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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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영화판 희망 잡고 버틴다

한국 영화의 힘 ‘현장 스태프’ … 신분 불안정, 수입 들쭉날쭉, 생존경쟁 ‘3중고’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4-03-11 15: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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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고픈 영화판 희망 잡고 버틴다

    영화 ‘라이어’ 촬영장에서 촬영을 지켜보며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는 스태프들.

    ‘쿵… 덜컹.’ ‘쿵… 덜컹.’

    벌써 몇 시간째다. 흰 장갑을 낀 채 두꺼운 철문을 계속 여닫고 있는 것이. ‘슛!’ ‘쿵’ ‘컷!’ ‘덜컹’ 감독의 우렁찬 외침에 따라 움직이는 문소리가 마치 고수의 추임새 같다. ‘오~케이!’ 마침내 연출부의 유쾌한 웃음이 터져나오면서 아홉 번이나 반복한 한 장면 촬영이 끝났다.

    3월4일 경기 남양주시 서울종합촬영소 영화 ‘라이어’ 촬영 현장. 기자는 제1 스튜디오의 철문지기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오전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이날 하루는 거창할 듯했다. ‘동갑내기 과외하기’로 전국 520만 관객을 동원한 김경형 감독의 두 번째 영화에 스태프로 참여하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창 성가를 올리고 있는 한국영화 촬영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무엇이 우리 영화의 ‘봄날’을 가져왔는지, 관객 1000만 시대에 영화판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생하게 느껴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라이어’ 현장서 종일 문 여닫기

    섭외에 응해준 영화사 직원은 “예전에 스포츠지 기자 한 명이 현장체험을 왔다가 하도 힘들어서 울고 갔다”며 겁을 줬지만, 주진모 공형진 송선미 등 유명 배우들의 연기를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며칠 전부터 가슴은 설레기만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오전 내내 배우들과 멀찌감치 떨어진 채 문만 여닫고 있는 것이다.

    배고픈 영화판 희망 잡고 버틴다

    현장 스태프들의 업무인 점심 준비(위), 세트장 청소 등을 하고 있는 기자.

    ‘라이어’ 촬영은 동시녹음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감독의 ‘슛’ 사인 후 소음이 생기면 NG(No good)가 난다. 문지기는 이 ‘슛 이후 소음’을 통제하는 데 꼭 필요한 사람. ‘슛’ 소리가 울리는 순간 ‘쿵’ 출입문을 닫는다. 밖에서 억지로 열고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문고리를 움켜쥐는 것도 그의 몫이다. 10여초 후 ‘컷’ 소리가 울리면 재빨리 문을 ‘덜컹’ 열어 스태프와 장비가 출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다시 슛, 또 컷.

    감독의 고함에 맞춰 한 장면이 10여회씩 되풀이 촬영되는 동안 출입문을 잘 관리하는 것이 기자에게 주어진 ‘중요’ 업무였던 것이다. 이 일은 문 앞을 한순간도 떠날 수 없는 ‘바쁜’ 일이다. 배우와 연출부가 제아무리 멋진 OK 장면을 만들어낸다 해도,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자장면 시키신 분~’ 하는 소음이 울린다면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기자에게 일을 맡기며 제작부장은 그 취지를 충분히 설명해주었고, 기자 역시 마음 깊이 이해했다. 현장 스태프를 자원하며 바랐던 것이 ‘중요하고’ ‘바쁜’ 일이었으니 오히려 감사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루하고 실망스러운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NG 난 후 소품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거나 조명을 들어주는 것과 같은, 조금이라도 영화 촬영과 직접적으로 관계있는 일은 없을까. 게다가 출입문 앞에만 서 있으니 세트 안에서 진행되는 영화 촬영 장면은 구경조차 할 수 없지 않은가. 들리는 것은 ‘슛’과 ‘컷’, 그리고 장면이 끝날 때마다 연출부 스태프들 사이에서 터지는 코미디 영화 특유의 우렁찬 웃음소리뿐이니 좀이 쑤셨다.

    배고픈 영화판 희망 잡고 버틴다

    촬영 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오랜 도제식 교육을 버텨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전에 울고 갔다는 그 스포츠지 기자, 너무 지루해서 참다 참다 울어버린 거 아니에요?”

    결국은 함께 문고리를 잡고 있던 스태프 김나현씨에게 투정을 부리고 말았다. 답답한 마음 한편으로는 영화 촬영 내내 같은 일을 묵묵히 해왔을 그의 심정이 궁금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같이 맞장구쳐주리라 기대했던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결했다.

    “원래 영화 촬영장에서 스태프는 엄마랑 똑같은 거예요. 꼭 필요한데 빛이 안 나는 일은 다 해야 하는 게 임무인걸요. 로케이션 촬영을 가면 모여드는 사람들 정리하랴, 진행 챙기랴 정신이 하나도 없죠. 전에 그 기자 분은 ‘로케’ 때 따라갔다가 너무 지쳐서 운 거고요.”

    영화 스태프는 크게 제작부, 연출부, 기술부, 아트부 등으로 나뉜다. 연출부는 영화 연출을, 기술부는 촬영과 조명 동시녹음을, 아트부는 세트 제작과 소품 의상 등을 맡고 제작부는 그외의 모든 일을 한다.

    돈 관리를 하고, 출입문을 지키고, 쓰레기를 치우고, 생일을 맞은 스태프를 위해 케이크와 꽃을 준비해 깜짝 생일파티를 열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심지어 주연배우 송선미가 점심을 먹고 체하자 그를 위해 소화제를 준비한 스태프도 제작부였다. ‘영화가 제대로 만들어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은 생각보다 훨씬 포괄적인 개념이었다.

    경험만 인정 ‘도제식 시스템’

    배고픈 영화판 희망 잡고 버틴다

    재미있는 영화 장면 뒤에는 현장 스태프들의 고된 노력이 숨어 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스태프들은 대부분 전천후다. 외부 촬영 때 이들은 슈퍼맨이 되어 초인적인 ‘활약상’을 펼치기도 한다. 택시기사가 주인공인 ‘라이어’는 세트 촬영이 많은 일반 코미디물과 달리 차량 질주 같은 액션신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영화. 전속력으로 달리던 택시가 뒤집히는 위험천만한 장면도 있다. 외부에서 이런 장면을 찍을 때 스태프들은 스튜디오의 문을 지키듯 주변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고, 필요한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스태프 권유경씨는 자유로 질주 장면을 촬영할 때 경찰 허가 없이 차량을 통제하느라 달리는 차 앞에 뛰어들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서늘하다고 털어놓았다.

    “촬영은 해야 하는데, 허가받기는 어렵고. 원래 영화 스태프들은 안 되는 일 되게 하는 게 특기거든요. 그냥 도로에 올라가서 차를 막았는데 다행히 통제가 되더라고요. 후닥닥 촬영하고 돌아섰죠. 사고 없이 잘 끝나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마침 사고 이야기를 하던 탓이었을까. 갑자기 천장에서 ‘퍼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명등이 하나 둘 터지기 시작했다.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촬영은 순식간에 올 스톱됐고 함께 문을 지키고 있던 스태프들은 전구가 떨어진 세트 밑으로 뛰어갔다. 장비를 정리하고 보상받는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다.

    길을 막고, 문지기를 한다고 해서 이들을 비전문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김나현씨는 연극영화과를 졸업했고, 권유경씨도 영화판에서만 8년째 잔뼈가 굵었다. 최근에는 영화 일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스태프 대부분은 최소한 대졸 이상. 대학원 졸업자도 상당수일 만큼 ‘가방 끈이 길다’. 이들이 빛조차 나지 않는 스태프 일을 하는 이유는 ‘영화가 좋고’ 영화를 만들기 위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좀더 실질적인 이유는 ‘이 경험을 통해 좀더 전문적인 영역으로 올라갈 발판을 쌓기 위해서’다.

    촬영이 중단되자 제작부장은 새로운 일을 맡겼다. 점심상을 차리라는 것. 영화 제작자나 감독을 꿈꾸는 ‘가방 끈 긴’ 이들이 배우는 ‘영화 일’ 가운데는 밥 푸고, 반찬 놓고, 국 뜨고, 수저 놓는 일도 있다. 한국 영화계의 현실은 아직 굳건한 ‘도제식’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화를 사랑한다 해도 이런 과정을 겪는 동안 지치지 않을까. 이 작품으로 처음 영화를 시작했다는 한 스태프는 기자에게 영화판이 생각했던 것만큼 매력적이지 않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가장 힘든 것은 일 자체가 아니라 인간관계이며 문화 자체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다”라는 것이다.

    “대학에서 관련 학과를 졸업하고 영화가 좋아서 현장에 들어왔는데 지금 하는 건 온통 잡일이에요. 뭐 하나 제 의사를 내놓을 수도 없고, 그냥 윗사람이 하라는 일 묵묵히 하는 사람만 인정받는 분위기거든요. 우리는 신분보장이 전혀 안 되잖아요. 한 작품 끝나고 다음 영화 또 들어가려면 사람 많이 알아두는 것, 이 바닥에서 좋은 평판을 쌓는 것밖에 방법이 없으니까 무슨 일이 생겨도 그냥 꾹 참아야 하는 거죠. 그런 게 너무 힘들어요.”

    보통 영화 한 편을 촬영하는 데 걸리는 기간은 4~5개월. 그동안 스태프들은 대부분 현지 여관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촬영하는 것도 흔한 일. 하지만 그런 육체적인 어려움보다 훨씬 괴로운 것은 불안정한 신분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갖가지 문제라는 것이 스태프들의 공통된 불만이다.

    스태프들은 대부분 영화마다 계약을 새로 체결하는 프리랜서다. 요즘처럼 영화에 대한 선망이 높아지면서 영화를 시작하려는 이들이 많아지는 상황은 이들에게 유리할 것이 없다. 더 싼 가격에, 더 많은 일을 하더라도 영화만 할 수 있다면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이들이 적지 않은 탓이다.

    영화가 대박을 터뜨린다 해도 이들에게 나아지는 것은 없다. 오히려 엄청난 제작비가 투입되는 대작이 많아지면, 전체 제작 편수가 줄어들어 더 치열한 생존 경쟁이 벌어질 뿐이다.

    한 스태프는 영화계에 입문한 말단 스태프가 받는 돈은 영화 한 편당 200만원 수준이라고 귀띔했다. 기간으로 나눠보면 한 달에 40만원꼴. 이것도 그나마 영화가 제때 시작돼 잘 끝나고, 영화사가 망하지 않는 수준의 관객이 들었을 경우에만 보장되는 액수다. 캐스팅이 꼬이거나, 중간에 자금이 부족해 영화가 ‘엎어지는’ 경우, 그 기간 꼬박 함께 일한 스태프의 노동은 ‘무료봉사’가 돼버리고 만다. 반면 영화가 ‘대박’을 터뜨린다고 해서 스태프에게 돌아오는 것은 별로 없다. 최근 ‘실미도’가 성공한 후 제작사가 스태프들에게 100% 성과급을 지급한 것이 영화계에서 극히 드문 ‘사건’이었을 정도다.

    ‘라이어’의 미술감독을 맡은 정은영씨는 “8년 전 내가 영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막내 스태프들은 아예 돈을 전혀 받지 못했다. 어떻게든 버텨서 감독이 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제는 최저생계비라도 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됐지만 여전히 살기에 너무 어렵다”며 안타까워했다. 야근을 할 경우 ‘시간외수당’을 받는 할리우드식 시스템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영화를 직업으로 삼고 살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이다. 하지만 무료봉사하는 스태프가 없으면 지금 같은 한국영화 전성기가 가능했을까.

    우울한 식사를 마치고 스튜디오로 올라오자 어느새 ‘능력 있는’ 스태프들은 점심도 거른 채 뚝딱뚝딱 조명등을 다 교체하고, 현장을 말끔히 정리해두었다. 오후 촬영 시작이다.

    화려한 조명 뒤 세트 구석에서 분주히 다른 세트를 제작하고, 감독과 배우를 위한 커피를 타고, 문고리를 잡고 있는 이들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한국영화의 오늘을 만들고 있는 이들, 하지만 그 찬란한 중심에서 여전히 벗어나 있는 이들이다.

    여전히 문고리를 잡고 서 있는 기자 한편에서는 갑작스레 내리는 눈 때문에 비상회의가 열렸다. 이날은 중부지방에 기상 관측 사상 최악의 폭설이 내린 날. 그러나 ‘라이어’ 팀은 3월에 눈이 내릴 것이라는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한 채 야외촬영을 예정해두고 있었다. 뒤집힌 택시 안을 촬영해야 하는 탓에 제작부는 견인차를 불러 스튜디오 한켠에 택시를 들고 들어오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눈은 쏟아졌고, 결국 그곳에 갇힐 것을 우려한 기자는 촬영의 마지막을 보지 못한 채 오후 8시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다.

    다음날 제작부 스태프에게 전화를 했다. 어제 폭설에 작업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외부에서 찍으려던 차량 신을 스튜디오 안에서 찍느라 견인차를 동원해 차를 끌어들였고 오전 2시쯤 모든 작업이 끝났다는 것이다. 기자가 갔던 날 아침 이들이 출근한 시간은 오전 6시30분. 그때부터 다음날 오전 2시까지, 꼬박 20시간 가까운 노동을 마친 제작부 스태프의 일당이 과연 얼마였을까 계산이 되질 않았다. 아직 젊은 그는 다음 영화에서도, 또 다음 영화에서도 지금처럼 열정을 다해 ‘잡일’에 뛰어들 수 있을까. 그런 젊은이들의 ‘희생’을 담보로 잡고 한국영화는 계속 발전해나갈 수 있을까. 영화 관객 1000만 시대를 휘청휘청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훔쳐본 듯해 가슴 한켠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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