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일 신년 하례식장으로 가고 있는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왼쪽).
유명 변호사를 영입한 것은 삼성만이 아니다. SK그룹도 올 6월, SK㈜ 사장 직속으로 윤리경영실을 신설하고 부사장급인 실장에 김준호 서울고등검찰청 부장검사를 선임했다. 그 6개월 전에는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을 지낸 강선희 변호사를 상무로 영입했다. LG그룹 또한 최근 김상헌 법무팀장을 상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최근 1~2년 새 사법연수원을 갓 수료한 젊은 변호사 10여명을 채용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처럼 주요 그룹들이 법무팀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이유는 최근 몇 년 새 ‘법률 리스크’에 대한 위기의식이 그만큼 커진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재계를 온통 뒤흔들어놓은 SK사태와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결정적이었다. 그룹 총수는 물론 주요 임원이 검찰청과 법정을 들락거리는 상황이 이어졌다. 경영 관련 법규도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있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증권집단소송법 외에도 공정거래법, 금융지주회사법, 제조물책임법 등 주의 깊게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될 법규들이 한아름이다. LG 법무팀 김범순 차장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인수합병 활성화 등으로 기업의 법률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앞으로도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 안팎에는 삼성이 이실장을 영입한 것은 법대 교수들이 2000년 고발한 ‘에버랜드 사모 전환사채(100억원) 부당 저가 발행’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 사건은 경영권 승계에 대한 ‘도덕적 심판’의 성격도 띠고 있어 삼성을 몹시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당초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에 배당됐던 것이 특수2부를 거쳐 최근에는 다시 금융조사부로 옮겨진 상태다.
이종왕 변호사 삼성행 재계 화제
삼성 측은 이러한 시각을 “급변하는 국내외 경제 환경에 부응하고 글로벌 기업에 걸맞은 법무 역량 확충을 위한 것일 뿐”이라 일축하고 있다. “향후 경영 활동에 대한 실질적 법률 지원 및 법적 리스크의 사전 예방을 통한 기업 경쟁력 제고가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종왕 실장도 “수습이 아니라 방지가 내가 할 일”이라며 “이미 발생한 건에 대해 뭔가를 하기보다는 앞으로 발생할지 모를 경영 관련 법적 문제를 스크린해달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했다. 또 자신의 일에 대해 과도한 관심이 쏟아지는 것에 대해 “내 전임인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이 어떤 일을 했는지 보라. 후진을 양성하고 기업의 법률 문제를 사전 스크린해준다는 것 외에 무슨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2004년 1월9일 대검찰청에 출두하고 있는 손길승 SK 회장(오른쪽).
다른 그룹에서는 이실장의 삼성행에 대한 불만 섞인 얘기가 터져나오고 있다. LG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실장은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 당시 4대 그룹의 주요 소송을 도맡아한 인물이다. 우리 치부를 다 아는 사람이 특정 그룹으로 간다니 영 개운치 않다. 의뢰인들에 예의가 아니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른 그룹에서는 “김&장 쪽에 정식 항의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고 한다.
물론 변호사가 특정 소송을 맡았다 해서 취업이나 법률 자문에 제약을 받을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의뢰인의 비밀 유지는 변호사의 기본 윤리다. 이실장도 “그와 관련해서는 의뢰사의 핵심 인사들에게 이미 양해를 구했다”고 밝혔다.
사실 삼성 법무팀의 막강한 진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구조본 관계자도 “이실장 영입 건 하나만 보면 무척 ‘섹시’하게 느껴지지만 이전에도 우리 회사에는 거물급 법조인이 많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삼성은 어떤 그룹보다 국내 변호사 자격증 소지자를 많이 고용하고 있다. 구조본 법무팀에만 5명의 변호사가 있다. 삼성전자는 20여명에 이른다. 또 각 계열사별로 사외이사, 고문 등으로 스타급 법조인을 영입해왔다. 이들은 전직뿐 아니라 ‘삼성 근무 이후’ 경력마저 화려해 삼성의 감식안 내지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한다. 윤영철 헌법재판소장과 김석수 전 국무총리,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측근으로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 당시 구속된 서정우 변호사, 송정호 전 법무부 장관 등 법조계의 쟁쟁한 인사들이 모두 삼성을 거쳤다. 삼성은 이번에 이실장 외에 유승엽 서울중앙지검 총무부 검사를 구조본 법무실 상무로, 수원지방검찰청 출신 이명규 검사를 삼성중공업 법무실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2003년 11월 LG홈쇼핑 본사를 압수수색하고 있는 대검 중수부 직원들(가운데).
김실장은 SK 임원으로 재직 중인 한 지인의 소개로 그룹과 인연을 맺게 됐다. 최태원 회장의 신일고-고려대 3년 선배인 점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 초 이미 ‘이동’을 결심했으나 2월1일 정책기획단장이던 이훈규 검사장이 서울남부지검장으로 승진해가면서, 업무 공백이 생길 것을 우려해 시기를 늦췄다. 정책기획단에서 함께 일한 양난주 보좌관은 “김실장의 SK행이 알려지자 지금 한창 잘나가는 사람이 의외의 선택을 했다며 놀라워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두 개의 법무조직 갖춘 SK
SK가 강선희 상무에 이어 김실장을 영입한 것은, SK사태를 겪으면서 투명경영 실현을 통한 지배 구조 안정을 위해서는 법 이론과 현실에 정통한 법조인을 영입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인식을 갖게 된 때문이다. SK의 한 고위관계자는 “그룹의 두 회장이 번갈아 수감되는 와중에도 검찰 분위기조차 제때 파악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소버린이 경영권을 위협하는 마당에 투명경영 실현은 이제 그룹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돼버렸다. 그런데 우리 법무팀에는 국제변호사만 3명이 있을 뿐이었다. 고시 출신 변호사가 절실히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김실장은 “SK사태와 관련해서는 할 일이 많지 않다. 이미 수사가 마무리돼 1심 판결까지 나온 상황이다. 새롭게 더 꾸밀 일이 없다. 나는 김&장의 소송 진행 상황을 체크하는 일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정작 내가 할 일은 회사가 법적인 면을 소홀히 해 생길 수 있는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다. 기업은 수많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곳이다. 그만큼 분쟁 소지가 많은데, 그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실장 영입으로 SK 법무조직은 두 개가 됐다. 하나는 김실장이 맡은 사장 직속 윤리경영실이다. 감사팀과 법률자문팀으로 나뉘어 회사 전체의 윤리규범 시스템 구축 및 이행 점검, 재무 감사, 투자회사에 대한 감사 등의 기능을 맡게 된다. 또 하나는 SK㈜ 경영지원 부문 산하의 CR(Corporate Relation)전략실 내 법무팀이다. 강선희 상무는 영입 직후엔 CR전략실 법무지원팀장으로 일하다 6월 이후 윤리경영실의 법률자문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LG그룹도 법무팀을 계속 강화하고 있다. 최근 부사장으로 승진한 김상헌 법무팀장은 판사 출신으로 하버드대학 법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법무팀 관계자는 “2000년부터 진행된 지주회사 설립을 무리 없이 마무리한 데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한 것으로 안다”며 “우리도 이전에는 법무 담당자가 부사장까지 승진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LG 법무팀장 부사장 승진
LG에는 김상헌 부사장 외에 검사 출신인 권오준 상무가 있었다. 지난해 권상무가 LG전자로 자리를 옮기면서 광주지검 부부장검사 출신인 이종상 상무를 새로 영입했다. 2002년 이후에는 사법연수원을 갓 졸업한 과장급 신입사원을 10명 채용했다. 이로써 LG그룹은 13명의 국내 변호사를 보유하게 됐다. 해외변호사까지 합치면 20명이 된다.
LG 역시 다른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총수·임원 등과 관련한 형사 소송은 김&장, 광장, 세종 등의 대형 로펌에 주로 의뢰하고 있다. 법무팀 김범순 차장은 “그룹 법무팀은 그런 쪽보다는 지주회사 관련, 자회사 실적 관리, 지적 재산권 및 브랜드 관리 등에 주로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활동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의 대표적 엘리트인 법조인들이 국내 굴지 기업에 속속 둥지를 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정치적 해석이 가능한 인사들의 눈에 띄는 움직임은 아무래도 언론과 여론의 관심을 벗어나기 힘들다. 우리 법조계가 구태의연한 ‘정실수사, 정실재판’으로부터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까닭이다.
법무법인 한누리의 감주영 변호사는 “사회 전체는 투명해지는데 법조계는 아직 로비, 불법, 반칙이 판치고 있다. 아는 판사, 검사에게 변호사가 ‘사적 언급’을 하는 것은 미국 같은 나라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대형 로펌들만 해도 중요 사건이 떨어지면 회의를 열어 재판부의 성향·학력·약력부터 분석한다. 적절한 인맥을 대기 위해서다. 기업들 또한 행여 발 넓은 법조인을 반짝 영입해 뭔가 부당한 이득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