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시 지수면 용복리 동지마을. 진주 도심에서 40km, 면소재지에서 10km 떨어진 이곳은 버스도 아침저녁 두 번밖에 들어오지 않는 오지 중 오지마을이다. 이 마을은 지난 1999년 10월 진주시가 마을의 유일한 의료기관이던 동지보건진료소를 페쇄하면서 완벽한 ‘무의촌’이 됐다.
몸이 아프면 24시간 자기 집 드나들 듯 진료를 받아온 마을 사람들은 진료소가 없어지자 “관(官)이 농촌 노인들 다 죽인다”며 불만에 싸여 있다.
“차가 없는 노인은 가만히 앉아 죽으라는 거지. 내 남편도 그래서 죽었는지 몰라.” 만성 퇴행성 관절염에 시달리는 이 마을 김필순씨(62)는 진료소 폐쇄 후 매주 한 번씩 나오는 방문진료단에 의존해 약을 먹어 왔지만 최근에는 3주째 진료단이 나오지 않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몸이 아파도 면에 있는 보건지소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집에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회지에 나가 있는 자식을 매번 불러들일 수도 없는 노릇. 김씨로서는 화가 나지만 진료단을 기다리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남편도 새벽에 혈압이 올라 쓰러졌는데 진료소만 그대로 있었어도 그렇게 쉽게 세상을 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김씨는 지난해 3월 숨진 남편 한모씨(당시 67)를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아프다. 진료소에 상주한 진료원의 응급처치만 있었어도 후송 도중 숨지는 사고는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워낙 산골이라 면소재지에 있는 119구급대가 들어오는 데도 1시간 이상 걸렸고, 면 보건지소가 새벽에는 문을 닫기 때문에 3시간 넘게 걸려 진주 시내의 종합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이미 숨져 있었다.
동지마을 강용석 이장(61)은 “250여명의 주민 중 절반이 노인이고 교통은 더욱 불편해졌는데 보건진료소를 왜 폐쇄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탄식한다.
대도시 사람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겠지만 진주시 동지마을처럼 마을의 유일한 의료기관인 보건진료소가 없어지면서 졸지에 ‘무의촌’이 된 농어촌 마을이 급속히 늘고 있다.
보건진료소는 지난 80년 정부가 농어촌 오지마을에 최소한의 의료 혜택을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각 읍과 리 단위에 설치한 공공 의료시설. 부지는 마을 주민에게서 기부받고 보건진료원(간호사, 별정직 공무원)과 의료기구는 정부가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에 따라 보건진료소는 그동안 마을 주민들에게 1차 의료기관과 마을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해온 것이 사실. 특히 진료원이 마을 내 보건진료소에서 거주하기 때문에 만성질환이 있는 환자나 응급환자는 진료소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이렇듯 농어촌 오지마을의 ‘건강 파수꾼’ 구실을 하며 지난 97년 말 전국적으로 2040개소까지 늘어났던 보건진료소는 98년 IMF 관리체제에서 진행된 공무원 구조조정 과정에서 철퇴를 맞게 된다. 별정직이던 보건진료원이 구조조정의 주 타깃이 된 것.
지난 연말까지 계속된 구조조정에서 보건진료원은 자그마치 230여명이 자리를 잃었다. 각 지방자치단체는 진료원의 구조조정과 함께 보건진료소 통폐합 작업에 나서 올 1월까지 4년여 동안 보건진료소 140개소를 완전 폐소하고 56개소는 진료소 건물만 유지한 채 인근 보건진료소를 이용하도록 하거나 아예 보건진료원 없이 공석으로 비워두고 있는 형편이다.
각 지자체는 진료소 통폐합 당시 폐소에 반발하는 주민들에게 “도로와 교통수단이 발달해 오지가 줄었고 농촌 인구도 감소했기 때문에 법적 기준에 미달하는 보건진료소는 폐소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폈다. 지난 80년 보건진료소 설치 당치 제정된 농촌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이하 농특법) 상 ‘의료 시설과의 거리가 통상의 교통수단에 의해 30분 이상 소요되는 지역 중 인구 500인 이상인 지역으로 시장, 군수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도서지역 300인 이상) 등에 설치할 수 있다’는 규정에 위배되는 보건진료소는 폐지해야 한다는 게 각 지자체의 주장이다.
그러나 각 지자체의 보건진료소 폐소와 보건진료원 감축의 부작용은 예상과 달리 심각하다. 인구 기준으로 일률적으로 자르다 보니 진주시 동지마을 같은 산간 도서벽지 마을의 보건진료소가 폐소되는 사례가 속출했고, 도로가 신설돼 교통사정이 좋아졌다는 마을들도 버스회사들의 노선 감축으로 대중 교통수단이 줄어든 곳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노인인구의 급증으로 만성 퇴행성 질환자가 마을 주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보건진료소가 폐지되자 주민들의 불만은 극도에 다다른 상태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 구계리 보건진료소가 바로 그런 경우. 인근 방송리와 노사1, 2리, 직리 주민 400여명이 이용하던 보건진료소가 2000년 1월 폐소되면서 마을 주민들은 4~10km 떨어진 면 보건지소를 두 시간 이상 걸어다니고 있다.
마을 숙원사업으로 아스팔트 지방도가 나긴 했지만 들어오는 버스는 하루 10회에서 2회로 줄어들었다. 면에 한 번 나가려면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나갔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어 거동이 불편한 환자에게는 버스 타기가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다. 급체나 설사, 고열 등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119 구급대를 부를 수밖에 없다. 마을 주민들은 “이제 119구급대도 지쳤는지 웬만큼 아프다고 하지 않으면 잘 와주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구계리 변상대 이장은 “고혈압, 당뇨병, 관절염 환자 등 노인 환자들은 서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루라도 약을 끊으면 안 되는 만성질환자들인 이들은 차가 있는 주민이 면에 언제 나가나 눈치봐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가벼운 질환자라도 눈 내린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 버스를 타고 가려면 자식의 도움이 필요한데 자식이 도회지에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노인들의 서러움은 더욱 크다”는 게 변이장의 설명이다.
보건진료소 통폐합에 대한 부작용이 확산되면서 각 지자체는 지난해 9월 보건진료소 폐쇄지역 마을 주민들의 조직적 반발에 직면했다. 오지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보건진료소운영협의회와 전국보건진료간호사회가 지자체의 보건진료소 폐지 부당성을 주장하며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구조조정 당한 보건진료원의 복귀와 보건진료소 신설을 주장하는 탄원서와 청원을 넣은 것.
보건진료소운영협의회 김창호 총무는 “전국 읍면 지역 인구 중 65세 이상 노인이 36.2%(통계청)에 이르고, 그 중 86.7%가 만성 퇴행성 질환을 가지고 있으며, 34%는 일상생활을 영위하기에 어려울 정도로 질환이 심각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률적 잣대로 보건진료소를 없앤 것은 행정편의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고 비판한다.
주민들의 이런 비판은 의사 출신 일부 의원들을 제외한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지난해 10월 보건진료소 확충을 위한 법 제정 움직임으로까지 확산됐다. 농특법을 개정해 보건진료소 설치 기준을 완화하고 지자체의 보건진료소 폐소 정책을 막자는 것. 민주당 김성순 의원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모두 공공 보건의료기관을 확충하는 일이 시급한 현안인데 농어촌 주민에게 가장 접근성이 뛰어나고 저렴한 비용으로 보건의료 수요를 충족시킬 보건진료소를 폐소하는 것은 시장·군수의 보건의료 철학의 부재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실제 일부 지자체는 주민들의 반발에 밀려 비어 있던 진료소에 보건진료원을 충원하기도 했다. 98년 군내 11개 보건진료소 중 5개소의 보건진료원을 구조조정 했던 충남 금산군의 경우 2000년 6월 4개소의 보건진료원을 복귀시켰다. 전국적으로 올 1월까지 복원한 보건진료소는 전국적으로 17개소. 폐지했다 다시 신설한 보건진료소도 4군데에 이른다.
충남 금산군 보건소의 이화영씨는 “보건소와 보건지소 의사의 방문진료와 방문간호를 늘려 의료의 질을 높여보자는 차원에서 진료소 통합운영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주민들은 의사가 아니더라도 좀더 가까이서 진료받을 수 있는 진료소를 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료원의 복귀와 진료소 부활은 일부 지자체에 한정된 현상이다. 대부분 지자체가 구조조정을 하면서 해당 진료소의 진료원 정원 자체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또 정원은 살아 있다 해도 비워놓은 진료소에 진료원을 재배치하기는 더욱 힘들다. 진료원을 배치하기 위해서는 시·군 보건소에 있는 보건직이나 행정직 인력 한 명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충북 옥천군 안남면 지수리 지수보건진료소와 안내면 용촌리 용촌보건진료소도 이런 이유로 진료소 건물이 4년째 폐가로 방치되고 있는 곳 중 하나. 지난 98년 11월 진료원이 구조조정 된 후 진료원을 곧 보내주겠다는 군의 약속이 차일피일 미뤄지자 주민들 불만은 커질 대로 커진 상태다. 이 마을 이흥수 이장은 “200여명의 주민이 2주일에 한 번 오는 안남면 보건지소의 방문진료를 기다리거나 1시간 이상을 걸어 보건지소를 찾아야 한다. 면소재지 내에도 의원이나 약국이 없으니 노인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군에서는 진료원을 보내준다지만 기약이 없다. 간디스토마 예방접종도 못하고, 이러다 무슨 일 나는 게 아닌 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지수면 보건지소의 한 관계자도 “의사의 방문진료도 한계가 있다. 이른 시일 내에 진료원 복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환자들의 건강이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오지마을 보건진료소는 폐소되거나 통폐합되어 ‘의료 사각지대’로 변하고 있으나 의료기관이 많아 별 불편 없는 도시의 경우 보건진료소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오남보건진료소의 경우 인근에 7000가구의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의료기관이 10여 군데나 들어섰다. 남양주시의 한 관계자는 “영세민들의 이용률이 많아 진료소를 미처 폐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명한다.
대한의사협회의 한 관계자는 “전국에 이런 보건진료소가 한둘이 아니다. 의약분업 해당 지역 내에서 간호사가 처방하고 약 지어주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보건진료소의 통폐합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의사협회가 보건진료소의 복원이나 신설에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간호사인 보건진료원이 농어촌 주민들의 ‘약물 오남용’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의사협회는 최근 전국 10여개 보건진료소의 의약품 사용량을 조사한 결과, 의사가 배치된 보건지소보다 보건진료소가 최소 1.3배에서 최고 9배나 과도하게 의약품을 처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보건진료간호사회의 권춘화 회장은 “보건진료소는 법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의약품의 종류가 한정돼 있기 때문에 특정 약품의 사용이 잦을 수밖에 없다. 약품 사용에 제한받지 않는 보건지소의 특정약품 사용량과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반발한다. 권회장은 “의사협회의 조사 자료를 보면 보건지소의 환자 방문당 투약 일수가 9.64일로, 보건진료소 4.45일의 두 배가 넘는데 정작 그 자료는 발표하지 않았다”며 “이는 이번 조사가 보건진료소 확대에 따른 의사 수입 감소를 우려한 음해성 조사였다는 증거”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다면 보건진료소에 의사들이 오면 되지 않습니까. 오지마을이라고 간호사도 오지 않으려 하는데 의사가 와서 진료소에서 숙식하며 환자들을 돌본다면 더없이 고마운 일이죠.”(보건진료소 운영협의회 김창호 총무)
보건진료소 존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의사협회와 보건진료간호사회의 논란을 지켜보는 전국 오지마을 주민들의 시각은 단순하다. 간호사가 처방 조제하는 것이 보기 싫으면 의사가 오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최근 병무청은 남아도는 의사 자원을 현역으로 입영시킬 수 있는 관련 규정을 신설했다. 그러자 대한공중보건의사협의회는 서둘러 ‘도서 벽지의 보건진료소에도 공중보건 의사가 근무할 충분한 의사가 있음’을 밝히는 성명서를 냈다. ‘무의촌’의 설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오지마을 주민들은 공중보건의들의 결단이 현역 입영을 피하려는 편법이 아니기를 기대하고 있다.
몸이 아프면 24시간 자기 집 드나들 듯 진료를 받아온 마을 사람들은 진료소가 없어지자 “관(官)이 농촌 노인들 다 죽인다”며 불만에 싸여 있다.
“차가 없는 노인은 가만히 앉아 죽으라는 거지. 내 남편도 그래서 죽었는지 몰라.” 만성 퇴행성 관절염에 시달리는 이 마을 김필순씨(62)는 진료소 폐쇄 후 매주 한 번씩 나오는 방문진료단에 의존해 약을 먹어 왔지만 최근에는 3주째 진료단이 나오지 않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몸이 아파도 면에 있는 보건지소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집에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회지에 나가 있는 자식을 매번 불러들일 수도 없는 노릇. 김씨로서는 화가 나지만 진료단을 기다리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남편도 새벽에 혈압이 올라 쓰러졌는데 진료소만 그대로 있었어도 그렇게 쉽게 세상을 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김씨는 지난해 3월 숨진 남편 한모씨(당시 67)를 생각하면 더욱 가슴이 아프다. 진료소에 상주한 진료원의 응급처치만 있었어도 후송 도중 숨지는 사고는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워낙 산골이라 면소재지에 있는 119구급대가 들어오는 데도 1시간 이상 걸렸고, 면 보건지소가 새벽에는 문을 닫기 때문에 3시간 넘게 걸려 진주 시내의 종합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이미 숨져 있었다.
동지마을 강용석 이장(61)은 “250여명의 주민 중 절반이 노인이고 교통은 더욱 불편해졌는데 보건진료소를 왜 폐쇄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탄식한다.
대도시 사람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겠지만 진주시 동지마을처럼 마을의 유일한 의료기관인 보건진료소가 없어지면서 졸지에 ‘무의촌’이 된 농어촌 마을이 급속히 늘고 있다.
보건진료소는 지난 80년 정부가 농어촌 오지마을에 최소한의 의료 혜택을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각 읍과 리 단위에 설치한 공공 의료시설. 부지는 마을 주민에게서 기부받고 보건진료원(간호사, 별정직 공무원)과 의료기구는 정부가 제공하는 방식이다. 이에 따라 보건진료소는 그동안 마을 주민들에게 1차 의료기관과 마을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해온 것이 사실. 특히 진료원이 마을 내 보건진료소에서 거주하기 때문에 만성질환이 있는 환자나 응급환자는 진료소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이렇듯 농어촌 오지마을의 ‘건강 파수꾼’ 구실을 하며 지난 97년 말 전국적으로 2040개소까지 늘어났던 보건진료소는 98년 IMF 관리체제에서 진행된 공무원 구조조정 과정에서 철퇴를 맞게 된다. 별정직이던 보건진료원이 구조조정의 주 타깃이 된 것.
지난 연말까지 계속된 구조조정에서 보건진료원은 자그마치 230여명이 자리를 잃었다. 각 지방자치단체는 진료원의 구조조정과 함께 보건진료소 통폐합 작업에 나서 올 1월까지 4년여 동안 보건진료소 140개소를 완전 폐소하고 56개소는 진료소 건물만 유지한 채 인근 보건진료소를 이용하도록 하거나 아예 보건진료원 없이 공석으로 비워두고 있는 형편이다.
각 지자체는 진료소 통폐합 당시 폐소에 반발하는 주민들에게 “도로와 교통수단이 발달해 오지가 줄었고 농촌 인구도 감소했기 때문에 법적 기준에 미달하는 보건진료소는 폐소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폈다. 지난 80년 보건진료소 설치 당치 제정된 농촌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이하 농특법) 상 ‘의료 시설과의 거리가 통상의 교통수단에 의해 30분 이상 소요되는 지역 중 인구 500인 이상인 지역으로 시장, 군수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도서지역 300인 이상) 등에 설치할 수 있다’는 규정에 위배되는 보건진료소는 폐지해야 한다는 게 각 지자체의 주장이다.
그러나 각 지자체의 보건진료소 폐소와 보건진료원 감축의 부작용은 예상과 달리 심각하다. 인구 기준으로 일률적으로 자르다 보니 진주시 동지마을 같은 산간 도서벽지 마을의 보건진료소가 폐소되는 사례가 속출했고, 도로가 신설돼 교통사정이 좋아졌다는 마을들도 버스회사들의 노선 감축으로 대중 교통수단이 줄어든 곳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노인인구의 급증으로 만성 퇴행성 질환자가 마을 주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보건진료소가 폐지되자 주민들의 불만은 극도에 다다른 상태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 구계리 보건진료소가 바로 그런 경우. 인근 방송리와 노사1, 2리, 직리 주민 400여명이 이용하던 보건진료소가 2000년 1월 폐소되면서 마을 주민들은 4~10km 떨어진 면 보건지소를 두 시간 이상 걸어다니고 있다.
마을 숙원사업으로 아스팔트 지방도가 나긴 했지만 들어오는 버스는 하루 10회에서 2회로 줄어들었다. 면에 한 번 나가려면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나갔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어 거동이 불편한 환자에게는 버스 타기가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다. 급체나 설사, 고열 등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119 구급대를 부를 수밖에 없다. 마을 주민들은 “이제 119구급대도 지쳤는지 웬만큼 아프다고 하지 않으면 잘 와주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구계리 변상대 이장은 “고혈압, 당뇨병, 관절염 환자 등 노인 환자들은 서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루라도 약을 끊으면 안 되는 만성질환자들인 이들은 차가 있는 주민이 면에 언제 나가나 눈치봐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가벼운 질환자라도 눈 내린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 버스를 타고 가려면 자식의 도움이 필요한데 자식이 도회지에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노인들의 서러움은 더욱 크다”는 게 변이장의 설명이다.
보건진료소 통폐합에 대한 부작용이 확산되면서 각 지자체는 지난해 9월 보건진료소 폐쇄지역 마을 주민들의 조직적 반발에 직면했다. 오지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보건진료소운영협의회와 전국보건진료간호사회가 지자체의 보건진료소 폐지 부당성을 주장하며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구조조정 당한 보건진료원의 복귀와 보건진료소 신설을 주장하는 탄원서와 청원을 넣은 것.
보건진료소운영협의회 김창호 총무는 “전국 읍면 지역 인구 중 65세 이상 노인이 36.2%(통계청)에 이르고, 그 중 86.7%가 만성 퇴행성 질환을 가지고 있으며, 34%는 일상생활을 영위하기에 어려울 정도로 질환이 심각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률적 잣대로 보건진료소를 없앤 것은 행정편의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고 비판한다.
주민들의 이런 비판은 의사 출신 일부 의원들을 제외한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지난해 10월 보건진료소 확충을 위한 법 제정 움직임으로까지 확산됐다. 농특법을 개정해 보건진료소 설치 기준을 완화하고 지자체의 보건진료소 폐소 정책을 막자는 것. 민주당 김성순 의원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모두 공공 보건의료기관을 확충하는 일이 시급한 현안인데 농어촌 주민에게 가장 접근성이 뛰어나고 저렴한 비용으로 보건의료 수요를 충족시킬 보건진료소를 폐소하는 것은 시장·군수의 보건의료 철학의 부재로밖에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실제 일부 지자체는 주민들의 반발에 밀려 비어 있던 진료소에 보건진료원을 충원하기도 했다. 98년 군내 11개 보건진료소 중 5개소의 보건진료원을 구조조정 했던 충남 금산군의 경우 2000년 6월 4개소의 보건진료원을 복귀시켰다. 전국적으로 올 1월까지 복원한 보건진료소는 전국적으로 17개소. 폐지했다 다시 신설한 보건진료소도 4군데에 이른다.
충남 금산군 보건소의 이화영씨는 “보건소와 보건지소 의사의 방문진료와 방문간호를 늘려 의료의 질을 높여보자는 차원에서 진료소 통합운영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주민들은 의사가 아니더라도 좀더 가까이서 진료받을 수 있는 진료소를 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료원의 복귀와 진료소 부활은 일부 지자체에 한정된 현상이다. 대부분 지자체가 구조조정을 하면서 해당 진료소의 진료원 정원 자체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또 정원은 살아 있다 해도 비워놓은 진료소에 진료원을 재배치하기는 더욱 힘들다. 진료원을 배치하기 위해서는 시·군 보건소에 있는 보건직이나 행정직 인력 한 명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충북 옥천군 안남면 지수리 지수보건진료소와 안내면 용촌리 용촌보건진료소도 이런 이유로 진료소 건물이 4년째 폐가로 방치되고 있는 곳 중 하나. 지난 98년 11월 진료원이 구조조정 된 후 진료원을 곧 보내주겠다는 군의 약속이 차일피일 미뤄지자 주민들 불만은 커질 대로 커진 상태다. 이 마을 이흥수 이장은 “200여명의 주민이 2주일에 한 번 오는 안남면 보건지소의 방문진료를 기다리거나 1시간 이상을 걸어 보건지소를 찾아야 한다. 면소재지 내에도 의원이나 약국이 없으니 노인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군에서는 진료원을 보내준다지만 기약이 없다. 간디스토마 예방접종도 못하고, 이러다 무슨 일 나는 게 아닌 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지수면 보건지소의 한 관계자도 “의사의 방문진료도 한계가 있다. 이른 시일 내에 진료원 복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환자들의 건강이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오지마을 보건진료소는 폐소되거나 통폐합되어 ‘의료 사각지대’로 변하고 있으나 의료기관이 많아 별 불편 없는 도시의 경우 보건진료소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오남보건진료소의 경우 인근에 7000가구의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의료기관이 10여 군데나 들어섰다. 남양주시의 한 관계자는 “영세민들의 이용률이 많아 진료소를 미처 폐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명한다.
대한의사협회의 한 관계자는 “전국에 이런 보건진료소가 한둘이 아니다. 의약분업 해당 지역 내에서 간호사가 처방하고 약 지어주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보건진료소의 통폐합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의사협회가 보건진료소의 복원이나 신설에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간호사인 보건진료원이 농어촌 주민들의 ‘약물 오남용’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의사협회는 최근 전국 10여개 보건진료소의 의약품 사용량을 조사한 결과, 의사가 배치된 보건지소보다 보건진료소가 최소 1.3배에서 최고 9배나 과도하게 의약품을 처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보건진료간호사회의 권춘화 회장은 “보건진료소는 법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의약품의 종류가 한정돼 있기 때문에 특정 약품의 사용이 잦을 수밖에 없다. 약품 사용에 제한받지 않는 보건지소의 특정약품 사용량과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반발한다. 권회장은 “의사협회의 조사 자료를 보면 보건지소의 환자 방문당 투약 일수가 9.64일로, 보건진료소 4.45일의 두 배가 넘는데 정작 그 자료는 발표하지 않았다”며 “이는 이번 조사가 보건진료소 확대에 따른 의사 수입 감소를 우려한 음해성 조사였다는 증거”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다면 보건진료소에 의사들이 오면 되지 않습니까. 오지마을이라고 간호사도 오지 않으려 하는데 의사가 와서 진료소에서 숙식하며 환자들을 돌본다면 더없이 고마운 일이죠.”(보건진료소 운영협의회 김창호 총무)
보건진료소 존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의사협회와 보건진료간호사회의 논란을 지켜보는 전국 오지마을 주민들의 시각은 단순하다. 간호사가 처방 조제하는 것이 보기 싫으면 의사가 오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최근 병무청은 남아도는 의사 자원을 현역으로 입영시킬 수 있는 관련 규정을 신설했다. 그러자 대한공중보건의사협의회는 서둘러 ‘도서 벽지의 보건진료소에도 공중보건 의사가 근무할 충분한 의사가 있음’을 밝히는 성명서를 냈다. ‘무의촌’의 설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오지마을 주민들은 공중보건의들의 결단이 현역 입영을 피하려는 편법이 아니기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