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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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악역 맡을 테니 내게 떠넘겨라”

“최대한 현 정권에 부담 안 주겠다” 의지 표현 … 대북송금 특검 등 만만찮은 시련 닥칠 수도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3-03-13 13: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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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J “악역 맡을 테니 내게  떠넘겨라”

    2월24일 동교동 사저 앞에서 동네 주민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 스칼라피노 버클리대 교수 등 특별한 손님이 아니면 빗장을 열지 않던 동교동이 3월1일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에게 대문을 열어주었다. 동교동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이날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한 전 대표에게 “동교동계는 해체됐다”는 전제 하에 “동교동을 연장해서는 안 된다. 동교동을 의식하지 말고 자력으로 잘해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정치적 재기라는 당면과제에 직면한 한 전 대표가 가고자 하는 길에 동행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동교동계의 또 다른 좌장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은 2월24일 DJ의 퇴임 때 인사차 동교동을 찾은 이후 동교동을 찾지 않았다. 김한정 비서관은 “기회가 없었다”고 말하지만 권 전 고문에 대한 동교동 주변의 시각은 생각보다 싸늘하다. 권 전 고문이 정치 재개 의지를 피력한 것이 DJ의 심기를 거스른 것으로 보인다. 권 전 고문은 2월 중순 인터뷰를 통해 “동교동계를 해체하지 않고 정치를 재개하겠다”는 등 DJ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나왔다. 동교동의 한 관계자는 “비석에 뭘(김대중 선생 비서실장) 새기겠다는 양반이 퇴임을 앞둔 대통령 앞에 폭탄이나 던지고…”라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대외활동 자제 누적된 피로 풀기

    동교동 사저로 돌아온 DJ는 ‘과거’를 정리하는 중이다. 특히 정치와 관련해서는 매우 신중한 자세를 보인다. 신주류에 밀린 동교동계 등이 무언의 지원을 요청하는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DJ는 무관심한 표정이라고 한다. 한 전 대표에게 “혼자서 가라”고 한 것이나 권 전 고문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보인 것은 DJ의 이런 속내가 묻어난 사례다.

    DJ의 일상은 ‘칩거’에 가깝다. 하루하루가 조용한 일상의 연속이다. 김한정 비서관에 따르면 DJ는 정치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스케줄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김비서관은 “바깥바람도 쐬고 근처 식당에 가서 식사도 하시라고 권했지만 사양하셨다”고 한다. 외부일정도 잡힌 게 없다. 대문 밖 출입을 자제하는 DJ는 하루의 대부분을 책 읽기로 보낸다. 요즘 읽는 책은 소설이다. 말 그대로 시간을 보내기 위한 방편인 셈. 잠도 즐긴다. 김비서관은 “청와대 있을 때에는 밤 12시에 잠들어 새벽 5시면 깼지만 지금은 그 두 배 정도 자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희호 여사와의 대화도 동교동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유. 동교동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홍업, 홍걸씨 사건 이후 두 분이 충분히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3월9일 노무현 대통령과 검사들의 대화를 시청했지만 특별한 입장 표명은 없었다고 한다.

    동교동 관계자들은 이런 생활이 대통령 재임기간 누적된 피로를 풀려는 의도라고 설명한다. DJ도 퇴임인사를 통해 “일생 동안, 특히 지난 5년 동안 저는 잠시도 쉴새없이 달려왔고 이제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DJ의 휴식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이 그를 향한 포위망을 압축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야당은 이미 김대중 정권 5년의 진실 찾기에 돌입했고, 그 첫번째 조치로 2월26일 국회에서 대북송금 특검법안을 단독으로 처리했다. DJ는 퇴임 하루 만에 수사대상이라는 벼랑에 홀로 선 형국이다. 그러나 DJ는 이런 문제를 일절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동교동계 출신 민주당 한 인사는 대북송금 문제와 관련, “모든 것을 DJ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고 말했다. 노대통령이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입장이라는 것. 동교동계 한 인사는 “1987년 대선 직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노태우 후보에게 ‘나를 밟고 가라’고 한 것과 비슷하다”고 동교동 분위기를 전한다. 이는 DJ의 그동안의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퇴임을 일주일 정도 앞둔 2월18일, DJ는 민주당 정대철 최고위원과 오찬을 함께 했다. DJ는 대북송금 문제 등과 관련, “악역은 내가 맡겠다. 모든 일은 나에게 떠넘겨라”는 입장을 보였다. 현 정권에 쏠린 여러 비난과 의혹의 책임을 모두 떠안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셈이다. 2월23일 노대통령과 만나서도 “대통령이 잘 돼야 한다”며 “최선을 다해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DJ는 동교동으로 돌아온 요즘도 측근들에게 “노대통령이 잘 돼야 한다. 노대통령에게 부담을 주는 행동을 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한다. “노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정치인을 안 만나겠다”는 게 DJ의 뜻이라는 것.

    DJ “악역 맡을 테니 내게  떠넘겨라”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 김대중 전 대통령 3남 홍걸씨(왼쪽부터).

    하지만 노대통령이 DJ의 이런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고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노대통령이 DJ를 보호해줄 만큼 한가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이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노대통령은 취임하기 전 한 사석에서 “DJ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했지만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다며 내가 소중히 여기는 ‘원칙’을 버릴 생각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DJ가 특검 수사를 받는 최초의 대통령이 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삼남 홍걸씨는 또 다른 측면에서 DJ 부부의 부담으로 떠오르고 있다. 최규선 게이트와 관련, 재판에 계류중인 그는 DJ 부부의 요청에 따라 동교동 사저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조만간 미국에 있는 가족도 데리고 올 계획이다. 문제는 그가 서울에서 정착할 경우 ‘무엇을 하고 사느냐’ 하는 점이다. 동교동의 한 관계자는 “성격이 여린 그가 미국에 있으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곁에 두고 살겠다는 것이 노부부의 생각이지만 홍걸씨가 할 수 있는 일이 마땅치 않아 고민”이라고 말했다.

    DJ는 장기적으로 동교동을 감싸고 있는 안개가 걷히면 평화 전도사로 나설 계획이라고 한다. 노대통령의 요청이 있을 경우 북한 핵문제 등과 관련 조언도 하겠다는 입장이다. 한 측근은 “1994년 제1차 북핵위기 당시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의 요청으로 방북,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을 통해 남북정상회담 합의를 이끌어낸 바 있다”며 북한 핵문제로 꼬인 남북관계에 DJ가 역할을 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물론 시기는 짐작하기 어렵다. 동교동의 한 인사는 “대북송금과 관련한 특검 결과 등에 따라 대외적인 활동시기와 폭은 달라지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대외활동은 동교동 의지보다 국민여론과 정치적인 흐름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렇지만 이런 바람을 입에 올리기에는 동교동의 정치지형이 너무 불안정하다. 2월26일 DJ의 장남 김홍일 의원은 국회에서 동교동계 인사들의 부축을 받으려다 무릎을 꺾고 넘어졌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들은 그들이 김의원을 외면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예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퇴임한 DJ 주변 기류를 읽을 수 있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최근 YTN ‘백지연의 정보특종’에서 “DJ가 이런 이런 것은 잘못했으니 화해하자고 제안했지만 국민 앞에 공개적으로 사과하라고 했다”고 말해 동교동을 곤혹스럽게 했다. 3월7일 한 세미나에서는 ‘국민의 정부가 특정 지역 출신을 지나치게 많이 발탁, 인사정책에 실패했다’는 한 대학교수의 연구논문이 발표됐다. 퇴임을 한 DJ지만 국민의 정부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DJ는 내리막과 오르막을 수시로 오가야 할 운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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