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입성은 아이들에게 ‘확실히’ 좋은 선택인가. 하교 중인 고등학생들.
우선은 돈. 지금 살고 있는 평창동 43평 빌라의 매매가는 2억9000만원이다. 이에 반해 강남·서초구의 30평대 아파트 가격은 5억5000만~9억5000만원. 집 사기를 포기하고 전세를 택하자니 마흔 가까운 나이에 다시 무주택자가 된다는 게 불안하기만 하다. 그래도 아이들이 잘 될 수만 있다면 ‘노후’를 저당잡힐 용의가 있다. 2억원 가량을 융자받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여기서 두 번째 문제가 등장한다. 과연 강남 입성은 아이들에게 ‘확실히’ 좋은 선택인가.
고민하는 K씨를 위해 서초구 반포동에 사는 언니가 일종의 ‘포럼’을 열었다. K씨와 비슷한 또래 자녀를 둔 인근 지역 주부 5명을 초청해 왁자한 수다 한마당을 펼친 것. 이 자리에서 K씨는 또 한 번 좌절하고 말았다.
“우선 사교육비가 엄청나다. 똑같은 영어학원 체인이라도 강남 쪽이 더 비싸고, 또 중학생 정도 되면 학원이 아니라 과목별 과외를 시켜야 한다더라. 우리 애가 지금 다니는 학교에서 전교 30등 정도 한다. 근데 그 성적이면 반포동이나 서초동 중학교에서는 150~200등이 고작일 거란다. 설마 그렇겠냐 했더니 이런저런 데이터를 주욱 읊어대는데, 그 자체에 질려버렸다. 한마디로 엄마들이 너무 무섭다.”
강남 떠났다가 후회 … 재입성파도 있어
그럼에도 K씨는 강남 입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 주말 남편과 대치동 아파트촌을 돌아보며 “번잡하다, 아파트가 너무 낡아 을씨년스럽다, 애들 공부기계 만들 일 있냐”며 온갖 험담을 주고받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싫다’는 감정 그 이상으로 ‘꼭 가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K씨는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될 성부른’ 아이를 둔 비(非)강남파 엄마들이라면 대충 다 그럴 것이다. 강남 현실에 거부감이 들면서도 내 애가 그런 애들과 경쟁하고 있다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고등학생이 되면 어차피 강남 학원가를 찾을 수밖에 없는데 하루라도 빨리 진입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항변했다.
하지만 K씨가 강남 입성을 꿈꾸는 이들의 전형은 아니다. 교육과 재테크,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쪽이 더 많다. “월급쟁이가 노후에 10억원 정도의 재산을 갖길 원한다면 강남 부동산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예를 들어보자. 2001년 초 대치동 선경1차 아파트 31평형의 매매가는 3억2000만원이었다. 그러던 것이 2001년 말에는 4억3000만원, 2002년 말엔 6억7000만원, 현재는 8억5000만원이 됐다. 2년6개월 사이 5억3000만원 가량 상승한 것이다. 대치동이 아닌 ‘일반 강남지역’ 매매가도 같은 기간 1.5~2배씩 올랐다. 이에 필적할 재테크 방법이란 사실상 없다.
2002년 9월 강남구 역삼동으로 이사한 맞벌이 주부 L씨(40)는 교육과 재테크를 위해 이 악물고 ‘사고’를 쳤다.
강남 아파트 구입은 가장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재테크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강남구 공인중개사무소 밀집지역.
강남 진입 전 L씨는 사전조사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었다. 이때 L씨에게 강력한 조언자 역할을 한 사람이 전업주부 S씨(49)였다. 교사 출신인 S씨는 강남 20평대 아파트에 살다 일산으로 이사, 아이 교육 때문에 강남 재입성 후 교육과 재테크에 모두 성공한 이른바 ‘모델 케이스’였다. S씨는 “일산 가서 행복한 건 딱 한 달이었다. 학원 수준이 비교가 안 되더라. 1년 만에 전에 살던 강남 아파트로 되돌아가려 했더니 값이 너무 올라 절망했다. 그래도 빚 왕창 얻어 다시 왔고, 결과적으로 성공했다”고 경험담을 풀어놓았다.
강남으로 이사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L씨는 “만족한다”고 했다. 그 사이 집값이 확실히 올라주었고 아이도 새 분위기에 잘 적응했다. 맞벌이라 ‘과외 카르텔’에 끼지 못할 것을 염려했으나 이 역시 ‘백전노장’ S씨의 도움으로 무난히 헤쳐가고 있다 했다.
이처럼 강남 입성을 꿈꾸는 주부들은 대개 한두 명의 ‘멘토(조언자)’를 두고 있다. 각종 부동산 사이트를 뒤지는 것은 기본. 시간만 나면 주요 공략지역의 공인중개사무소를 순례하고 강남 학원가를 섭렵한다. 그러는 사이 “강남 한번 가볼까” 하는 마음은 “죽어도 가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바뀐다. 자극적인 말들을 너무 많이 듣게 되는 까닭이다.
그 결과가 ‘강남→강북’행 전·입학의 3배에 달하는 ‘강북→강남’행 학생 수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2001년 강북에서 강남으로 전·입학한 초·중·고생은 5003명으로, 강남에서 강북으로 전·입학한 학생 1061명의 2.6배에 달했다. 2002년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 3.1배가 됐고, 올 상반기만도 2.9배에 이른다. 강남지역 부동산업자들에 따르면 일산·분당·인천·부천·광명 등 수도권 지역, 지방 대도시 학생들의 강남 전·입학은 이를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특기할 만한 점은 중학생(2.9배), 고등학생(2.2배)보다 초등학생 전·입학자(3.1배)가 많다는 것. 이러한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데, 이는 “강남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려면 초등학교 3~5학년 때는 이사를 와야 한다”는 ‘멘토’들의 ‘가르침’이 절대적 영향을 끼친 때문으로 보인다.
“사당동 주공 32평형을 2억9000만원에 팔고 반포에 전세를 얻으려 한다. 외아들이 5학년이다. 동작대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교육환경이) 너무 차이 난다.” 서초구 구반포아파트 인근 공인중개사무소에서 만난 회사원 C씨(38) 부부의 말이다. 바로 이런 이들 때문에 강남지역 초등학생 수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많아진다. 강남구 일원동 대모초등학교의 경우에도 1학년생은 149명이지만 6학년생은 224명에 이른다.
그러나 위 통계는 또 다른 사실을 알려준다. 떠들썩한 소문에 비해 ‘강북→강남’ 진입자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자녀가 ‘강남 수준’의 학력을 갖추고 있다 해도, 그래서 전세로나마 강남 진입을 원한다 해도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면 소기의 목적을 거뒀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 중구의 한 공립고등학교 교사인 P씨는 “공동학군(경복·용산·중앙고, 이화여고 등 서울 4대문 안에 위치한 ‘명문’ 사립고) 학교에 지원했다 추첨에서 떨어져 우리 학교로 온 학생들 중 1학년이 되자마자 강남으로 전학 가는 애들이 좀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미미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성북구 장위동에 있는 사립중학교 교사인 S씨도 “그만한 능력이 되는 집은 거의 없다. 강북지역 신흥 학원가인 노원구 중계동 근처로 이사 가는 아이들은 간혹 있다”고 말했다. 결국 비강남 지역의 대다수 서민들에게 강남 입성이란 그 자체로 ‘선택받은 소수’의 배부른 고민인 것이다.
무너진 공교육, 입시 한탕주의, 기형적 부의 집중과 부동산 광풍. 그로 인해 탄생한 ‘강남’이란 우상 혹은 괴물은 이렇게 우리 사회에 자조와 열패감, 질시 어린 갈등과 이중 삼중의 계층의식이란 검은 바이러스를 구석구석 흩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