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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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프 속 정치인들 “나 떨고 있니”

최규선씨 융단폭격 이어 추가 폭로 염려… 아군들도 “불똥 튈까” 전전긍긍

  •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4-10-01 1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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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이프 속 정치인들 “나 떨고 있니”
    녹취 테이프에서 최규선씨는 무성영화의 ‘변사’였다. 자신이 김대중 대통령이 되어 질문을 던지고, 이어 자신이 그에 대해 대답을 하면서 대화상황을 최대한 ‘현장감 있게’ 보여주려 했다. ‘~해 부러’라는 전라도 사투리까지 흉내냈다. 만나게 된 구체적 과정, 장소, 시간, 주변 사람의 움직임, 전화 대화의 경우 휴대폰의 번호까지 소상하게 밝혔다. ‘자작 테이프’의 근본적 한계인 ‘신뢰성 문제’를 보완하기 위한 조치인 것으로 보인다.

    최씨의 이런 시도는 어느 정도 먹혀들었다. 최규선이 착한 사람인지, 믿을 만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가 작심한 듯 폭로하는 말은 들어볼 가치가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는 것. 이 때문에 여야 정치인들은 최규선의 입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기만 해도 ‘정치적 타격’을 받는 상황이 됐다.

    최규선씨가 테이프나 측근과의 대화, 검찰수사 등에서 언급한 정치세력은 크게 김홍일 의원과 그 지지 세력, 권노갑 전 고문과 그 지지세력, 김홍걸씨와 그 주변인들, 한나라당 등 네 부분으로 나뉘고 있다. 최씨에게 가장 큰 ‘설화’(舌禍)를 입은 쪽은 김홍일 의원측이다.

    김홍일 의원에 일방적 불리한 진술 ‘최대 피해자’

    묘하게도 최규선씨는 김홍일 의원과 권노갑씨, 김의원과 김홍걸씨를 대립국면으로 몰고 가면서 김의원측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진술만 털어놓았다. 최씨는 김홍일 의원이 미국으로 도피한 전 경찰청 특수수사과장 최성규씨의 후견인이라고 주장했다. 최씨가 밀항대책회의 멤버였다고 폭로한 이만영 청와대비서관은 김의원의 국회보좌관 출신이다.



    최재승 의원은 김홍일 의원이 명예회장으로 있는 연청의 회장. 김의원의 측근으로 통한다. 최규선씨가 주장하는 최의원과의 대화 내용이 특히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화제다. 최규선씨는 최의원이 자신에게 “그 알 누구야, 알××. 그 알 좀 나눠 먹자”고 말했다고 밝혔다. ‘알××’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왕자를 가리킨다. ‘알 왈리드 왕자가 한국에 대규모 투자를 하게 되면 그 떡고물을 같이 나눠 먹자’는 얘기로 사람들은 이해했다. ‘지저분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최의원측은 물론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최규선씨는 김홍일씨 본인도 직접 공격했다. “홍걸이도 형들에게 치여서 한국에 나와 있기도 싫다고 했습니다.” 최씨는 김홍걸씨에게 남긴 전화 메시지에서는 “홍일이형이 또 서울에 들어옵니다. 어떤 장난을 칠지 몰라요”라면서 극도의 불신을 나타냈다. 김홍일 의원은 졸지에 이복동생인 홍걸씨를 핍박하는 형으로 묘사됐다.

    반면 최씨는 김홍일 의원과 대립적 구도에 위치시킨 권노갑 전 고문에 대해선 호의를 보였다. 권 전 고문이 최씨에게 “난 자네 예뻐해 주겠네”라고 ‘덕담’을 해주었기 때문일까.

    또한 최씨는 한나라당에 돈을 제공한 혐의를 부인해 한나라당도 ‘살렸다’. 최씨는 한나라당 다른 의원들과 접촉한 부분에 대해서도 입을 닫고 있다.

    이 같은 사안들로 보면 최씨는 현재 ‘피아(彼我) 개념’이 확실한 상태다. 최씨로부터 융단폭격 받았던 정치인들은 추가 폭로를 염려해야 할 상황이다. 그러나 ‘최씨의 아군들’ 역시 계속 안심할 수만은 없다. 최씨는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을 넘어 신처럼 숭배했다”고 털어놓았었다. 그런 그가 김대통령은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폭로했다. 최규선씨는 ‘서로 끌어안고 위로하는’ 사이였던 김홍걸씨도 결국 지켜주지 않았다. 최씨는 홍걸씨에게 구속 직전 협박 메시지를 남겼고, 종국에는 홍걸씨에게 거액을 줬다는 부분까지 공개해 버리고 말았다.

    민주당 한 의원은 “최씨에겐 자신이 사는 것이 최우선인 것 같다. 홍걸씨에게 돈을 주었다고 해야 자신의 형량이 가벼워지고 추징금이 적게 나올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최씨는 모든 정파를 자신의 적으로 돌려놓지 않는 것이 재기를 위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최씨에게 ‘영원한 우정’은 없다는 사실이다. 최씨는 지난 10여년 동안 여야를 넘나들면서 정치인들과 친분을 쌓아왔다. 지금 최씨를 바라보는 정치인들은 최씨의 경쟁자이든, 최씨의 친구이든 불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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