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석 예술원 회장(맨 오른쪽) 등 연극계 인사들이 문화계의 편가르기 인사를 우려하며 9월19일 오후 서울 정동 세실극장에서 ‘연극인 100인 성명’을 발표했다.
‘코드 맞추기‘ 편파 인사 시비 가열
논란의 단초는 특정 단체 혹은 진보성향 인사에 대한 편향된 인사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뒤 문화계에서도 어김없이 개혁성향의 인사들이 주요 포스트를 차지해왔다. 문화계 진보진영 인사들의 제도권으로의 진입은 2월 민족문학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 이사장인 현기영씨가 문예진흥원 원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현원장은 새 사무총장에 자신과 ‘코드’가 맞는 강형철 작가회의 상임이사를 임명했고, 문예진흥사업을 연구하는 핵심기구인 문예진흥행정혁신위원회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일일문화정책뉴스 담당 편집자 안성배씨와 작가회의의 김형수 시인을 위원으로 기용했다.
문화부 산하단체인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장에는 이영욱 문화개혁시민연대 정책부위원장이, 한국영상자료원장에는 이효인 경희대 교수가 각각 임명됐다. 또 문화부 내 자문기구인 문화행정혁신위원회에는 박인배 민예총 기획실장과 문화연대 문화개혁감시센터 소장을 지낸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장 등이 참여했고, 장관 정책보좌관에는 이영진 작가회의 문화정책위원장이 임명됐다.
그러다 ‘편파 인사’ 논란이 증폭되기 시작한 것은 9월 초 국립국악원장에 김철호 민족음악인협회 이사장이, 국립현대미술관장에 김윤수 민예총 이사장이 각각 임명되면서부터였다. 특히 국악원장 인선의 경우 짜맞추기식 인사 의혹이 일고 있어 문제로 지적됐다. 1998년부터 국립국악원 정악단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98년부터 올 2월까지 민예총 산하 민족음악인협회 이사장을 지낸 김철호씨를 국악원장에 기용하기 위해 문화부가 보인 행태는 자연스럽지 못했다. 특히 이성림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이하 예총) 이사장 등 몇몇 심사위원의 경우 심사비를 받을 수 있는 계좌번호까지 알려주고도 도중에 심사위원이 바뀌어 심사에 참여하지 못해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문화부는 “처음부터 원장 시험위원(심사위원) 후보군으로 선정 예정 인원 정수의 2~3배수를 인력풀로 선정했다”고 해명했고, 시험위원 중에서 탈락한 후보들 중 일부가 국악원장 심사와 관련해 문화부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런 경우가 생긴 것은 사실일 것이다”며 궁색한 해명을 내놓았다. 신현택 문화부 기획관리실장은 “시험위원 후보군으로 17명을 선정한 뒤 11명에게 확정 통보를 했고, 탈락한 6명 중 4명에게는 연락했으나 나머지 2명에게는 연락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에 ‘전국 대학 국악과 교수 포럼’은 9월5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립국악원 차기 원장 임용 무효 및 이창동 문화부 장관 사퇴를 요구하며 “행정소송, 국회 청원 등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 거부·저항 운동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9월19일에는 차범석 예술원장을 비롯, 심재찬 김철리 유인촌 윤호진 정진수 등 연극계 원로와 중진으로 구성된 100명이 정부 소속 예술기관장의 편파 인사에 항의하는 ‘연극인 100인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또 문예진흥원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바꾸는 개정 법률안을 입법 예고한 데 대해 “이것이 현장 예술인들의 참여를 확대키 위한 것이라는, 표면상의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예술 지원을 통해 민간 예술인의 활동마저 특정 세력으로 하여금 지배케 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이장관은 다음날 바로 이 성명을 주도한 연극인들과 오찬을 함께하며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연극계에서는 손진책 극단 ‘미추’ 대표, 정진수 성균관대 교수, 기국서 극단 ‘76단’ 대표, 김영수 극단 ‘신화’ 대표, 이종훈 한국연극협회 부이사장 등 10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장관은 “지금까지 인사에서 ‘코드’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으며 능력 위주의 인사를 하다 보니 민예총 출신이 많이 발탁됐다. 현 문예진흥원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체제를 바꾸는 문제에 대해서는 현장 예술인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 결정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와중에 국정감사에서도 ‘코드 인사’가 도마에 올랐다. 예총 회장 출신인 신영균 한나라당 의원은 “진보 계열인 민예총의 문화 재편 시나리오가 가동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김성호 통합신당 의원은 “편중 인사 논란을 잠재우려면 임명된 단체장의 소속만 갖고 시비하기보다 심사위원 선정기준을 투명하게 하는 등 임용시스템 혁신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계 내부에서는 의외로 ‘코드 인사’에 대해 찬성하는 의견도 많다. 문예진흥원의 한 관계자는 “개혁이 전제될 때 인사권자의 당파적 정실에 뿌리를 둔 미국식 엽관제(공무원의 임면(任免)을 당파적 충성이나 정신에 의해 결정하는 정치적 관행)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며 “문제는 그 개혁을 합리적 절차에 따라 진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문예진흥원의 경우 주요 직위에 문화부 퇴임 관료가 임명되는 등 개선돼야 할 문제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며 “새 원장 취임 이후 개혁적인 제도 정착을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다”고 말했다.
문화부 신현택 기획관리실장은 “문화부 소속 기관 및 산하단체 47곳 중 노무현 정부 이후 새로 임명된 기관(단체)장은 10명이며, 이들을 두고 편가르기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고 특정 단체에 적을 뒀었다는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며 “업무 수행 과정에서 편파적이거나 해당 문화예술 분야를 진흥시키지 못하거나 할 경우에 비판하는 것이 옳은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현기영 한국문예 진흥원장.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장. 이영욱 한국문화관광 정책연구원 신임 원장. 강형철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사무총장. (왼쪽부터 시계방향)
예총측은 ‘코드 인사’가 ‘문화혁명’을 연상시킨다며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김종헌 예총 사무총장은 “코드 인사로 예총이 타격을 받는 것은 없지만 조만간 이런 변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정부 지원비가 대폭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내년도 사업예산 가운데 105개 지방연합회와 지부가 받던 정액보조금(각 연합회 연간 3500만원, 각 지부 2200만원)제도가 없어지고, 다른 단체와 경쟁해서 지자체의 예산을 따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예총이 이런 상황에서도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는 것은 예술인회관 건립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1992년 대통령 공약사업으로 거론된 예술인회관 건립사업은 96년 지하 5층, 지상 20층 규모로 공사가 시작됐지만 IMF 외환위기 이후 예총이 공사비를 조달하지 못해 99년 6월 이후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그러다 지난해 국고보조금 50억원이 추가로 교부돼 공사 재개를 서두르고 있는 상황이지만 넘어야 할 산도 많다.
김성호 의원은 문화부 국정감사에서 예술인회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예술인회관을 문화부로 이관해 예술인들의 문화복지 공간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의원은 “예총이 부담하는 공사비는 총 공사비 854억원 가운데 26억원에 불과하고 대부분을 국고와 임대수입에 의존할 것이어서 사업추진 능력이 부족하다”며 “건립 뒤 운영비를 임대수입에 의존할 경우 대다수의 문화예술단체가 예술인회관에 입주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문화부로 이관해 예술단체와 예술인들이 값싸게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예총은 자칫 정부의 눈 밖에 날 경우 예술인회관 건립이라는 꿈이 날아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김종헌 사무총장은 “우리는 혜화동 예총 건물을 팔고 그 돈을 예술인회관 건립에 투자하는 등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그런 과정을 무시하고 정부가 건물을 가져가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고 말했다.
‘코드 인사’와 관련,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은 민예총은 자기 단체 출신 인사들의 제도권 진입에 대해 겉으로는 말을 아꼈지만 내심 좋아하고 있는 분위기다. 정남준 민예총 사무총장은 “편파 인사가 아니라 역량이 뛰어난 이들이 갈 만한 데 가는 것이다”며 “민예총이 30년 이상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앞장섰고, 생활 속에 예술을 뿌리내리는 데 기여했던 것도 작용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또 “그렇다고 민예총만 자격이 있다는 건 아니다. 순수예술의 진흥에 이바지해온 예총의 역할도 인정한다”며 예총과의 정면 대결은 피했다.
한편 문화예술인들은 예총 민예총 구도로 나뉘는 것을 경계하는 분위기다. 두 단체에 모두 가입한 중복 회원수도 제법 되고 행정과 예술은 구별돼야 한다는 것이다. 10월7일 열리는 예총 정기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할 이강렬 세종문화회관 사업본부장은 “예술은 순수해야 한다. 요즘처럼 예총과 민예총, 신구세대를 갈라놓는 발상으로는 한국 예술의 비전은 꿈도 꿀 수 없다”고 말했다.
현기영 원장도 9월25일 기자들과 만나 “이제 예술계를 예총-민예총으로 양분하는 낡은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며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는 강단 있는 예술인들이 많다”며 기계적인 이분법의 잣대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코드 인사’ 못지않게 문화계를 발칵 뒤집어놓고 있는 것은 문화예술진흥법 개정 문제다. 문예진흥원을 문화예술위원회로 바꾸는 이 안은 제16대 대통령 선거공약 사항이며 문화부가 올 4월 대통령 업무보고 사항으로 추진해왔다. 문화부는 이 안을 골자로 한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안을 마련해 7월30일 입법예고한 상태다.
이에 대한 찬반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연극계는 ‘100인 선언’에서 정부안대로 될 경우 참여 위원(11명)의 성향에 따라 특정 세력이 지원금을 독식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이에 대해 현기영 원장은 “문예진흥원을 민간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문화예술위원회로 전환할 경우 문화예술계 일각에서 우려하는 ‘코드 인사’에 따른 독식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위원회제가 원장에게 권한이 집중된 현행 독임제에 비해 힘이 분산되는, 한결 민주화된 방식이다”며 “문화부 장관이 위촉하는 문화예술위원 11명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게 아니고 그 밑에 꾸려질 분야별, 사업별 소위원회에 150여명의 위원이 참여해 편파적 지원은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한신 문예진흥원 노동조합부위원장은 “위원회가 진정한 현장 중심의 지원기구가 되려면 개정안 가운데 위원회가 진흥사업에 대해 장관과 사전협의하고 사후 평가를 받는 조항은 폐지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을 경우 외형은 민간 자율기구지만 실제로는 이전보다 문화부의 통제가 심화된다”고 말했다. 이 부위원장은 “이런 문제점이 있는데도 현원장과 강총장이 현재의 안을 고수한다는 것은 결국 이장관과 생각이 같다는 것이고 그것은 ‘코드 인사’가 가져오는 폐해가 아니냐”고 지적했다.
문화계의 권력이동과 구조 개편은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많다. 현 정부가 개혁성향을 유지하는 한 임기가 끝나는 기관(단체)장의 인선 때마다 진보-보수 논란은 반복될 것이고, 개혁성향의 기관(단체)장들도 새로운 개혁안을 계속 내놓을 것이기 때문. 이런 변화의 과정을 ‘진흙탕 싸움’으로 보내지 않고 실질적인 문화적 풍요로 연결할 수 있는 지혜가 요구되는 때다. 한 번도 어느 특정 단체에 적을 두지 않았다는 소설가 김원일씨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문화영역마저도 물질적·경제적인 데만 초점을 맞춰왔던 지난 시기를 반성하고 진정한 문화적 풍요를 이루기 위한 새 틀을 짜야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