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근무휴직 대상 공무원들. 왼쪽부터 문광규·이율범 사무관,오윤 서기관.
요즘 관가에는 이서기관처럼 ‘기업으로 출근하는 공무원’들이 화제다. 이들은 관련 부서에 휴직계를 내 공무원 신분을 유지한 채 기업에 취직해 해당 기업체로부터 보수를 받고 일하게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는 공무원이 민간기업에서 일정 기간 근무하며 전문지식과 능력을 쌓고 복귀해 공직사회의 전문화를 촉진시킬 수 있게 하자는 취지의 ‘민간근무휴직제’에 따른 것.
정부는 12월7일 민간근무휴직심의위원회(위원장 조영택 행정자치부 차관)를 열어 대상 공무원 13명(10개 부처)을 선정했다. 부처별 대상자는 재정경제부 3명(김영모·오윤 서기관, 신언주 사무관), 정보통신부 2명(신동준·허성욱 서기관), 금융감독위원회 1명(이명호 서기관), 특허청 1명(고승진 서기관), 농림부 1명(문광규 사무관), 행정자치부 1명(정성도 사무관), 보건복지부 1명(최영현 서기관), 환경부 1명(이율범 사무관), 공정거래위원회 1명(이석준 서기관), 건설교통부 1명(박상덕 사무관) 등이다.
32~44세 휴직 기간은 1~3년
민간근무휴직 대상 공무원 김영모 서기관.
행자부는 이들을 선발할 때 민간기업의 채용 요구조건, 업무추진 실적, 발전 가능성, 복귀 뒤 조직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따졌다. 또한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선발과정에서부터 투명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선정 기준에서 휴직자들이 직위를 이용해 민간기업에 혜택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해 휴직 예정일 전까지 3년간 근무했던 업무가 휴직중 근무할 민간기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면 선발 대상에서 제외했고, 복직 후 2년간 휴직 중 근무했던 기업과 관련 있는 부서에는 배치되지 않도록 할 예정이다.
선발된 공무원들의 각오도 남다르다.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갖고 있고 앞으로 법무법인 율촌에서 조세·금융 관련 업무를 맡게 될 재정경제부(이하 재경부) 오윤 서기관(40)은 “공무원도 경쟁력을 높이려면 민간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자원했다”며 “방대한 관료조직에서 벗어나 새로운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을지 시험해볼 생각이다”고 말했다.
환경부 이율범 사무관(33)은 “앞으로 업무의 효율성, 일류경영, 녹색경영측면에서는 최고의 기업이라는 곳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동안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고 이를 다시 정부조직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이들 가운데는 이 제도를 개인적인 재충전의 기회로 삼는 이도 있다. 대상자 가운데 유일한 여성공무원인 신언주 사무관(40)은 “민간기업 진출을 계기로 새로운 활력이 샘솟는 듯한 느낌”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신사무관은 18년 공무원 경력 중 10년 이상 경제·금융 분석 업무를 수행해온 경제관료로 부동산 및 소비자 서비스 회사인 미디어윌에서 인사·기획실장으로 근무할 예정이다.
기업측도 이 제도에 거는 기대가 적지 않다. 2000년 5월 정부가 민간근무휴직제를 도입하기 위한 기초조사의 대상으로 삼은 대기업 50곳, 중소기업 41곳 가운데 대기업의 84%, 중소기업의 29.3%가 채용 의사를 밝혔다. 이 제도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기업들은 공무원의 전문지식과 기획능력 등을 적극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휴직 공무원들이 근무하게 될 기업은 삼성전자, LG전자, 미디어윌, KT, 한국MS, 티맥스소프트, EC글로벌, 삼성화재, 법무법인 율촌, 법무법인 태평양, 김&장 법률사무소, 지비시너웍스, 삼성경제연구소 등이다.
법무법인 율촌의 우창록 대표 변호사는 “우리가 채용한 재경부 서기관은 공직 경험에서 얻은 지식이 많고, 유학 시절 세법을 공부한 데다 전문가로서의 식견을 갖추고 있다”며 “조세 변호사에 준한 업무를 잘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일부 기업은 이 제도를 통한 민간과 공공의 교류라는 대외적 목적 이외에 무엇보다 정부 정책을 재빨리 좇아갈 수 있다는 이점을 높이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즉 정부의 정책 방향과 자사의 경영 방향이 어긋나지 않도록 조율하는 데 이들 공무원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이 제도의 도입이 검토된 것은 1990년대 말부터 벤처 창업이나 민간기업 취업 등으로 공직자가 민간기업으로 전직하는 사례가 크게 늘어나 인재 확보에 비상이 걸리면서부터. 마침 외국에서도 이런 제도를 활용하고 있어 필요성이 대두됐다. 일본의 경우 99년 관련 법률을 마련한 뒤 2년간 모두 9명의 공무원을 기업에 파견하는 데 그쳤지만 상대적으로 노동시장에 유연성이 있는 영국은 연간 400~500명의 공무원을 민간기업에 파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실시한 공무원 여론조사에서 공무원 1594명 가운데 48.8%가 민간근무를 지원할 의사를 표시했고, 지원 의사가 없는 공무원은 26%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 이 제도의 도입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올 여름 행자부에서 공식 일정을 발표했을 때 공무원들의 높은 관심에 비해 지원율은 낮았다. 행자부 관계자는 “각 부처의 추천을 받아야 하기도 했지만 민간기업 진출로 인한 인사상 불이익을 우려하는 이들이 많았던 탓”이라고 원인을 풀이했다.
이번에 선발된 한 공무원은 “민간근무휴직제의 중립성을 믿는다”며 “남아 있는 이들과 파견되는 이들 간에 승진 등의 문제에서 이해가 상충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나중의 문제고, 지금 중요한 것은 나가서 민간 부문의 효율성을 잘 배울 수 있느냐 하는 점”이라고 말했다.
각 부처 공무원들 대부분은 어려운 심사과정을 통과한 선발 대상자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지만, 일부의 경우 민간 근무라는 ‘꿀맛’을 경험하고 나면 복직하지 않는 이도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관료사회의 인사 적체, 경직된 분위기 등과 달리 치열한 경쟁은 있을지언정 더 높은 보수와 자유로운 분위기의 민간기업에 잘 적응하게 되면 돌아오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이번 대상자들 대부분은 복귀를 당연시했고, 민간기업 근무의 경험이 복귀 뒤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정보기술컨설팅 등의 업무를 맡아온 농림부 문광규 사무관(44)은 “특히 정보 분야는 전문적인 지식을 꿰고 있지 않으면 비효율적이므로 민간 근무는 조직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버드대 법대를 수학하고 미국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김영모 서기관(39)도 “외환위기 때 IMF 담당관으로 일하면서 공무원들에게 법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며 “민간 근무를 마치고 복귀할 때는 훨씬 더 큰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제도의 정착 여부는 연 1회 이상으로 정해져 있는 소속 장관의 평가 결과가 나온 뒤에 확인할 수 있겠지만 기업으로 첫 출근하는 이들 공무원들의 발걸음은 경쾌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