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가려져 있던 문화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독특한 소설이 나와 눈길을 끈다. ‘산은 산 물은 물’ 등 불교 관련 소설과 에세이를 주로 발표해온 소설가 정찬주씨(50)가 착수 5년 만에 내놓은 ‘대백제왕’이 그것.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물의 뒤안을 샅샅이 뒤져 놀라운 추론을 이끌어내고 있는 역사추리소설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문화재는 1993년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 주차장 터에서 발견돼 세인을 놀라게 한 금동대향로와 일본 호류지(法隆寺) 몽전(夢殿)의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 타오르는 불꽃 모양의 금동대향로는 화려한 문양과 형상으로 백제 문화의 찬란함을 보여주지만 언제 어디에서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는지는 밝혀진 게 없다. 최근 학계에서 10주년 세미나를 여는 등 의미 찾기에 나섰지만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유산이다.
구세관음상은 녹나무로 조각해 금박을 입힌 목조불상으로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페놀로자가 “한국 미술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호류지측은 수백년 동안 이를 비불(秘佛)로 감춰뒀다가 최근에야 봄 가을에 일주일만 공개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 각지에서 이 불상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데, 이유는 이 불상이 자신들의 시조 격인 쇼토쿠(聖德) 태자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동대향로와 구세관음상이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작가의 추론을 따라가기 위해 우선 그 시대로 돌아가보자.
서기 538년, 수도를 공주에서 부여로 옮긴 성왕(聖王)은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는 등 백제 중흥을 꿈꾼다. 그러나 성왕은, 아들 여창(뒤에 위덕왕이 됨)이 신라군과 접전을 벌이는 관산성으로 가던 중 신라 매복군에게 공격당해 머리를 잘리는 죽음을 당하고 만다. 여창은 선왕의 뒤를 잇고도, 비통하게 죽은 선왕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추복(追福) 불사를 단행하며 3년간 왕위를 계승하지 않는다.
작가는 금동대향로가 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능산리 2호 고분 옆 능사 터에서 발견됐다는 점과 제작연대를 추측해볼 수 있는 사리감(舍利龕)에 주목했다. 이 사리감은 성왕의 딸이자 위덕왕의 누이동생인 공주가 시주한 것으로 ‘위덕왕 13년(567) 누이동생, 즉 성왕의 딸이 사리를 공양한다(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여기에 더해 금동대향로가 이제껏 단 한 점밖에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작가는 이것이 성왕의 추복을 비는 데 사용했던 제기(祭器)라고 결론짓는다.
구세관음상이 백제 성왕이라는 추론도 재미있다. 성왕은 왜와 가야를 연합한 대제국을 건설하려 했고, 그 일환으로 왜에 불교와 고급 문화를 전해준 인물이다. 그만큼 구세관음상과 성왕의 관련성이 높다. 호류지에 전해지는 고서 ‘성예초(聖譽抄)’에 ‘위덕왕이 부왕의 형상을 연모하여 만든 존상이 곧 구세관음상이다’는 내용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작가는 구세관음상이 백제 성왕상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작가는 이밖에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역사서에 단 한 줄도 언급돼 있지 않은 백제인 왕인의 행적을 좇는다. 왕인은 ‘일본서기’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파한 인물로 기록돼 있고, 일본인들은 바다 건너 그의 출생지(전남 영암)까지 방문하는 등 엄청난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정작 조국에서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다.
작가는 취재 과정에서 왕인이 단순한 서생이 아니라 왜 왕조의 권력투쟁에 가담한 정복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분묘도 발견했다. 그리고 1600여년 동안 맥을 이어온 왕인의 종가를 찾아내 종가 며느리와 인터뷰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이 책은 이렇듯 흩어져 있는 한줌의 역사 사료를 바탕으로 발로 뛰며 외연을 넓힌 논픽션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소설과는 달리 책 뒤에 그가 참조한 책과 논문 50여권의 목록을 실은 것도 단순히 소설을 넘어선 ‘역사’로서의 가치를 드러내 보이고 싶어서가 아닐까.
“물론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의 이야기지요. 그러나 작가는 잠자는 역사를 깨우고,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오늘 우리들의 일처럼생생하게 그려내야 합니다. 끊어진 과거를 현재에 이어서 비로소 살아 숨쉬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해내야만 역사소설이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대백제왕’은 최근 공주 수촌리 고분군의 발굴 등으로 백제사에 대한 관심이 새삼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 나와 백제에 대한 관심에 불을 지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3년 전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전남 화순군 산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글을 쓰고 있는 정찬주씨는 “구한말 격동기를 배경으로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뉘어 각기 특유의 유파를 이끌었던 판소리의 세계를 다룬 대하소설 집필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문화재는 1993년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 주차장 터에서 발견돼 세인을 놀라게 한 금동대향로와 일본 호류지(法隆寺) 몽전(夢殿)의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 타오르는 불꽃 모양의 금동대향로는 화려한 문양과 형상으로 백제 문화의 찬란함을 보여주지만 언제 어디에서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는지는 밝혀진 게 없다. 최근 학계에서 10주년 세미나를 여는 등 의미 찾기에 나섰지만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유산이다.
구세관음상은 녹나무로 조각해 금박을 입힌 목조불상으로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페놀로자가 “한국 미술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호류지측은 수백년 동안 이를 비불(秘佛)로 감춰뒀다가 최근에야 봄 가을에 일주일만 공개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 각지에서 이 불상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데, 이유는 이 불상이 자신들의 시조 격인 쇼토쿠(聖德) 태자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동대향로와 구세관음상이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작가의 추론을 따라가기 위해 우선 그 시대로 돌아가보자.
서기 538년, 수도를 공주에서 부여로 옮긴 성왕(聖王)은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는 등 백제 중흥을 꿈꾼다. 그러나 성왕은, 아들 여창(뒤에 위덕왕이 됨)이 신라군과 접전을 벌이는 관산성으로 가던 중 신라 매복군에게 공격당해 머리를 잘리는 죽음을 당하고 만다. 여창은 선왕의 뒤를 잇고도, 비통하게 죽은 선왕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추복(追福) 불사를 단행하며 3년간 왕위를 계승하지 않는다.
작가는 금동대향로가 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능산리 2호 고분 옆 능사 터에서 발견됐다는 점과 제작연대를 추측해볼 수 있는 사리감(舍利龕)에 주목했다. 이 사리감은 성왕의 딸이자 위덕왕의 누이동생인 공주가 시주한 것으로 ‘위덕왕 13년(567) 누이동생, 즉 성왕의 딸이 사리를 공양한다(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여기에 더해 금동대향로가 이제껏 단 한 점밖에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작가는 이것이 성왕의 추복을 비는 데 사용했던 제기(祭器)라고 결론짓는다.
구세관음상이 백제 성왕이라는 추론도 재미있다. 성왕은 왜와 가야를 연합한 대제국을 건설하려 했고, 그 일환으로 왜에 불교와 고급 문화를 전해준 인물이다. 그만큼 구세관음상과 성왕의 관련성이 높다. 호류지에 전해지는 고서 ‘성예초(聖譽抄)’에 ‘위덕왕이 부왕의 형상을 연모하여 만든 존상이 곧 구세관음상이다’는 내용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작가는 구세관음상이 백제 성왕상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작가는 이밖에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역사서에 단 한 줄도 언급돼 있지 않은 백제인 왕인의 행적을 좇는다. 왕인은 ‘일본서기’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파한 인물로 기록돼 있고, 일본인들은 바다 건너 그의 출생지(전남 영암)까지 방문하는 등 엄청난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정작 조국에서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다.
작가는 취재 과정에서 왕인이 단순한 서생이 아니라 왜 왕조의 권력투쟁에 가담한 정복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분묘도 발견했다. 그리고 1600여년 동안 맥을 이어온 왕인의 종가를 찾아내 종가 며느리와 인터뷰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이 책은 이렇듯 흩어져 있는 한줌의 역사 사료를 바탕으로 발로 뛰며 외연을 넓힌 논픽션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소설과는 달리 책 뒤에 그가 참조한 책과 논문 50여권의 목록을 실은 것도 단순히 소설을 넘어선 ‘역사’로서의 가치를 드러내 보이고 싶어서가 아닐까.
“물론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의 이야기지요. 그러나 작가는 잠자는 역사를 깨우고,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오늘 우리들의 일처럼생생하게 그려내야 합니다. 끊어진 과거를 현재에 이어서 비로소 살아 숨쉬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해내야만 역사소설이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대백제왕’은 최근 공주 수촌리 고분군의 발굴 등으로 백제사에 대한 관심이 새삼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 나와 백제에 대한 관심에 불을 지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3년 전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전남 화순군 산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글을 쓰고 있는 정찬주씨는 “구한말 격동기를 배경으로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뉘어 각기 특유의 유파를 이끌었던 판소리의 세계를 다룬 대하소설 집필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