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서 ‘왕따’소리가 사라질 날은 언제일까. 한 중학교 수업 장면.
4월 중순 서울 도봉구 신방학초등학교 4학년 1반 교실. 고모군은 교단 옆에 서서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짝꿍인 김모양에게 ‘공개 사과’를 했다.
고군은 이날 ‘스톱제’를 어겼다. 스톱제란 친구가 자신의 행동이 싫어 ‘스톱!’이라고 외치면 무조건 그 행동을 멈추기로 한 약속이다. 때리거나 별명을 부를 때, 학용품을 마음대로 가져갈 때 ‘스톱’을 외칠 수 있다. 이 반 학생들은 학기 초 ‘스톱제’를 어겼을 경우 반 친구들 앞에서 ‘사건 개요’를 설명하고 공개 사과하기로 약속했다.
이규동 담임교사는 “아이들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했을 때 선생님한테 달려와 이르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아이들끼리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게 한다는 취지에서 이 규칙을 도입했다”고 말했다. 이교사는 “고군이 스스로 찾아와 자초지종을 얘기하더니 ‘스톱제를 어겼으니 공개 사과하겠다’고 했다”며 “아이들이 스톱제를 통해 상대방의 의견과 기분을 존중하는 법을 조금씩 배워나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안암초등학교 6학년 A군은 학교에서 소문난 말썽쟁이다. 얼마 전엔 같은 반 학생인 B양을 “지저분하다”며 때리고 “선생님 앞에서 웃지 않으면 죽여버린다”며 협박까지 했다. 다른 아이들은 A군이 무서워 B양에게 잘 다가가지도 않는다.
폭력 학생에 야생초 키우기 맡겨
담임교사인 김한민 교사는 이런 A군을 다른 아이들 앞에서 꾸짖거나 체벌하지 않았다. 남을 때리는 데 익숙한 아이들은 매섭게 꾸짖어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데다 ‘나는 나쁜 아이’라는 부정적 자아인식만 심어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김교사는 학교 앞뜰에서 야생초를 뽑아 화분을 만들어 A군에게 준 뒤 화분에 물 주고 햇볕 쪼이는 일을 맡겼다.
김교사는 “무엇보다 상대방과 평화롭게 지내는 법을 배우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식물을 키우면서 그것을 느껴보도록 지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상담을 통해 왜 자꾸 친구를 때리고 괴롭히게 되는지 솔직하게 털어놓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들어 회초리를 들기보다는 ‘권리’와 ‘존중’이란 개념을 가르치려는 교사들이 늘고 있다. 아이들 사이에서 ‘왕따’나 폭력행사 등으로 분쟁이 일어났을 때 교사의 권위에 기대어 해결하기보다는 ‘인권교육’ ‘권리교육’을 통해 조정하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는 것. 인권교육은 인간으로서 갖는 기본권리를 이해해 자신의 인권을 소중하게 여기고 남의 인권도 존중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교실 안에서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태도를 배운다”며 “자기들끼리 스스로 갈등을 조정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생활방식을 익혀야 한다”고 지적한다.
인권교육을 위한 교사모임(이하 인권모임)과 전국교사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서울지부 인권교육국 등은 이러한 인권교육을 위한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는 곳이다. 안암초등학교 교사들은 지난 학기 인권교육을 연구하는 모임을 열었고, 전교조 초등 중북성북지회는 3월부터 인권교육 소모임을 결성해 인권교육에 관련한 교수방식을 연구하고 있다.
경쟁 위주의 학습방식은 ‘왕따’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사진은 MBC ‘타임머신’의 한 장면.인권교육을 위해서는 교사가 먼저 아이들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위 부터).
주당 1시간인 재량활동수업 때 인권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서울 창신초등학교 홍의표 교사가 담임을 맡고 있는 학급에서는 요즘 ‘인권침해’란 말이 유행이다. 홍교사는 재량활동수업 시간에 ‘평화인권’이란 인권교육을 한다. 이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상대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상대방의 권리를 무시하는 ‘인권침해’다”고 가르쳤다. 이후 아이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스스로 ‘인권침해’ 행위를 찾아내고 있다. 아이들은 욕하는 것, 때리는 것, 일기장 훔쳐보는 것, 별명을 부르는 것 등을 인권침해라고 규정했다. 이런 일을 당했을 때 ‘기분 나쁘기’ 때문이란다.
덕분에 김모양은 더 이상 ‘외계인’ 소리를 듣지 않는다. 김양은 둥글고 하얀 얼굴 때문에 1년 전부터 ‘외계인’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요즘 누군가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부르면 주변 아이들이 “인권침해다”라고 경고하는 바람에 더 이상 놀림을 받지 않는다.
장애인 체험 등 통해 인권 공부
4월 말 학급회의에서는 두 명의 아이가 “인권침해를 했다”며 ‘자수’했다. 이모양은 “친구를 ‘당나귀 귀’라고 놀렸다”고 반성했고, 박모군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몰래 때리고 도망갔다. 이런 행동은 고쳐야 한다”고 인정했다.
서울 돈암초등학교 곽미성 교사는 올해 ‘생각 키우기’라는 인권교육 특별활동부를 만들었다. 곽교사는 “첫 수업 때 생활 속에서 느낀 차별을 적어내게 한 후 함께 토론했는데 많은 아이들이 ‘여자애(혹은 남자애)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상처받았다고 말했다”며 “앞으로는 이런 말을 쓰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다.
일선 교사들 사이에서 이러한 인권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까닭은 요즘 아이들에게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1989년부터 한국현실에 맞는 교육정책을 개발해온 한국교육연구소 이인규 부소장은 “대인관계에 미숙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쉽게 폭력적으로 변한다”고 지적했다. 인터넷과 컴퓨터 게임, TV 등 각종 영상매체에 노출된 아이들의 뇌 속에 이미 과다한 정보가 들어차 대인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 때문에 아이들은 타인과 이해관계가 상충했을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쉽게 힘의 논리를 택하게 된다. 서울 안암초등학교 이지영 교사는 “여학생들 사이에 외모나 활달한 성격, 성적 등으로 권력 순위가 매겨지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경쟁 위주의 학습방식도 아이들이 쉽게 ‘폭력’을 선택하는 한 원인이다. 올 1월 전교조에서 열린 회의에서 한 교사는 “한 반을 여러 조로 나누어 가장 잘한 조에게 ‘스티커’를 주었던 지금까지의 교육방식을 이제 그만둬야겠다”고 밝혔다. 스티커를 받지 못한 조에서 공부를 잘하거나 힘이 센 아이들이 그렇지 못한 아이들을 “너 때문에 스티커를 받지 못했다”며 때리거나 ‘왕따’시키는 부작용이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다.
2000년부터 일선 학교에서 인권교육 강좌를 실시해온 다산인권센터 박진 상임활동가는 “인권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이 아니라 인권존중의 가치를 체화하게 하는 대인적 교육”이라며 “무엇보다 아이들 인권을 존중하고 평등하게 대하려는 교사들의 자세와, 장기적인 교육을 통해 가치관을 변화시키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충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