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 전담공무원 이성숙씨가 관내 양로원을 방문해 노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위).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돌보는 것도 이씨의 몫이다.
2002년 12월27일 오후 2시, 서울 강서구 화곡3동 박복순 할머니(82) 댁은 갑자기 분주해졌다. 이 동네 사회복지 전담공무원 이성숙씨(43)가 귤 한 봉지를 들고 찾아왔기 때문이다. 어두운 지하방에 불도 켜지 않은 채 앉아 있던 박할머니는 보일러를 켜고 이씨에게 귤을 까주었다. 그러나 남편과 사별한 뒤 자식 없이 혼자 살고 있는 독거노인 박할머니가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씨는 “곧 또 오겠다”며 서둘러 일어섰다. 늦어도 3시까지는 연말 구호물품을 받으러 적십자사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연말은 사회복지 전담공무원에게 한 해 중 가장 바쁜 때. 사회보장 수급자 300여명을 담당하고 있는 이씨의 하루도 눈코 뜰 새가 없다. 각종 자선행사와 구호물품 관리를 책임지면서 이들도 함께 챙겨야 한다. 이날 하루 정해진 공식일정만 11개에 이를 정도로 이씨의 일정은 빡빡했다.
박할머니 댁 앞 좁은 골목길을 내달리면서 이씨는 “서둘러야 오후에 소녀가장 지원이네랑 수명경로당에 들를 수 있다”고 조급해했다.
현재 전국의 사회복지 전담공무원은 6471명. 이들이 담당하는 국민기초생활법상 수급대상자는 155만명에 이른다. 경로연금 대상자와 장애인, 모·부자가정 등까지 합치면 399만명. 전담공무원 한 사람이 담당해야 하는 대상자 수가 600명을 넘는 셈이다.
1인당 수백명 담당 “몸이 두 개라도…”
문제는 이들이 수급대상자 관리 업무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겨울철이면 이웃돕기 사업에 앞장서야 하고 노인복지나 여성복지 등 일반 가정 업무도 모두 사회복지 전담공무원의 몫이다. 게다가 각종 행정업무도 적지 않아 정작 가장 중요한 주민 면담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이씨도 이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헌 옷가지들부터 정리했다. 동네 부녀회에서 연말 불우이웃돕기 물품으로 가져온 옷들 중 쓸 만한 것을 추려내는 작업이다. 간신히 일을 마친 시각이 오전 11시. 사회단체가 주최하는 경로잔치에 독거노인들을 모셔다드려야 할 시간이었다. 노인 다섯 분을 차에 태우고 한 뷔페식당 앞에 내려드린 뒤 이씨는 다시 강서노인복지회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전날 열린 관내 행사에서 화곡3동에 사는 한 노인 몫으로 나온 선물을 받기 위해서였다. 경로잔치장에서 황경순 할머니(74)가 “함께 점심 먹자”며 이씨를 잡았지만 그는 점심 먹을 틈을 낼 수 없었다. 김 한 봉지를 받아 든 이씨는 또 다른 경로행사가 열리는 천사양로원으로 향하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이날 오전 내내 이씨가 한 일은 연말 선물을 정리하고 찾으러 간 것, 그리고 각종 행사에 노인들과 함께 참가한 것뿐이다. 이 일정에 밀려 정작 관내에 있는 소년소녀 가장과 독거노인의 집을 찾는 일은 오후로 미뤄야 했다.
연말에는 행정업무 (위)와 구호물품 정리(아래 왼쪽)로 더 분주하다. 수급대상자의 집을 찾아나선 이성숙씨(아래 오른쪽).
다른 사회복지 전담공무원들의 사정도 이씨와 다를 바 없다. 경북 울진의 한 공무원은 2001년부터 생긴 ‘묘지 사진 찍기’ 업무의 부담을 토로했다. 묘지 사진 찍기는 장묘제도가 바뀌면서 사회복지 전담공무원들에게 떠맡겨진 일. 새로 생긴 묘지를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해 한 명이 60년 이상 독점하지 못하도록 관리하는 일이다.
이 공무원은 “내가 맡은 기초생활보호 수급대상자가 300명인데 묘지 사진까지 찍고 다니란 말이냐”면서 “복지 전담 공무원 혼자 주민 복지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지라는 얘기 같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심지어 연말 성금이 들어올 경우 대구까지 가서 관내 노인들께 드릴 내의와 선물을 사는 것도 사회복지 전담공무원의 몫이다.
서울 성북구 석관1동의 사회복지 전담공무원 성기창씨는 과중한 행정업무에 대해 할 말이 많다. 성씨는 “하루에 써내야 하는 공문이 많을 때는 10장에 이르기도 한다”며 “맡고 있는 업무 영역이 사회에서 가정까지 수십 가지에 이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회복지 전담공무원이 장애인 사업을 모두 맡는 것도 부담이 된다. 이들에 대한 차량 관련 서비스, 가족 지원 업무 등을 처리하다 보면 하루 종일 동사무소에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씨는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하다가도 민원인을 상대하려고 내가 이 일을 시작했나 생각하면 자괴감이 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행정업무도 도맡아 야근 밥 먹듯
이 같은 사회복지 전담공무원들의 고충은 이씨의 하루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양로원 복지행사를 마친 뒤 동사무소에 들른 이씨의 책상 위에는 장애인 등록 관련 서류와 각종 민원들이 쌓여 있었다.
동사무소마다 사회복지 전담공무원이 한 명뿐이어서 이씨는 수시로 사무실에 들러 행정업무도 처리해야 한다. 이를 대신 맡아줄 사람이 없어 휴가는 고사하고 연수조차 제대로 받기 어렵다. 때문에 각종 잡무와 행정업무 속에서 ‘내가 정말 복지공무원인가’ 하는 회의를 자주 느낀다는 게 사회복지 전담공무원들의 공통된 얘기다.
이 때문에 이씨는 일부러라도 주민 상담 업무를 주로 하려고 노력한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기초생활보호 수급대상 가정 중 한두 곳은 꼭 방문하겠다는 것이 스스로 정한 약속. 이날 무리해서 박할머니 댁과 소녀가장 김지원양의 집을 찾은 것도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대신 행정업무는 야근이나 토요일과 일요일 근무를 통해 처리한다.
이씨의 바쁜 일상을 잘 알고 있는 화곡3동 천사양로원 박은진 원장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전문가인 사회복지 전담공무원들이 정책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데 정작 하는 건 수급대상자에게 쌀 갖다주고, 민방위통지서 돌리는 일”이라며 “이런 일만 처리하는 데도 시간이 부족한데 어떻게 복지정책이 발전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씨는 사회복지 전담공무원의 하루를 취재하고 싶다는 기자에게 “너무 바빠서 시간 내기가 힘들다”며 손사래를 쳤다. 이씨의 거절 이유는 사실이었다. 그는 하루 종일 시간이 모자라 발을 동동 굴렀다. 가정방문을 마친 뒤 또 한 곳의 경로당과 청소년 쉼터를 찾은 후에야 이씨의 발걸음은 동사무소로 향할 수 있었다.
“종일 고생하셨죠? 이제 저는 아까 받은 장애인등록증 발급 공문을 만들어야겠어요.”
짧은 겨울 해는 이미 졌는데 이씨의 행정업무는 이제야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