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전 직후 선수들이 히딩크 당시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큰 사진). 지난해 7월 열린 포스트월드컵 대책회의.
한 기업 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월드컵을 훌륭하게 치러낸 한국이 그 효과를 지속시키는 데는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네덜란드에 진출한 ‘태극전사’들로 인해 대(對)네덜란드 자동차 수출이 1·4분기에 전년 대비 72%나 느는 등 일정 부분에서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전반적인 국내 경기는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 세계적인 행사를 치른 이듬해는 개최국을 찾는 관광객이 급증하지만 올해는 이라크전쟁과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파동의 여파로 3월과 4월 외국인 관광객이 각각 전년 대비 10%와 28% 가량 감소했다.
한국은행이 5월 초 매출액 20억원 이상 기업체 2902곳을 대상으로 ‘기업경기전망 실사지수(BSI)’를 조사한 결과 제조업 BSI가 84를 기록해 전달(75)보다는 다소 좋아졌지만 여전히 기준치(100)를 크게 밑돌았다. 내수 위축으로 수출기업(89)보다는 내수기업(83)이, 대기업(92)보다는 중소기업(81)이 상황이 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됐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국내 경제의 악화 요인으로 우선 이라크전쟁, 사스, 북한 핵 문제 등 외부 요인과 경제개혁 미비 등 내부 요인을 꼽지만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 효과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가지 못한 점 또한 빼놓을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해 월드컵 직후만 해도 정부와 수많은 연구기관은 월드컵이 온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고, 국가 브랜드 가치와 기업의 대외 이미지 등 경제적 효과를 크게 높인 것으로 평가했다. 특히 현대경제연구원은 월드컵 개최와 한국팀의 4강 진출로 우리가 거둔 직·간접적인 경제효과는 100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것은 한 해 국가 예산에 버금가는 액수. 월드컵 개최로 국가 브랜드 이미지가 10% 정도 개선됐다고 가정할 경우 200조원에 이르는 한국 수출상품의 가치가 10% 올라가고, 국가 이미지 개선 효과가 5년 정도 앞당겨졌다고 볼 때 총 100조원의 효과가 난다는 게 현대경제연구원의 분석이었다.
투자·소비 지출 4조5300억원 … 홍보 효과 7조8700억원
월드컵 효과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진행중이다. 한영주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서울마케팅연구단장은 5월 말께 이전보다 훨씬 면밀한 평가 결과 보고서를 내놓을 예정이다. 한단장이 일부 공개한 내용을 보면 월드컵을 개최하는 데 실제 들어간 투자비용과 소비지출 총액은 전국적으로 4조5300억원(서울은 1조4155억원), 인천공항에서의 출구조사로 파악한 외국인 관광객의 소비지출 총액은 5300억원이다.
각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의 경우 경제적 부가 외부에서 유입돼 지방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됐고, 국가 브랜드 홍보 효과는 7조8700억원(서울 1조5000억원)에 이르렀다. 여기에 문화관광 역량 개선 등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수많은 무형의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는 것.
한단장은 “일부 기업의 조업 차질 등 부정적인 요소도 있었지만 한국의 브랜드 가치와 기업의 대외 이미지는 크게 향상됐다”며 “최근 베이징 시장이 국제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른 한국의 노하우를 알고 싶다며 서울시에 연락해올 만큼 대외 홍보 효과도 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직·간접적인 효과를 국가 브랜드와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해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려는 노력”이라고 지적했다.
정부 역시 그 효과를 이어가기 위해 지난해 7월 월드컵 ‘4강 신화’를 ‘경제 4강’으로 승화시키고 국가 이미지를 꾸준히 향상해나간다는 야심 찬 ‘포스트월드컵’ 계획을 발표했다. 10년 내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이 되기 위한 각종 경제정책과 문화국가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대책, 국가 이미지 제고 방안 등을 내놓은 이 계획에서 정부는 △월드컵의 경제적 효과 확대를 위한 사후관리 및 기념사업 △문화국가 이미지 정착 △지방의 세계화 및 선진시민의식 지향 △국가 이미지 제고 등 5대 분야 80개 세부과제를 확정하고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수립, 시행해 나가기로 했다.
서울 상암경기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월드컵경기장이 적자 운영을 하고 있다. 프로축구 경기가 치러지고 있는 대구경기장(왼쪽)과 오페라 ‘투란도트’가 성황리에 공연된 상암경기장.
포스트월드컵 효과를 잘 관리한 대표적인 나라로는 스페인과 프랑스가 꼽힌다. 스페인은 1982년 월드컵 개최 이후 독재자 프랑코의 나라란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산업국가·관광국가·문화국가의 이미지를 굳혀나갔다. 이후 스페인은 세계 3대 관광국가, 유럽 5강의 지위를 얻었다. 월드컵을 개최한 해에 프랑스는 기업 가치가 2배로 상승하는 경제적 효과를 누렸다.
박태일 현대경제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이러한 전범이 있는데도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것은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우리 정치의 후진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어쨌든 현단계에서 정부가 사그라들고 있는 월드컵 효과에 다시 불을 지피기 위해 역점을 둬야 할 것은 IT월드컵의 이미지를 실제 산업 발전으로 이끌고, 스포츠 관련 국내 산업을 육성하는 등 포스트월드컵 대책을 다시 점검하는 일이다.
특히 전문가들은 각 지자체가 떠안은 10개 월드컵경기장을 잘 활용하는 일이 월드컵 효과를 지속시키는 가장 상징적이고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국민 세금 수조원이 투입된 경기장에 대해 각 지자체는 여러 활용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서울 상암경기장만 올해 30억~40억원의 흑자를 예상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적자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올해 56억원의 예산을 책정한 인천 문학경기장의 경우 프로축구 연고팀이 없는 데다 수익사업의 일환으로 내놓은 스포츠센터의 입찰 예정가가 낮아 예상 수익의 절반밖에 건질 수 없는 형편이다. 제주 서귀포경기장의 경우 태풍으로 파손된 지붕 보수공사가 내년 2월에나 끝날 예정이며 전주경기장도 5월15일 사우나, 예식장, 6홀짜리 골프장 등의 입찰공고를 하는 등 수익사업을 위해 분주하지만 흑자로 돌아설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경기장 활용방안 문제가 이슈로 떠오르자 월드컵조직위원회는 월드컵 잉여금 1630억원 가운데 300억원을 개최도시 지원금으로 책정해 경기장 활용도 제고 등에 쓸 계획을 세웠다.
경기장 활용방안을 지나치게 손익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문제라는 의견도 있다. 한영주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서울마케팅연구단장은 “월드컵경기장을 잘 활용하는 것도 좋지만 유지비를 빼기 위해 경제적인 시각으로만 봐선 곤란하다”며 “시민들이 경기장을 공원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월드컵 1주년을 맞이하는 이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고 조언한다. 우리나라는 1987년 물가상승률이 3.1%에서 88년 올림픽 개최 연도에 7.1%로 급등했으며 89년과 90년 사이 최악의 노사분규가 발생하는 등 올림픽을 전후해 오히려 경제 부작용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월드컵을 치른 뒤에도 당시의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