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우성이라고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것은 전적으로 정우성, 감우성 두 배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미남이다. 장동건처럼 보통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조각 같은 외모는 아니지만 좀더 인간적인 냄새가 풍긴다.
스크린 데뷔로 따지면, ‘구미호’로 등장한 정우성보다 감우성이 훨씬 후배다. 그는 TV 드라마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지만 오랫동안 준비된 영화배우였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영화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대중이 자신을 TV 탤런트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홍보활동을 최대한 자제해왔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선택한 영화는 유하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이만교 원작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상대역인 엄정화를 다시 스크린으로 불러들였고, 데뷔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이후 와신상담하고 있던 우리 시대의 재능 있는 아티스트, 시인 유하를 확실하게 프로 감독으로 만들었다. 영화 데뷔작의 무대인사에서 감우성은 “신인배우 감우성입니다”라고 인사했다. 이것은 단순한 겸양이 아니라, 오랫동안 꿈꿔왔던 배우로서의 길에 발을 처음 내민 것에 대한 스스로의 신고식이었다.
감우성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매우 깔끔한 도시적 연기를 보여주었다. 사실 ‘깔끔하다’는 단어는 감우성의 상징어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넘치는 법이 없다. 그렇다고 열정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다. 감우성이 가장 강조하는 인생의 태도는 ‘늘 한 발만 집어넣고’다. 이것은 지나치지 않는다는, 엄정한 자기 관리가 없으면 불가능한 삶의 태도다. 또한 뒤집어 해석해보면, 늘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도 된다.
깔끔한 이미지와 강한 배우 근성
처음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시사회에서 감우성을 보고 약간 놀랐다. 생각보다 키가 매우 작았기 때문이다. 하이힐을 신은 엄정화와 비슷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자,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도시인이다. 대학 시간강사로, 누구를 책임지기 싫어하고 구속받기 싫어하는 극중 인물은 감우성 그 자체로 보였다. 그만큼 연기를 잘했다는 뜻도 되지만 매우 잘 맞는 배역을 골랐다는 말이다.
‘우리들의 천국’으로 데뷔해서 ‘메디컬 센터’ ‘현정아 사랑해’ 등의 TV 드라마를 통해 쌓은 그의 연기는, 영화로 이동하면서 훨씬 업그레이드되었다. 스크린 데뷔작 이후 그는 송일곤 감독의 ‘거미숲’을 찍었고, 곧바로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한 공포영화 ‘알 포인트’를 찍었다. 급성간염으로 한국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고 다시 촬영에 합류할 정도로 ‘알 포인트’는 그에게 혹독한 육체적 시련을 안겨주었지만 놀라운 흥행으로 보답했다. 통일 코미디 ‘간 큰 가족’에서는 죽어가는 실향민 아버지 신구에게 거대한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통일 자작극을 펼치는 큰아들을 연기했고, 이어서 그가 선택한 2005년의 마지막 작품은 ‘왕의 남자’다.
조선 연산군 때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김태웅 원작, 연출의 대학로 히트작 ‘이’를 영화화한 것이다. 2000년 초연 이후 연극계의 수많은 상을 휩쓴 이 연극은, 최고 권력자인 임금과 당시 최하층 계급인 광대를 부딪치게 함으로써 파생되는 웃음과, 권력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 그리고 예술적 자유의지를 강조한 뛰어난 작품이었다.
‘황산벌’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이 이 작품을 영화화하면서 이야기는 조금 더 확대되었고, 남사당패의 우두머리인 장생 역으로 장혁이 캐스팅되었다. 그러나 군 입대 부정사건이 터지면서 예기치 않게 장혁이 입대를 하게 되었고, 대타자를 찾던 스태프들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감우성이었다. 물론 감우성도 자신이 대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왕의 남자’ 시나리오를 읽던 그는 남사당패의 예쁜 여자 같은 남자 복길이 양반들의 침소로 불려나가는 것을 보자 “밥만 나오면 뭐든지 다 팔아?”라고 가로막는 장생의 대사를 읽으며 마음을 열었다.
비록 대타자로 나섰지만, 감우성은 ‘왕의 남자’ 무대인사에서 “나의 유일한 경쟁 상대는…”이라고 말을 꺼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그가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는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이나 곽경택 감독의 블록버스터 ‘태풍’을 거론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의 유일한 경쟁 상대는 연극 ‘이’다. 죽기보다 싫은 게, 연극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악물고 열심히 했다”라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은, 다시 생각해보면, 적어도 자신의 연기가 연극 ‘이’에서 장생의 배역과 견주어 절대 뒤지지 않는다. 아니, 추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첫 장면부터 그는 공중 외줄타기를 시도한다. 상당 부분은 남사당패가 직접 출연하여 도와주었지만 감우성 역시 오랫동안 외줄타기를 연습했고 탈춤과 산대놀이 등 전통연희를 배웠다. 땀 흘려 배운 흔적이 영화 속에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남사당패 우두머리역 완벽한 소화
원래 감우성이 ‘왕의 남자’에서 탐낸 배역은 공길 역이었다. 남사당패의 일원이면서 여자처럼 예쁘장하게 생겨서, 양반들의 침소로, 나중에는 왕의 침소로 불려나간 동성애 캐릭터였지만, 감우성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얼굴이 여자처럼 예쁘장하게 생기지 않았다는 이유가 아니라) 거절당했다. 공길 역은 모델 출신인 이준기가 맡고 있다. 배역의 신선함과 새로운 얼굴의 신선함이 잘 만난 경우다. 아직 연기력은 불안정하지만, 적합한 캐스팅이었다.
‘왕의 남자’를 촬영한 것은 지난여름이었다. 무더운 여름철, 한복을 입고 땀을 줄줄 흘려가며 힘들게 촬영했다. 전통가락을 새롭게 익혀 체질화하는 것도 어려운 작업이었고, 더구나 유명한 연극을 원작으로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권력의 한복판인 궁중에서 최고 권력자인 왕을 상대로, 권력을 희롱하고 광대로서의 예술적 자유의지를 펼치는 장생 역은 매우 멋있는 배역이었다. 감우성은 능청스러우면서도 강단이 있는 카리스마 연기로 장생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의 도시적 이미지의 지식인, ‘알 포인트’에서의 피폐해가는 감정을 드러내는 군인에 이어 ‘간 큰 가족’에서는 상황의 언밸런스로 웃음을 주던 그가, 이렇게 능청스럽게 변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감우성의 다음 작품은 한지승 감독의 ‘연애시대’. 이혼한 부부의 이야기다. ‘고스트 맘마’ ‘하루’ 등을 연출한 한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기로 한 것은 원래 예정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분간 드라마나 멜로, 혹은 일본 원작을 바꾼 영화에는 출연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냉정하게 객관화해 바라보려는 의지는, 결코 수준 이하의 감상적 연기에 빠지게는 안 할 것이다. 감우성의 연기를 보며 우리가 믿음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화예고와 서울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감우성은 그의 이력이 나타내주듯 예술적 감성이 강한 배우이고, 또 자의식이 뚜렷하다. 1970년생으로 올해 서른여섯이다. 설경구·송강호·최민식 등 한국영화 남자 배우 빅3와 조승우·박해일·황정민 등 차세대 빅3의 사이에 낀 위치지만 누구와도 닮지 않은 자신만의 색깔을 갖고 있는 배우이기 때문에, 그의 역할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스크린 데뷔로 따지면, ‘구미호’로 등장한 정우성보다 감우성이 훨씬 후배다. 그는 TV 드라마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지만 오랫동안 준비된 영화배우였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영화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대중이 자신을 TV 탤런트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홍보활동을 최대한 자제해왔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선택한 영화는 유하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이만교 원작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상대역인 엄정화를 다시 스크린으로 불러들였고, 데뷔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이후 와신상담하고 있던 우리 시대의 재능 있는 아티스트, 시인 유하를 확실하게 프로 감독으로 만들었다. 영화 데뷔작의 무대인사에서 감우성은 “신인배우 감우성입니다”라고 인사했다. 이것은 단순한 겸양이 아니라, 오랫동안 꿈꿔왔던 배우로서의 길에 발을 처음 내민 것에 대한 스스로의 신고식이었다.
감우성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매우 깔끔한 도시적 연기를 보여주었다. 사실 ‘깔끔하다’는 단어는 감우성의 상징어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넘치는 법이 없다. 그렇다고 열정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다. 감우성이 가장 강조하는 인생의 태도는 ‘늘 한 발만 집어넣고’다. 이것은 지나치지 않는다는, 엄정한 자기 관리가 없으면 불가능한 삶의 태도다. 또한 뒤집어 해석해보면, 늘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도 된다.
깔끔한 이미지와 강한 배우 근성
‘결혼은, 미친 짓이다’
‘우리들의 천국’으로 데뷔해서 ‘메디컬 센터’ ‘현정아 사랑해’ 등의 TV 드라마를 통해 쌓은 그의 연기는, 영화로 이동하면서 훨씬 업그레이드되었다. 스크린 데뷔작 이후 그는 송일곤 감독의 ‘거미숲’을 찍었고, 곧바로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한 공포영화 ‘알 포인트’를 찍었다. 급성간염으로 한국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고 다시 촬영에 합류할 정도로 ‘알 포인트’는 그에게 혹독한 육체적 시련을 안겨주었지만 놀라운 흥행으로 보답했다. 통일 코미디 ‘간 큰 가족’에서는 죽어가는 실향민 아버지 신구에게 거대한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통일 자작극을 펼치는 큰아들을 연기했고, 이어서 그가 선택한 2005년의 마지막 작품은 ‘왕의 남자’다.
‘왕의 남자’
‘황산벌’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이 이 작품을 영화화하면서 이야기는 조금 더 확대되었고, 남사당패의 우두머리인 장생 역으로 장혁이 캐스팅되었다. 그러나 군 입대 부정사건이 터지면서 예기치 않게 장혁이 입대를 하게 되었고, 대타자를 찾던 스태프들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감우성이었다. 물론 감우성도 자신이 대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왕의 남자’ 시나리오를 읽던 그는 남사당패의 예쁜 여자 같은 남자 복길이 양반들의 침소로 불려나가는 것을 보자 “밥만 나오면 뭐든지 다 팔아?”라고 가로막는 장생의 대사를 읽으며 마음을 열었다.
비록 대타자로 나섰지만, 감우성은 ‘왕의 남자’ 무대인사에서 “나의 유일한 경쟁 상대는…”이라고 말을 꺼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그가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는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이나 곽경택 감독의 블록버스터 ‘태풍’을 거론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의 유일한 경쟁 상대는 연극 ‘이’다. 죽기보다 싫은 게, 연극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악물고 열심히 했다”라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은, 다시 생각해보면, 적어도 자신의 연기가 연극 ‘이’에서 장생의 배역과 견주어 절대 뒤지지 않는다. 아니, 추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첫 장면부터 그는 공중 외줄타기를 시도한다. 상당 부분은 남사당패가 직접 출연하여 도와주었지만 감우성 역시 오랫동안 외줄타기를 연습했고 탈춤과 산대놀이 등 전통연희를 배웠다. 땀 흘려 배운 흔적이 영화 속에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남사당패 우두머리역 완벽한 소화
원래 감우성이 ‘왕의 남자’에서 탐낸 배역은 공길 역이었다. 남사당패의 일원이면서 여자처럼 예쁘장하게 생겨서, 양반들의 침소로, 나중에는 왕의 침소로 불려나간 동성애 캐릭터였지만, 감우성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얼굴이 여자처럼 예쁘장하게 생기지 않았다는 이유가 아니라) 거절당했다. 공길 역은 모델 출신인 이준기가 맡고 있다. 배역의 신선함과 새로운 얼굴의 신선함이 잘 만난 경우다. 아직 연기력은 불안정하지만, 적합한 캐스팅이었다.
‘알 포인트’
감우성의 다음 작품은 한지승 감독의 ‘연애시대’. 이혼한 부부의 이야기다. ‘고스트 맘마’ ‘하루’ 등을 연출한 한 감독의 작품에 출연하기로 한 것은 원래 예정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분간 드라마나 멜로, 혹은 일본 원작을 바꾼 영화에는 출연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냉정하게 객관화해 바라보려는 의지는, 결코 수준 이하의 감상적 연기에 빠지게는 안 할 것이다. 감우성의 연기를 보며 우리가 믿음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화예고와 서울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감우성은 그의 이력이 나타내주듯 예술적 감성이 강한 배우이고, 또 자의식이 뚜렷하다. 1970년생으로 올해 서른여섯이다. 설경구·송강호·최민식 등 한국영화 남자 배우 빅3와 조승우·박해일·황정민 등 차세대 빅3의 사이에 낀 위치지만 누구와도 닮지 않은 자신만의 색깔을 갖고 있는 배우이기 때문에, 그의 역할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