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사망과 관련된 뉴스들은 두 가지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먼저 사우디 왕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국제 유가가 요동쳤다고 한다. 세계 석유 매장량의 4분의 1을 가지고 있는 최대 산유국의 통치권자가 죽었으니 행여 원유 수급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을까 하는, 시장의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이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두 번째다. 후임 국왕 즉위식에 서방 여러 나라의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는 것이다. 이는 서방에 대한 적대 감정이 높은 중동 지역에서 사우디가 대표적인 친(親)서방-더 정확히 말하자면 친미-국가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막대한 산유량과 친미 성향. 이 두 이미지에 아마도 사우디의 역사와 현실, 그리고 위상이 압축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서방세계에 값싸게 원유를 공급해온 ‘주유소’, 그것이 바로 사우디인 셈이다.
이 나라의 친미, 친서방 노선은 테러리스트 빈 라덴이 왜 이 나라 출신인지를 설명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 빈 라덴뿐만 아니라 많은 테러단체 조직원들을 사우디가 많이 ‘배출’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미군이 사우디에 진주하게 된 일이었다. 이슬람의 영토에 ‘십자군’을 불러들인 것을 이슬람인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사우디가 중동 국가이면서도 95년 수도 리야드 테러 등 알 카에다 공격의 주요 표적이 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사진)에는 미국과 사우디의 각별한 관계를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영화에서 무어는 미국 내 사우디의 경제적 영향력에 관해 금융 전문가와 대화하는데, 그 장소가 워싱턴의 사우디 대사관 밖이다.
무어는 이 전문가와의 대화를 통해 사우디 정부가 미국에 투자한 금액이 수천억 달러며, 이는 미국 경제에서 6~7%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어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보안요원이 나타나 무어에게 사우디 대사관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냐고 묻는다.
‘백악관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닌데, 보안 요원이 나타나 사우디 대사관 길 건너에서 뭘 하고 있는지 물어봤다?’ 무어는 왜 그럴까라고 의문을 던지면서 부시 가문과 사우디 정부(왕실)와의 커넥션을 파헤친다.
그러나 사우디 왕실과 미국 간의 돈독한 ‘우호’ 관계는 그 뿌리를 찾자면 20세기 말이 아닌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 한 통의 편지를 보자. 노르망디 침공 3개월 전인 1944년에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것이다.
“이란 및 이라크에 있는 우리의 유전을 곁눈질하지 않겠다는 귀국의 보장에 대단히 감사하는 바입니다. 우리도 사우디에 있는 귀국의 이해관계 및 재산에 간섭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보장함으로써 답례하고자 합니다. 영국은 이 전쟁의 결과로서 영토상의 혹은 다른 어떤 이익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정당하게 우리에게 속한 어떤 것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두 강대국 지도자들 간에 사우디 등 중동의 국가들은 말하자면 일종의 ‘점유물’이었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그려진 것처럼 영국 군인 로렌스와 함께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었던 이븐 사우드 왕이 자신의 부족 이름을 딴 나라를 건국한 건 1927년. 그때만 해도 별 쓸모없는 사막 정도로나 여겨졌던 아라비아반도가 이렇게 열강의 치열한 각축물이 된 것은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석유 때문이었다.
사우디와 미국 간의 결속은 냉전시대에 더욱 강화된다. 주요 산유국들이 소련의 영향 아래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은 군사 쿠데타나 왕정복고를 지원하고 이를 통해 중동에서 친미 정권들을 세운 것이다. 미국은 사우디의 석유에 대한 ‘무제한적이고 영구적인 접근권’을 갖는 대신 사우디 왕족을 내·외부의 적들로부터 보호해주는 후견인 구실을 하는 식이었다. 빈 라덴이 반미 테러와 함께 ‘사우디 왕조 퇴진’ 운동을 벌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알라의 선물’이라고 불리는 석유. 그러나 그 선물은 사우디에 축복과 함께 그에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의 불안과 분열도 안겨준 것이다.
막대한 산유량과 친미 성향. 이 두 이미지에 아마도 사우디의 역사와 현실, 그리고 위상이 압축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서방세계에 값싸게 원유를 공급해온 ‘주유소’, 그것이 바로 사우디인 셈이다.
이 나라의 친미, 친서방 노선은 테러리스트 빈 라덴이 왜 이 나라 출신인지를 설명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 빈 라덴뿐만 아니라 많은 테러단체 조직원들을 사우디가 많이 ‘배출’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미군이 사우디에 진주하게 된 일이었다. 이슬람의 영토에 ‘십자군’을 불러들인 것을 이슬람인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사우디가 중동 국가이면서도 95년 수도 리야드 테러 등 알 카에다 공격의 주요 표적이 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사진)에는 미국과 사우디의 각별한 관계를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영화에서 무어는 미국 내 사우디의 경제적 영향력에 관해 금융 전문가와 대화하는데, 그 장소가 워싱턴의 사우디 대사관 밖이다.
무어는 이 전문가와의 대화를 통해 사우디 정부가 미국에 투자한 금액이 수천억 달러며, 이는 미국 경제에서 6~7%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어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보안요원이 나타나 무어에게 사우디 대사관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냐고 묻는다.
‘백악관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닌데, 보안 요원이 나타나 사우디 대사관 길 건너에서 뭘 하고 있는지 물어봤다?’ 무어는 왜 그럴까라고 의문을 던지면서 부시 가문과 사우디 정부(왕실)와의 커넥션을 파헤친다.
그러나 사우디 왕실과 미국 간의 돈독한 ‘우호’ 관계는 그 뿌리를 찾자면 20세기 말이 아닌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 한 통의 편지를 보자. 노르망디 침공 3개월 전인 1944년에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것이다.
“이란 및 이라크에 있는 우리의 유전을 곁눈질하지 않겠다는 귀국의 보장에 대단히 감사하는 바입니다. 우리도 사우디에 있는 귀국의 이해관계 및 재산에 간섭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보장함으로써 답례하고자 합니다. 영국은 이 전쟁의 결과로서 영토상의 혹은 다른 어떤 이익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정당하게 우리에게 속한 어떤 것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두 강대국 지도자들 간에 사우디 등 중동의 국가들은 말하자면 일종의 ‘점유물’이었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그려진 것처럼 영국 군인 로렌스와 함께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었던 이븐 사우드 왕이 자신의 부족 이름을 딴 나라를 건국한 건 1927년. 그때만 해도 별 쓸모없는 사막 정도로나 여겨졌던 아라비아반도가 이렇게 열강의 치열한 각축물이 된 것은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석유 때문이었다.
사우디와 미국 간의 결속은 냉전시대에 더욱 강화된다. 주요 산유국들이 소련의 영향 아래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은 군사 쿠데타나 왕정복고를 지원하고 이를 통해 중동에서 친미 정권들을 세운 것이다. 미국은 사우디의 석유에 대한 ‘무제한적이고 영구적인 접근권’을 갖는 대신 사우디 왕족을 내·외부의 적들로부터 보호해주는 후견인 구실을 하는 식이었다. 빈 라덴이 반미 테러와 함께 ‘사우디 왕조 퇴진’ 운동을 벌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알라의 선물’이라고 불리는 석유. 그러나 그 선물은 사우디에 축복과 함께 그에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의 불안과 분열도 안겨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