‘올바른 가치관을 갖춘 양질의 사람을 만들어내는 공장’인 셈인데, 그 중심에 아버지가 있다. 따라서 이 땅의 아버지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기능에 대해 새롭게 학습하고 자기정체성을 되찾아야 하는 게 당연하다. 한 번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이므로.”
김 본부장 역시 1995년에 아버지학교를 1기로 수료했다. 그는 이혼 직전까지 갔던 ‘문제 가장’이었다. 1970~ 80년대 영업직으로 일할 당시 숱한 접대와 향응에 빠져든 그는 두 아들을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그저 돈만 벌어다 주면 가정은 저절로 꾸려질 줄로 알았다. 그런 상황 자체를 합리화하기도 여러 번. 하지만 1990년 즈음해 아버지학교 개설의 기초 작업을 맡게 되면서 김 본부장은 좋은 아버지로 거듭날 수 있었다.
문제 가장·불량 아빠들 교육받고 180도 변신
GS칼텍스가 지난해 9월6일 연 직원 대상 육아 강좌.
“토요일 황금시간을 빼앗겨야 하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야 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다른 입교자들도 그런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조(組)의 어떤 40대는 2시간을 못 버티고 사라졌다. 입교 사연은 각양각색이었다. 바람을 피워 가정해체 위기를 맞은 사람, 소원해진 자녀들과의 관계를 개선할 방법을 찾으려는 사람, 말 그대로 좋은 아버지가 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왔다는 사람…. 조 이름과 조 구호를 지어라, 조 포스터를 만들어라, 웬 주문이 그리도 많은지. 게다가 숙제까지 내줬다.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라는 것과 집에 가서 자녀들과 아내를 허깅(hugging·포옹)하라는 것이었다. 황당, 어색, 부담 100배였다.”
그러나 이씨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원들 간의 분위기가 한결 좋아졌고, 농담도 주고받게 됐다고 된다. 세 번째 만남에선 몇 개월 만난 사람들 같았다는 것. 일을 핑계로 집에만 오면 드러누워 TV를 끼고 살았다는 한 아버지의 고백이 남의 일 같지 않게 여겨지기도 했다. 5주째 수료식에선 수료자 모두 순결서약을 했다. ‘나는 아버지로서 성적으로 순결하고, 영적으로 거룩하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사랑하는 가족과 사회 앞에 서약합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는 길은 쉽지 않음이 틀림없다. 일정 부분 고통이 따를 수도 있다. 아버지학교 수료자 모두가 예전과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 몇 명만이라도 가정의 소중함과 아버지로서의 책무를 실감했다면 좋은 아버지가 그만큼 늘어난 것 아니겠는가.”(이씨)
두란노아버지학교는 수료식 때 남편이 아내의 발을 씻겨주는 세족식 행사를 갖는다.
“오늘은 ‘육아데이’오니, 전 임직원은 정시에 퇴근하셔서 가족과 뜻 깊은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매월 6일이면 서울 강남구 역삼동 GS타워의 GS칼텍스 본사 전 층에 안내방송이 울려 퍼진다. 잠시 후 오후 6시가 되면 일과를 마무리한 직원들이 앞다퉈 회사 문을 나선다. 여성가족부가 2005년 9월 시작한 ‘육아데이 캠페인’에 맞춰 어린 자녀를 둔 직원들이 정시 퇴근한 뒤 육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풍경이다.
GS칼텍스는 지난해 9월6일엔 육아데이 1주년을 기념, 김송이 연세대 교수(아동양육컨설팅 해피키즈연구소장)를 초빙해 ‘우리 아이 잘 키우는 법’이라는 제목의 직원 대상 강좌를 열기도 했다. 이날 참석한 40여 명의 아빠들은 ‘우리 아이를 알고 나를 알면 백 점짜리 엄마 아빠가 될 수 있다’는 김 교수의 말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GS칼텍스 인사기획팀의 최성묵(35) 대리는 “어떻게 해야 다섯 살배기 딸을 잘 키울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강연을 들으면서 아이 양육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기업들도 남성 직원 대상 아버지 강좌 개설 붐
한국IBM이 ‘일과 삶의 조화’라는 사내 정책에 따라 지난해 11월6일 연 ‘영유아 자녀를 위한 아버지의 역할’ 강좌에도 100여 명의 남성 직원들이 몰려 아버지 교육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반영했다. 유한킴벌리 역시 가족친화 경영 차원에서 지난해 대전공장 직원들을 대상으로 ‘가족과 함께 성공하기’라는 주제의 그룹 독서토론 프로그램을 마련, 도서를 통해 배운 내용을 팀장 그룹에서 직접 실천해보고 베스트 프랙티스를 12월18일에 공유함으로써 일, 가정, 친구, 봉사, 영혼 등의 균형이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는 기회를 가졌다.
이와 별도로 지역단위 아버지 모임에 참여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올해 1월부터 경기도 광명YMCA 생활협동조합의 간사로 일하고 있는 이홍태(43) 씨가 그런 경우다. 아들(11)과 딸(9) 하나씩을 둔 그는 2002년부터 광명YMCA 산하 동아리인 ‘좋은 아버지 모임’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1년간의 공기업 및 중소기업 직원 생활을 아예 청산했다. 이씨는 “아이들과의 지속적인 관계 맺기를 통해 아버지로서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아버지 모임 활동이 너무나도 편안하다”며 “항상 좋은 아빠일 수는 없지만, 언제나 좋은 아빠이고자 하는 회원들과 교류하는 것에 인생의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들의 거듭나기’ 경향에 대해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는 “여성의 사회참여가 활성화되면서 양육이 더 이상 여성만의 몫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됐고, ‘평생 직장’ 개념의 붕괴로 더 이상 직장이 자기와 동일시될 수 없는 존재라는 위기감이 가세하면서 아버지들의 자기정체성 찾기가 소소한 일상의 영역으로 자리이동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전 교수는 “아버지 교육이 개인적 특성이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좋은 아버지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특정한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현실적으로 그 이념형을 따르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 상당수 아버지들에겐 자괴감이나 죄의식을 안겨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최근 30대 아버지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고 있는 데 비해 40대 이상은 그렇지 못해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이들의 존재가 ‘거대한 다수’를 이루고 있다고 보긴 힘들지 않겠느냐”면서도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언제든지 용도폐기될 수 있는 아버지들이 자기의 가치관을 실현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양육에 눈 돌리게 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도모유키’ ‘능소화’ 등의 작품을 낸 소설가 조두진(40) 씨는 일곱 살짜리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로서의 소회를 다음과 같이 털어놓은 바 있다.
“나무와 풀 이름을 익히려고 애씁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걸으며 나무와 풀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름이 뭐야?’ 하고 묻는 어린 자식에게 ‘이것도 나무, 저것도 나무, 이건 큰 나무, 저건 작은 나무, 이건 보랏빛 꽃, 저건 빨간 꽃…’이라고 말하는 염치없는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아이들에게 들려줄 나무와 풀 이름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좋은 아빠는 타고나는 게 아니다.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