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2가 피아노거리 ‘빛의 축제’
“세상이 이렇게 달라지네요. 전에는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길거리에 비싼 전구들을 켜서 뭐 하냐고 곱지 않게 보았는데, 이제 이 정도는 써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가족과 함께 나온 한 40대 가장의 얼굴은 불빛으로 발갛게 빛났다.
이날 종로2가 ‘피아노거리’에서는 155m의 가로를 빛의 터널과 조명 조형물로 장식한 ‘빛의 축제’가 시작됐고 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디카와 폰카를 꺼내 들어 눈과 빛으로 가득한 서울의 밤을 기억에 담았다. 그리고 9일 밤, 싸하게 차고 맑은 밤공기 사이로 7개월 동안의 리모델링 끝에 다시 불을 켠 남산의 서울타워, ‘N서울타워’를 볼 수 있었다. 전보다 훨씬 화려해진 ‘N서울타워’는 정각 7시부터 자정까지 매시 정각마다 조명으로 탑에 꽃이 피는 모습을 연출한다.
새로 공사를 끝낸 숭례문.
이미 많은 사람들이 눈치챘다시피, 서울의 밤은 낮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갖게 되었다. 아니, 한반도 전체가 밤낮이 다른 경관을 그리고 있다. 서울에서 밤에 가로수와 문화재, 교각 일부를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 야간 조명은 이제 상업 건물들이 경쟁적으로 경관 조명을 하고, 지자체들은 지역 문화재는 물론 교각과 해안선 등 모든 지형지물을 밝혀보려는 욕심을 내고 있다.
86 아시아경기대회와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당시 서울시 초대 민선시장이었던 조순 시장은 광화문에서 서울역을 ‘샹젤리제’로 만든다는 꿈을 가졌고, 97년엔 서울시에 야간경관심의위원회가 구성됐다. 그러나 그때까지 경관 조명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광화문 등 문화재에 조명회사의 ‘기증’을 받아야 했고, 이어 닥친 IMF와 ‘전기료’를 생각하는 여론 때문에 교각은 이미 달린 등도 꺼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의 밤들을 거치며 도시는 다시 밝아지고 있다. 이번엔 시민들이 밝은 밤거리 문화를 체험한 만큼 향후 전국적으로 시장 규모가 얼마나 커질지는 계산조차 되지 않는다는 게 경관 조명업계 관계자들의 눈부신 전망이다. 그 때문에 빛이 사람을 포함한 동·식물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는 ‘빛 공해론’이 설득력을 얻기도 하고, 유럽과 미국에서 석조 건물에 적용되던 경관 조명을 대개 나무로 된 우리나라의 오래된 문화재에 붙이는 것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다. 광원에서 나오는 열과 빛이 오래된 단청의 색을 탈색시키고, 조명기구를 설치하기 위해 어딘가에 구멍도 뚫어야 하기 때문이다.
경관조명을 한 한강 다리들
그럼에도 경관 조명이 많은 장점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경관 조명회사로 유명한 누리플랜의 이연소 디자인 실장은 “빛이 주변을 낮추고, 장소의 특징을 강조함으로써 낮에 눈에 띄기 어려운 장소성을 강조한다. 빛을 적절히 이용해 각 건물과 도시의 얼굴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경관 조명을 통한 리모델링은 건물 자체의 리모델링보다 훨씬 적은 비용을 사용하면서 드라마틱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전기요금도 교각 하나를 한 달 내 밝히는 데 100만원, 20일 동안 루미나리에를 하는 데 450만원 정도여서 빛이 벌어들이는 수입을 생각하면 효율적인 프로젝트이다. 낮에 스쳐가는 관광객들보다 밤에 머무는 관광객들이 3.5~5배 이상 더 많은 돈을 쓴다는 통계도 있다. 밤 관광을 하려면 숙박과 식사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업적 목적을 갖고 조명 경쟁을 벌이는 것도 이해가 된다.
남산 서울타워를 10년 임대해 15억원을 들여 조명을 한 건 CJ이고, 종로2가에서 ‘빛의 축제’를 하는 건 HSBC은행이다. 올해 새로 문 연 신세계백화점의 기를 꺾기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의 크리스마스 조명으로 장식해 명동 일대를 밝힌 건 롯데백화점이다. 롯데백화점 디자이너인 황주미 씨는 “쇼핑센터들의 연말 조명은 한 해 매출 실적을 따른다”고 말했다.
밤에 오히려 더욱 입체적으로 보이는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서울 신문로 흥국생명 앞의 광원이 감춰진 예술적인 크리스마스트리, 교보문고와 영풍문고의 단순하나 감각적인 장식, 동대문 두타 빌딩의 요란한 조명은 기업과 건물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들에 비하면, 세종문화회관의 경관 조명, 이순신 동상과 광화문의 ‘납작한’ 투과기 조명은 시대에 뒤떨어져 보인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광화문의 가로수들에 올해 처음으로 ‘컬러 체인지’ 조명등이 달릴 예정.
서울광장의 루미나리에를 만드는 몬테베르데 씨.
“루미나리에는 건물과 길,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함께 고려하여 이 공간에 어떤 빛을 놓을 것인지를 논리적으로 조합하는 매우 복잡한 공간 설치작업(space management)이다. 색등을 다는 것이 모두 루미나리에가 아니고, 불을 켠다고 다 경관 조명이 아니다.” 그의 말처럼 경관 조명은 밤을 낮처럼 밝히는 것이 아니다. 밤의 도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지자체에서 무조건 ‘청계천처럼 해달라’고 할 때 안타까워요. 해선 안 될 곳에 조명등을 달고, 밤을 살리려 낮의 풍경을 망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어요. 빛이란 한번 켜지면 꺼지지 않아요. 그래서 도시의 특성을 분석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결과를 신중하게 예상해야 합니다.” (이연소, 조명 디자이너)
자연물과 건물에 주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열 발산을 줄인 첨단 조명기구들이 빠르게 개발되는 것에 비하면 경관 조명의 문화적 맥락에 대한 연구는 지나치게 느리다. 문영빈 문화재전문위원은 “문화재 조명을 둘러싸고 지자체 욕심과 싸워야 하는 일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눈과 빛이 매혹적인 이유는 ‘어둠’을 만들기 때문이다. 흰색과 휘황함으로 보기 싫은 것을 감추는 힘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밝은 빛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건, 그만큼 어두운 부분들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추운 겨울, 새삼스럽게 밝아진 빛이 우리에게 비춰주는 교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