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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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에서 일방적 승리는 없다”

정년퇴임 앞둔 한승주 고대 교수 “반드시 차순위용 예비전략을 준비하라”

  • 입력2005-12-14 16: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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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대미외교에 큰 획을 그은 한승주(65) 고려대 교수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12월8일 현직에서의 고별강연을 했다. 한 교수는 1993~94년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고, 2003~2005년 주미대사를 거치며 1·2차 북핵위기 해결을 위해 활동한 이론과 현장에 정통한 학자 외교관이다. 고별강연 중 그의 경험이 녹아 있는 후반부를 발췌 정리한다.
    • -편집자 주
    “외교에서 일방적 승리는 없다”

    <b>한승주 교수 약력</b><br>1962 서울대 외교학과 학사<br>1970 미국 UC 버클리 정치학 박사<br>1970~78 미국 뉴욕 시립대학 정치학과 교수<br>1978~현재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br>1993~94 외무부 장관<br>1995~2003 유네스코 석좌교수<br>2003~05 주미 한국대사<br>2002~03 고려대 총장서리

    외교란 기본적으로 사람 간의 관계이며, 모든 인간관계란 협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외교를 잘 이해하면 인간관계에 도움이 되며, 역으로 인간관계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것은 외교에 도움이 될 겁니다.

    11월 중순 부산에서 열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에 참석한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은 아태 지역 경제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에서 많은 점수를 얻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후진타오 주석은 중국의 성장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며, 중국은 세계와 지역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번영에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중국이 아직도 경제발전에 장애 요소가 많고 개발도상국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상당히 엄살을 부린 것이지요. 실제로 중국은 ‘화평굴기(和平 起·평화적으로 솟아난다)’, 또는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가리고 칼을 간다)’라는 표현 속에서 자신들의 부상이 다른 나라에 위협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조용히 실력을 기르는 정책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굴기( 起)’라는 표현마저 공격적이라고 하여 ‘화평발전(和平發展)’이라고 바꿀 정도입니다. 물론 후진타오의 애교 공세는 효과 만점이었습니다.

    중국은 왜 자존심을 굽히고 실제보다 자신을 약하게 묘사하는 걸까요. 첫째 이유는 다른 나라들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의도입니다. 강하고 실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엄살을 부릴 여유가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허세를 부리는 나라도 있습니다. 예컨대 북한은 툭하면 미국을 혼내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실제로 북한은 군사적으로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 수는 있어도 아직 미국을 직접 공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북한의 위협적 발언은 자신의 취약함을 감추려는 불안감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반쪽의 빵이라도 얻을 것인가?”



    1945~48년 사이 우리나라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북한이 남북한 전체에서의 선거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첫째는 선거를 무기한 연기할 것인가, 둘째는 북측의 공산주의자들과 타협을 하여 한반도가 공산화되는 것을 각오하면서 통일을 이룩해야 하는가, 셋째는 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치러야 하는가라는 세 가지 선택이 그것입니다. 당시 이승만 박사의 주장은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승만 박사의 전기를 쓴 로버트 올리버는 이때의 과정을 서술하면서 “Half a loaf is better than no loaf(절반의 빵 덩어리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남북한에 각각 정부가 들어섰고 한반도가 오랫동안 분단 상태에 놓이게 되었지만, 적어도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일찌감치 막을 수 있었습니다.

    “외교에서 일방적 승리는 없다”

    1993년 당시 한승주 외무부 장관이 유엔본부에서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과 북한 핵문제를 논의하기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어느 면에서는 불만스럽지만 반쪽의 빵(half a loaf)을 확보하는 것으로 더 큰 손실을 막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요. 키신저는 그의 역작 ‘외교(Diplomacy)’라는 책에서 이러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즉 1950년 가을 6·25전쟁 당시, 한미연합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할 때 만약 평양-원산 간의 39도선 정도에서 전진을 멈췄더라면 한반도에는 상당히 다른 결과가 나왔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첫째, 중공군의 개입을 불러오지 않았을 것이고, 둘째 39도선 이북의 협소한 산악지대에서 김일성 정권은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궤멸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약소국 외교 방법 ‘smart boy’가 되라

    예로부터 덴마크, 핀란드, 벨기에 등은 강대국 주변에서 ‘약소국 외교’를 잘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언젠가 덴마크 외무장관을 만났더니 그는 약소국의 외교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강대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그 나라의 보호와 협조를 받는 ‘good boy’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강대국과 사사건건 다투고 문제를 일으켜 강대국으로 하여금 떡 하나 더 주게 하여 실속을 차리는 ‘bad boy’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극단적 선택보다 제3의 방법이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다시 말해, good boy도 bad boy도 아닌 ‘smart boy’가 되어 자존심이나 자주의식을 꺾지 않으면서 동시에 강대국과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나가는 방법이 그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대미관계와 관련하여 ‘자주파’와 ‘동맹파’ 간의 대립과 갈등이 있다고들 합니다. 한편에서는 미국을 추종하던 과거 모습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렇다면 일본이나 영국은 자존심이 없어서 미국과 협력하느냐고 되묻습니다.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고,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외침을 받아왔기 때문에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추종’이냐 ‘협력’이냐의 이분법에서 한걸음 벗어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고려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 비난하고 탓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 둘째, 국가 간 관계 또는 협상에서는 장기나 바둑, 또는 운동경기처럼 늘 제로섬게임도 아니고 지배-피지배 관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smart boy 외교’라는 것은 강대국과 공동이익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설득시키는 과정과 전략을 말합니다.

    개인적 경험을 말씀드리면, 93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미국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와 미국의 견해가 충돌해서 서로를 설득하거나 강요하는 경우보다는 양국이 협력하여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고안해내는 ‘브레인스토밍식의 토론이 많았습니다. 당시 미국 언론들도 제네바로 가는 로드맵은 한국 쪽의 구상이었다고 보도했는데, 이것만 봐도 우리가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교는 개인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갖는 대인관계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면이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특히 공적인 관계에서는 되도록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간혹, “할 말은 해야 한다”거나 “얼굴을 붉힐 때는 붉혀야 한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옳은 말이지만, 무엇이 할 말이며 어떠한 때 얼굴을 붉혀야 하는가는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이쯤에서 “외교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 보고자 합니다.

    첫째, 외교란 완전하고 ‘일방적인 승리’가 아닌 상호적이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작업입니다.

    둘째, 협상에서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셋째, 협상이나 협의 상대에 대해 ‘건전한 회의감’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넷째, 일이 잘 안 될 경우에 대비해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비 전략(backup position)’, 다른 말로 ‘plan B’라고 합니다. 부시 대통령은 출구전략 없이 이라크에 들어가서 지금 대내외적으로 고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남북관계가 진전될 때 북한을 도와주는 것은 좋지만, 필요할 때 또는 불가피할 때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도 병행해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한 일이 있습니다.

    다섯째, 외교를 할 때나 대인관계를 맺을 때, 피해의식에서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여섯째, 실용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감정, 이념, 정서보다는 실익과 현실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지난달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이 부시 대통령을 상대한 것을 보면 의연하고 침착한 태도가 돋보였습니다.

    끝으로 외교란 단면적이고 일차원적인 것이 아니라 다면적이고 다차원적인 것입니다. 군사력과 경제력만 가지고 외교가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득력도 있고, 전략도 있고, 유능한 외교관도 있어야 합니다. 외교에서는 하드파워보다 오히려 소프트파워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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