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밑의 백조 다리’라는 우스개가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백조의 자태는 우아함 그 자체지만 물 속에 잠겨 있는 두 다리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고 있다는 뜻이다.
약간 무례한 비유지만 발레리나의 처지 역시 이와 비슷하다. 무대에 선 발레리나의 모습은 인간의 몸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급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분홍 토슈즈 안에 숨겨진 발레리나의 발은 온갖 상처로 성할 날이 없다.
발레리나 강수진(35)의 발 사진을 본 사람은 누구나 충격을 받는다. 열 개의 발가락마다 박혀 있는 뭉툭한 굳은살, 단 하나도 성치 않은 발톱들. 사람의 발이 아니라 나무둥치 같다. 이 끔찍하게 망가진 발은 강수진이 살아온 인생을 어떠한 미사여구(美辭麗句)보다 더 확실하게 말해준다. 그녀의 인생은 발레 그 자체였다고.
선화예중에 다니다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에 유학한 강수진은 86년 로잔 국제 발레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했다. 이 발레단의 군무 무용수부터 시작해 7년 만에 주역 무용수 자리를 따냈고 95년부터는 시즌 오프닝 무대에 서는 프리마 발레리나 자리에 올랐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은 고전발레와 모던발레를 고루 공연하며 세계 각국의 무용수들이 단원으로 활동하는 단체다. 강수진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은 나의 집이다”고 할 만큼 이 발레단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런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8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1월30, 3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이 발레단의 공연 작품은 ‘카멜리아 레이디’. 뒤마 피스의 소설 ‘춘희’를 원작으로 하는 모던발레다. 주역 마르그리트는 물론 강수진이 맡는다. 그녀는 마르그리트 역으로 유럽 최고의 무용수에게 주어지는 ‘브누아 다 랑스’ 상을 받았다. 1월10일 오후 공연 준비에 한창인 강수진에게 전화를 걸어 근황을 들어보았다.
“‘카멜리아 레이디’는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중 하나예요. 다른 발레들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죠. 98년에 처음 공연했는데 연습하는 동안 스토리와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 많이 울었어요.”
강수진이 춤추는 마르그리트는 파리의 고급 창부다. 한 젊은이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나 폐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평소 ‘남다른 표현력을 가졌다’는 평을 듣는 강수진이지만 ‘카멜리아 레이디’에서 그녀가 표현하는 마르그리트는 소름이 돋을 정도다. 극의 마지막에 마르그리트는 폐병으로 죽는다. 만약 강수진이 실제로 무대에서 쓰러진다 해도 관객들은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토록 그녀는 혼신을 다해 춤춘다.
그러나 막이 내려가면 자신의 춤에 만족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아, 참 잘했구나’ 하고 생각한 적은 지금까지 열 번도 안 될 거예요. 프리마 발레리나인 지금이나 군무 무용수였을 때나 그건 똑같아요. 한 번 춤추는 건 쉽죠. 하지만 좀더 수준 높게 추는 것, 작품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춤은 정말 어려워요.”
엄청난 연습벌레로 알려진 강수진은 아침이면 극장 연습실로 출근해 최소 하루 6시간 이상 연습한다. 공연을 앞두고는 밤 11시까지 연습할 때도 많다. 그러면 쉬는 시간에는? “밥 먹고 잠자는 거죠. 그게 쉬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면 늘 어딘가가 아프고, 아프지 않은 날은 ‘내가 연습을 게을리했구나’하고 반성한다고.
지난 99년, 강수진은 영광과 위기를 동시에 맞았다. ‘브누아 다 랑스’ 상을 수상하고 뉴욕 링컨센터 무대를 통해 까다로운 ‘뉴욕타임스’의 평론가들에게 격찬을 받았지만 그해 가을 다리 부상이 악화되었다. 다리가 좀 아파도 ‘무용수가 아픈 게 당연하지’ 하고 참았던 게 화근이었다. 그녀는 2000년 한 해 동안 춤을 추지 못했다. “쉬는 동안 다리가 너무 아파 초조해할 틈도 없었어요. 1년 후 다시 연습을 시작할 때는 마치 처음 배우는 학생 같았어요. 온몸이 굳어 있고…. 그걸 극복하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러나 강수진의 춤은 1년의 공백 후 오히려 더 성숙해졌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사실 강수진에게 올 1월은 기억에 남을 한 달이다. 서울 공연 외에도 1월11일에 오래 사귀어 온 터키 출신 남자친구 툰치 서크만씨(42)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기자가 인터뷰를 위해 슈투트가르트의 집에 전화를 건 날이 결혼식 하루 전날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발레리나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더구나 강수진은 명품 브랜드 페라가모의 모델이 아닌가.
그러나 “웨딩드레스는 고르셨나요?”라는 질문에 강수진은 웃기만 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11일 아침, 시청에 가 결혼식을 하고 바로 극장 연습실로 출근했다. 허니문은 물론 웨딩드레스도, 면사포도, 하객도 없었다. 그날 저녁 몇 명의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었을 뿐이다.
“결혼 후에도 달라질 건 없어요. 그저 할 때가 되었다 싶어 한 것뿐이에요. 식이요? 나중에 시간 나면 해야죠. 어떤 여자가 웨딩드레스 안 입고 싶겠어요. 하지만 사람이 원한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서크만 역시 강수진의 파트너로 춤춘 발레 무용수였다. 96년에 은퇴한 그는 한동안 강수진의 매니저로 일하기도 했다. 현재는 발레 지도교사다. 강수진은 “무대에서 파트너였던 그가 이제 죽을 때까지 내 인생의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슈투트가르트의 버스와 전차에는 강수진의 얼굴이 커다랗게 붙어 있다. 슈투트가르트시의 난(蘭)협회는 새로 개량한 난 품종에 강수진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열아홉 살의 나이로 혼자 독일에 와 오로지 발레만 바라보며 살아온 지 16년. 이미 독일의 스타인 강수진은 이제 뉴욕 공연의 성공으로 세계적인 발레리나 자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다시 태어나도 발레를 하실 건가요?”라는 물음에 강수진은 뜻밖에도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나는 발레에 내 인생을 바쳤어요. 지금까지 정말 최선을 다해 발레를 해왔고요. 그래서 후회가 없어요. 만약 지금까지의 인생에 대해 후회가 있다면 더 잘하기 위해 다음 인생에서도 발레를 선택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아니에요. 다시 태어난다면 음악을 하고 싶어요.”
단 한순간도 후회 없도록 최선을 다한 인생이 어디 흔하랴. 그리고 그 인생을 바쳐 추는 춤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녀는 발레에서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승리한 사람이었다.
약간 무례한 비유지만 발레리나의 처지 역시 이와 비슷하다. 무대에 선 발레리나의 모습은 인간의 몸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급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분홍 토슈즈 안에 숨겨진 발레리나의 발은 온갖 상처로 성할 날이 없다.
발레리나 강수진(35)의 발 사진을 본 사람은 누구나 충격을 받는다. 열 개의 발가락마다 박혀 있는 뭉툭한 굳은살, 단 하나도 성치 않은 발톱들. 사람의 발이 아니라 나무둥치 같다. 이 끔찍하게 망가진 발은 강수진이 살아온 인생을 어떠한 미사여구(美辭麗句)보다 더 확실하게 말해준다. 그녀의 인생은 발레 그 자체였다고.
선화예중에 다니다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에 유학한 강수진은 86년 로잔 국제 발레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했다. 이 발레단의 군무 무용수부터 시작해 7년 만에 주역 무용수 자리를 따냈고 95년부터는 시즌 오프닝 무대에 서는 프리마 발레리나 자리에 올랐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은 고전발레와 모던발레를 고루 공연하며 세계 각국의 무용수들이 단원으로 활동하는 단체다. 강수진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은 나의 집이다”고 할 만큼 이 발레단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런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8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1월30, 3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이 발레단의 공연 작품은 ‘카멜리아 레이디’. 뒤마 피스의 소설 ‘춘희’를 원작으로 하는 모던발레다. 주역 마르그리트는 물론 강수진이 맡는다. 그녀는 마르그리트 역으로 유럽 최고의 무용수에게 주어지는 ‘브누아 다 랑스’ 상을 받았다. 1월10일 오후 공연 준비에 한창인 강수진에게 전화를 걸어 근황을 들어보았다.
“‘카멜리아 레이디’는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중 하나예요. 다른 발레들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죠. 98년에 처음 공연했는데 연습하는 동안 스토리와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 많이 울었어요.”
강수진이 춤추는 마르그리트는 파리의 고급 창부다. 한 젊은이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나 폐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평소 ‘남다른 표현력을 가졌다’는 평을 듣는 강수진이지만 ‘카멜리아 레이디’에서 그녀가 표현하는 마르그리트는 소름이 돋을 정도다. 극의 마지막에 마르그리트는 폐병으로 죽는다. 만약 강수진이 실제로 무대에서 쓰러진다 해도 관객들은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토록 그녀는 혼신을 다해 춤춘다.
그러나 막이 내려가면 자신의 춤에 만족하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아, 참 잘했구나’ 하고 생각한 적은 지금까지 열 번도 안 될 거예요. 프리마 발레리나인 지금이나 군무 무용수였을 때나 그건 똑같아요. 한 번 춤추는 건 쉽죠. 하지만 좀더 수준 높게 추는 것, 작품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춤은 정말 어려워요.”
엄청난 연습벌레로 알려진 강수진은 아침이면 극장 연습실로 출근해 최소 하루 6시간 이상 연습한다. 공연을 앞두고는 밤 11시까지 연습할 때도 많다. 그러면 쉬는 시간에는? “밥 먹고 잠자는 거죠. 그게 쉬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면 늘 어딘가가 아프고, 아프지 않은 날은 ‘내가 연습을 게을리했구나’하고 반성한다고.
지난 99년, 강수진은 영광과 위기를 동시에 맞았다. ‘브누아 다 랑스’ 상을 수상하고 뉴욕 링컨센터 무대를 통해 까다로운 ‘뉴욕타임스’의 평론가들에게 격찬을 받았지만 그해 가을 다리 부상이 악화되었다. 다리가 좀 아파도 ‘무용수가 아픈 게 당연하지’ 하고 참았던 게 화근이었다. 그녀는 2000년 한 해 동안 춤을 추지 못했다. “쉬는 동안 다리가 너무 아파 초조해할 틈도 없었어요. 1년 후 다시 연습을 시작할 때는 마치 처음 배우는 학생 같았어요. 온몸이 굳어 있고…. 그걸 극복하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러나 강수진의 춤은 1년의 공백 후 오히려 더 성숙해졌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사실 강수진에게 올 1월은 기억에 남을 한 달이다. 서울 공연 외에도 1월11일에 오래 사귀어 온 터키 출신 남자친구 툰치 서크만씨(42)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기자가 인터뷰를 위해 슈투트가르트의 집에 전화를 건 날이 결혼식 하루 전날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발레리나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더구나 강수진은 명품 브랜드 페라가모의 모델이 아닌가.
그러나 “웨딩드레스는 고르셨나요?”라는 질문에 강수진은 웃기만 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11일 아침, 시청에 가 결혼식을 하고 바로 극장 연습실로 출근했다. 허니문은 물론 웨딩드레스도, 면사포도, 하객도 없었다. 그날 저녁 몇 명의 친구와 함께 저녁을 먹었을 뿐이다.
“결혼 후에도 달라질 건 없어요. 그저 할 때가 되었다 싶어 한 것뿐이에요. 식이요? 나중에 시간 나면 해야죠. 어떤 여자가 웨딩드레스 안 입고 싶겠어요. 하지만 사람이 원한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서크만 역시 강수진의 파트너로 춤춘 발레 무용수였다. 96년에 은퇴한 그는 한동안 강수진의 매니저로 일하기도 했다. 현재는 발레 지도교사다. 강수진은 “무대에서 파트너였던 그가 이제 죽을 때까지 내 인생의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슈투트가르트의 버스와 전차에는 강수진의 얼굴이 커다랗게 붙어 있다. 슈투트가르트시의 난(蘭)협회는 새로 개량한 난 품종에 강수진의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열아홉 살의 나이로 혼자 독일에 와 오로지 발레만 바라보며 살아온 지 16년. 이미 독일의 스타인 강수진은 이제 뉴욕 공연의 성공으로 세계적인 발레리나 자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다시 태어나도 발레를 하실 건가요?”라는 물음에 강수진은 뜻밖에도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나는 발레에 내 인생을 바쳤어요. 지금까지 정말 최선을 다해 발레를 해왔고요. 그래서 후회가 없어요. 만약 지금까지의 인생에 대해 후회가 있다면 더 잘하기 위해 다음 인생에서도 발레를 선택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아니에요. 다시 태어난다면 음악을 하고 싶어요.”
단 한순간도 후회 없도록 최선을 다한 인생이 어디 흔하랴. 그리고 그 인생을 바쳐 추는 춤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녀는 발레에서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승리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