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상범 대한항공 부사장(작은 사진)은 아버지를 잃었지만 더 많은 아버지를 얻었다고 말한다.
송년회를 찾는 행인들의 발걸음은 하나같이 들떠 있었다. 연세대 앞의 한 한식당에서 꾸려진 색다른 송년 모임은 휘청거리는 밤을 따뜻하고 향기롭게 만들었다.
한식당 ‘석란’으로 6시30분께부터 여든을 넘긴 노(老)신사들이 모여든다. 일제강점기에 휘문고를 다닌 32회 교우들이다.

70년 지기들은 어느새 까까머리 학생 시절로 되돌아간다.
“자네들 정지용(시인) 선생님이 우리들 영어 가르친 거 기억 나? 시험 감독으로 들어와서는 감시는 안 하고 신문만 보셔서 너도나도 커닝을 했었잖아. 그때가 그립구먼.”
조주호 씨가 옛이야기를 꺼내놓자, 까르르 웃음꽃이 방 안 가득 퍼진다.
“동수도 참석했어야 하는데, 자네들 동수가 보고 싶지 않아?”
이순재 씨가 세상을 떠난 한동수(97년 작고) 씨를 떠올린다. 그러자 곽복록 씨가 “동수가 학교 다닐 때 응원단장이었지. 우리들 구심점이었는데…”라고 말을 받았다.
노신사들이 먼저 떠난 친구를 기릴 때 대한항공 한상범(59) 부사장의 눈망울이 촉촉해진다. 한 부사장의 아버지가 70년 지기들의 입에 오르내린 바로 그 ‘동수’. 이날 모임은 한 부사장이 꾸린 ‘아버지를 기리는 밤’이다. 그는 8년째 아버지의 기일이 낀 12월에 송년 모임을 겸해 아버지 친구들을 모아 고인을 기려왔다.
“살아 계신 부친을 뵙는 것 같아”
子欲孝而親不待(자욕효이친부대·자식이 효를 다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라는 옛말은 한 부사장에게는 마땅치 않은 듯싶다. 아버지는 떠났으되 그는 현생에서 효를 실천하고 있었다.
“살아 계실 때 효자 노릇을 못했습니다”라고 그가 말하자, 노신사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아들은 없다. 동수가 복이 많다”고 맞받는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시신을 화장해 북악산에 놓아드린 게 마음에 걸려 모임을 시작했다고 한다. 아버지 친구들이 덕담 나누고 옛얘기 하는 걸 보면 아버지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12월 모임이 1년 내내 기다려집니다. 어르신들을 만나면 꼭 살아 계신 부친을 뵙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잃고, 더 많은 아버지를 얻은 셈이지요.”
그는 “선배님 건강하시죠”(한 부사장도 휘문고를 나왔다)라고 물으며 아버지 친구들의 건강을 꼼꼼히 챙겼다. 행여 내년 모임에 나오지 못할까 걱정해서다. 그 역시 건강을 신경 써야 하는 초로의 나이. 그는 2003년 임파선암 수술을 받았다.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치료를 받아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초로의 신사가 돌아가신 아버지 친구들을 챙기는 모습은 따뜻했고, 향기로웠다. 조주호 씨는 “시대의 귀감이 되는 행동”이라며 친구 아들을 치켜세웠다. 모임에 동석한 장용이(60) 휘문교우회 부회장은 “세상을 떠나서도 옛 친구들에게 기려지니 한 부사장 아버님은 행복한 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부사장을 따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모임은 9시가 넘어서 파했다. 식당을 떠나면서 한 부사장이 농담을 꺼낸다. “아버지 여자 관계는 어떠셨습니까?” 노신사들이 정색하고 답한다. “없었어.”
노신사들은 한 부사장이 들려준 선물꾸러미를 들고 하나둘씩 차에 올랐다. 신촌의 밤은 여전히 휘청거렸고, 한 부사장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