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희여와도.7세기. 투르판 출토. 남신 복희는 묵통과 자를, 여신 여와는 컴퍼스를 들고 있다.
이 첫 번째 서역 여행 이후 그는 승려들로 탐험대를 조직, 13년 동안 중앙아시아 전역을 탐사하면서 서역의 뛰어난 유물들을 낙타에 실어왔다. 당시 사막을 누비며 유적을 ‘수집’하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 탐험대들 사이에서도 오타니 탐험대는 돋보이는 성과를 얻었다.
한국전쟁 때도 옮겨다니느라 수난
그러나 오타니 탐험대가 수집한 서역의 보물들은 오타니 개인의 불행과 격동의 역사 속에서 ‘우연히’ 조선으로 옮겨졌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서역미술전’(2004년 2월1일까지)이 바로 오타니 고즈이가 가져온 ‘오타니 컬렉션’의 일부다. ‘서역미술전’이 열리는 특별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 젊은 승려가 얼마나 엄청난 일-그것이 ‘약탈’이기는 해도-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서역에서 온 보물들은 하나하나가 황홀하다.
오타니 고즈이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보통 승려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이미 교토 정토진종 본원사파의 본산인 니시 홍간지(서본원사)의 22대 문주로 막강한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당시 니시 홍간지의 예산이 교토의 예산과 맞먹을 정도였다니 어느 정도 세력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귀공자 같은 외모에 황족을 부인으로 맞은 오타니는 런던에서 ‘실크로드의 악마들’이 뛰어난 유물들을 갖고 들어오는 것을 목격한다.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동방정책과 영국의 북방정책이 부딪치던 상황이라 정보수집에 혈안이 된 서구열강들은 국가적 차원에서 탐험대들을 후원하고 있었다. 당시 국가의 지원을 받은 유명한 탐험가로 스웨덴의 헤딘, 영국의 스타인, 프랑스의 펠리오 등이 있다.
이들이 가져온 수집품 중 상당수가 불교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지라 승려였던 오타니는 ‘달마가 서쪽에서 온 이유’, 즉 불교 동점의 경로를 좇고자 실크로드 탐험에 나선다. 국가적 지원 없이 젊은 승려들의 혈기와 교파의 재력만으로 시작한 여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몇 가지 문제점을 태생적으로 가진 탐험이었다.
초화무늬 용기. 13~14세기.투르판 출토.면에 수를 놓아 만든 것으로 고도의 공예술을 보여준다.천부흉상.6~7세기.투르판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진 조상. 묘한 미소와 섬세한 머리결 표현이 매우 뛰어난 솜씨임을 짐작케 한다. 중앙아시아 탐험대를 조직했던 오타니 고즈이(왼쪽부터 시계방향)
두 번째는 전적으로 개인적 프로젝트였던 탓에 탐험 결과도 오타니의 명운에 맡겨졌다는 점이다. 3차 탐험이 진행되던 중 오타니가 문주로 있는 니시 홍간지가 승려들의 배임 횡령 사건에 휘말리자 오타니는 문주 자리를 내놓고 외국을 전전한다. 오타니는 고베의 니락소(二樂莊)란 곳에 서역의 유물들을 보관·전시하고 있었는데, 오타니가 외국에 머물고 재정이 기울면서 유물은 중국 뤼순(旅順)으로 반출된다. 니락소는 유물과 함께 당시 대상인이었던 후사노스케에게 헐값에 팔리고, 후사노스케는 이를 동향 출신인 조선총독부 테라우찌 총독에게 기증한다. 니락소에 있던 오타니 컬렉션이 조선에 도착한 것은 1916년이었다. 후사노스케는 그 대가로 조선의 채광권을 얻었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한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 어쨌든 그 상태로 일본이 패전으로 물러나자 1700점에 달하는 서역의 보물들은 총독부박물관 소장에서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서역의 보물들은 일반인들의 머릿속에서 거의 잊혀진 채 격납되었다. 미군정 시기, 오타니 탐험대의 활동상을 알고 있던 서구 박물관들이 이 유물에 높은 관심을 보이자 미군정 장관은 이를 창고에 보관하도록 했고, 한국전쟁 이후 부산과 경주의 보관창고 등으로 옮겨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중앙아시아 유물 중 한 점이 폭격을 맞았지만 이 시기 유물들의 이동과 관리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도 없다. 비슷한 시기에 수집돼 독일 민속박물관에 있던 유물들이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훼손되자 담당학자가 자살한 것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소홀한 대접이었다.
이 유물들을 다시 꺼낸 것은 1980년대 후반이었다. 중국 여행이 가능해지면서 권영필(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민병훈(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등 우리나라의 학자들이 10년 동안 오타니 탐험대의 행로를 따라가며 유물을 어느 지역에서 가져온 것인지 조사하여 2000년 유물 일부에 대해 정확한 출토지와 명칭, 용도, 시대 등을 발표했다.
비슈반타라 왕자상. 3세기. 미란 사원에서 절취한 것으로 같은 곳에서 떼어낸 벽화들이 일본 도쿄국립박물관과 인도 뉴델리 국립박물관에도 소장돼 있다. 기마여인상.7~8세기.투르판 출토. 진묘수머리.8~9세기. 투르판 출토. 여인상머리.7~8세기. 인물상 중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 (위부터 시계 방향)
전시물은 이국적인 파랑, 흑백과 붉은색의 세련됨과 모던하게 보이는 표현법을 잘 보여준다. 2m 크기의 대작 ‘복희여와도’를 보자.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던 투르판의 묘실에 붙어 있던 이 그림은 천지창조의 설화를 설명한다. 남신 복희와 여신 여와는, 얼굴은 사람이나 몸은 뱀이라 나선형으로 꼬여 있다(이를 DNA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모티브는 중국적인 것이되 음영법을 사용한 회화양식은 서구적이어서 중앙아시아의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이 작품은 선명한 색조와 균형 잡힌 디테일 등 다른 어느 곳에서 발견된 ‘복희여와도’보다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유물들은 중앙아시아 문화가 메마르고 후진적인 유목생활의 소산일 것이란 일반의 상식이 잘못되었음을 웅변해준다. 4세기부터 약 1000년 동안 중앙아시아는 세계의 문명이 편견 없이 모이고 섞이는 곳이었다. 돈황(당시 인구 20만)이나 투르판 같은 오아시스 도시는 지금의 홍콩이나 뉴욕처럼 돈과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문화는 화려하고 기술은 정교했다. 실크로드에서 신라인들의 흔적이 자주 발견되듯 이 같은 해외의 트렌드는 한반도 신라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우리 문화의 한 흐름을 형성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다.
서울대 국사학과 김호동 교수는 “중앙아시아 문화에 대해 관심이 높아진 이유는 우리의 문화가 중국과 서구 외에 전혀 다른 요소, 즉 제3의 초원 문화 및 유라시아 문명과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최근 유행하는 ‘유목민적 삶’에 대한 동경이 중앙아시아 붐에 한 몫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오타니 컬렉션을 담당하는 사람은 단 한 명이다. 민병훈 연구관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전문가를 확충하는 등 일본과 중국 등에 흩어져 있는 오타니 컬렉션을 공동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려 한다”고 말했다.
전 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오타니 컬렉션은 100년 동안의 먼지를 떨어내고 우리의 모습을 온전하게 비춰줄 수 있을까. ‘서역미술전’은 이 물음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