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다. 프로야구는 이때가 연봉협상 정국의 출발점이다. 늦어도 11월 초순에는 결판나는 한국시리즈의 희비가 행운의 주인공들을 가려내면, 각 구단은 12월부터 선수들과 본격적인 연봉 재계약에 들어간다. 구단·선수 양측 모두 힘든 시기지만 연봉을 둘러싼 신경전 또한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경기 못지않은 ‘또 하나의 게임’이다. 일찍이 야구 기자들이 이를 가리켜 멋지게 붙여 놓은 이름이 있으니 바로 ‘스토브 리그’다.
20개의 나이테를 기록한 한국 프로야구도 겨울의 꽃, 스토브 리그를 거치면서 변신을 거듭해 왔다. 시즌을 거치는 동안 선수들의 플레이가 달라지는 반면 겨울을 보낸 후에는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에서 모습이 많이 바뀌어 온 것.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 명령에 따라 앞으로는 연봉협상시 선수들도 대리인(한국은 변호사로 한정될 듯)의 배석이 가능해졌다. 예전에는 구단과 선수가 직접 하던 협상을 제삼자가 나서서 대신해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흔히 에이전트로 표현되는 대리인이 프로야구 초창기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좋은 예가 특급 투수의 양대 기둥으로 손꼽히는 선동렬(당시 해태 투수, 현 KBO 홍보위원)과 최동원(당시 롯데 투수, 전 한화 투수코치). 이들은 이미 대리인 아닌 대리인을 협상에 내세운 바 있다.
80년대 중반 ‘불세출의 투수’ 최동원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부친 최윤식씨가 있었다. 당시 최윤식씨는 최동원이 등판하는 날이면 롯데 사직구장 오른쪽 출입구 한쪽(덕아웃으로 곧장 내려갈 수 있고 옆에는 심판실이 있다)에 의자를 놓고 앉아 아들의 투구 장면을 지켜보았다. 사인도 직접 했다는 얘기가 있으나 신빙성은 약하다.
최동원은 88년 겨울을 마지막으로 프랜차이즈 구단 롯데에서 삼성으로 이적했는데 시즌 내내 최동원과 구단의 연봉협상 줄다리기 탓이 컸다. 최윤식씨는 당시 신문기사에 ‘(최동원이) 약간의 연봉 인하 요인이 있지만 에이스라는 점을 감안해 깎지 않기로 했다’ 는 구단의 입장이 나가자 발끈해 오히려 연봉 인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래봤자 100만원도 채 안 되는 작은 금액 차이였지만 논란이 가중되다 보니 인신공격성 발언이 오가면서 방향이 묘하게 틀어져 버린 것. 결국 전반기 내내 최동원은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고 그해 겨울 팀을 옮겨야 했다.
선동렬의 부친 선판규씨도 아들의 연봉협상에 적극 개입한 경우다. ‘아들은 분명히 국내 최고인데 왜 해태와 협상하면 연봉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하는가’를 고민하던 선씨는 86년 연봉협상을 주도적으로 밀어붙였다. 한동안 수세에 몰리던 구단측은 이상국 당시 홍보부장(현 KBO 사무총장)이 뛰어들어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부장은 선동렬의 아킬레스건과 다름없던 병역 특례 조항을 회심의 카드로 꺼내 들었고, 임의탈퇴 공시를 신청하겠다며 윽박질렀다. 해태는 임의탈퇴 공시신청을 하더라도 KBO에 ‘선동렬의 공시신청’을 받아주지 말 것을 미리 요청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선판규씨는 두 손을 들었고 결국 그해 연봉협상은 구단의 승리로 끝났다.
수완가로 소문난 이상국씨는 이른바 ‘광주물가론’이라는 것을 제창해 선수단의 원성과 구단의 칭찬을 동시에 받았던 인물. 해태가 거의 매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80년대에도 선수들의 연봉은 수직상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상국씨는 협상에 들어갈 때마다 “해태에서 제시하는 금액은 서울 생활에는 부족한 것이겠지만 광주에서는 아파트를 사고도 남는 돈이다. 다른 지방과 비교해 책정한 금액”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며 협상의 주도권을 잡아나간 일화로 유명하다.
믿을 수 있는 친척에게 자문을 구했던 초창기가 지나고 나서 본격적인 에이전트의 시대가 열린다. 그 효시는 99년의 김동수. 대리인제도가 전무하던 시절 김동수는 LG에서 삼성으로 자유계약선수(FA) 이적을 하며 지인인 이홍재씨를 배석하게 했다. 모델 에이전시 대표였던 이홍재씨의 풍부한 연예계 경험은 김동수의 삼성 이적을 연착륙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단순한 조언이 아닌 법적 자문으로 변화한 것이다.
연봉협상의 풍속도는 매년 대동소이하다. 구단과 끝까지 대립하며 전지훈련장에 가서야 계약서에 사인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첫 협상에 도장을 갖고 나와 두말없이 꾹 눌러 찍는 선수도 있다.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는 삼성의 이승엽.
반면 올해 FA가 걸려 있는 전준호는 적극적 협상 자세를 보이는 선수 중 하나. 스포츠 전문지 기자들에게 일일이 전화 걸어 자신이 주장하는 액수의 합리성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고 이메일을 보내기까지 한다. 전준호가 최근 기자들에게 보낸 이메일 가운데 하나는 8개 구단 톱타자의 출루율 비교. 기록을 통해 자신이 최고임을 알리겠다는 계산이다. 99년에는 LG의 손혁(현 기아)도 ‘내가 1억2000만원을 받아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기록 관련 문건을 팬과 기자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한국과 달리 일본의 연봉협상 핵심은 세금 문제에 있다. 자유직업 종사자군에 속하는 한국 선수들보다 비교적 세금이 많은 일본 선수들은 구단이 세금을 어떻게 처리해 줄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올 1월 일본프로야구선수협의회 회장인 후루타 아쓰야(야쿠르트) 선수는 구단에 연봉을 참가보수와 소비세 부담금으로 명확히 나누고 그중 소비세는 구단이 지불해 줄 것을 요구하는 이색적인 주장으로 화제가 되었다.
야구로 따지면 원조 격인 미국이 철저한 데이터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대신 슈퍼스타들이 연봉협상과 팀 이적을 결정할 때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은 가족 문제다. 은퇴한 명포수 테리 스타인벡은 “가족과 사슴 사냥할 수 있는 미네소타가 좋다”며 타 구단의 고액 연봉 제의를 뿌리친 적도 있다.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경우 어느 지역이 좋은가’의 문제도 1년의 3분의 2를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미 프로야구 선수들에겐 중요한 요소다.
이제는 옛이야기가 돼버린 낭만적인 삽화 하나. 지난 93년 겨울, LG 최종준 단장과 정삼흠 투수는 술 전쟁을 치르며 연봉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던 중 정삼흠이 갑작스레 태도를 바꿔 순순히 도장을 찍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술 좋아하는 정삼흠을 술로 이겨보겠다고 선동렬 등의 지원사격까지 받아가며 연봉싸움을 펼친 최단장이었지만 승리의 이유는 전혀 엉뚱한 데 있었다. 밤낮으로 술에 지친 남편을 보다못한 최단장의 아내가 정삼흠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도 좋지만 우리 남편 집에 좀 보내달라”고 하소연한 것이 결정적으로 먹혀든 것. 날이 갈수록 정교해지는 프로야구계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그때 그 시절’ 이야기다.
20개의 나이테를 기록한 한국 프로야구도 겨울의 꽃, 스토브 리그를 거치면서 변신을 거듭해 왔다. 시즌을 거치는 동안 선수들의 플레이가 달라지는 반면 겨울을 보낸 후에는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에서 모습이 많이 바뀌어 온 것.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 명령에 따라 앞으로는 연봉협상시 선수들도 대리인(한국은 변호사로 한정될 듯)의 배석이 가능해졌다. 예전에는 구단과 선수가 직접 하던 협상을 제삼자가 나서서 대신해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흔히 에이전트로 표현되는 대리인이 프로야구 초창기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좋은 예가 특급 투수의 양대 기둥으로 손꼽히는 선동렬(당시 해태 투수, 현 KBO 홍보위원)과 최동원(당시 롯데 투수, 전 한화 투수코치). 이들은 이미 대리인 아닌 대리인을 협상에 내세운 바 있다.
80년대 중반 ‘불세출의 투수’ 최동원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부친 최윤식씨가 있었다. 당시 최윤식씨는 최동원이 등판하는 날이면 롯데 사직구장 오른쪽 출입구 한쪽(덕아웃으로 곧장 내려갈 수 있고 옆에는 심판실이 있다)에 의자를 놓고 앉아 아들의 투구 장면을 지켜보았다. 사인도 직접 했다는 얘기가 있으나 신빙성은 약하다.
최동원은 88년 겨울을 마지막으로 프랜차이즈 구단 롯데에서 삼성으로 이적했는데 시즌 내내 최동원과 구단의 연봉협상 줄다리기 탓이 컸다. 최윤식씨는 당시 신문기사에 ‘(최동원이) 약간의 연봉 인하 요인이 있지만 에이스라는 점을 감안해 깎지 않기로 했다’ 는 구단의 입장이 나가자 발끈해 오히려 연봉 인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래봤자 100만원도 채 안 되는 작은 금액 차이였지만 논란이 가중되다 보니 인신공격성 발언이 오가면서 방향이 묘하게 틀어져 버린 것. 결국 전반기 내내 최동원은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고 그해 겨울 팀을 옮겨야 했다.
선동렬의 부친 선판규씨도 아들의 연봉협상에 적극 개입한 경우다. ‘아들은 분명히 국내 최고인데 왜 해태와 협상하면 연봉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하는가’를 고민하던 선씨는 86년 연봉협상을 주도적으로 밀어붙였다. 한동안 수세에 몰리던 구단측은 이상국 당시 홍보부장(현 KBO 사무총장)이 뛰어들어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부장은 선동렬의 아킬레스건과 다름없던 병역 특례 조항을 회심의 카드로 꺼내 들었고, 임의탈퇴 공시를 신청하겠다며 윽박질렀다. 해태는 임의탈퇴 공시신청을 하더라도 KBO에 ‘선동렬의 공시신청’을 받아주지 말 것을 미리 요청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선판규씨는 두 손을 들었고 결국 그해 연봉협상은 구단의 승리로 끝났다.
수완가로 소문난 이상국씨는 이른바 ‘광주물가론’이라는 것을 제창해 선수단의 원성과 구단의 칭찬을 동시에 받았던 인물. 해태가 거의 매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80년대에도 선수들의 연봉은 수직상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상국씨는 협상에 들어갈 때마다 “해태에서 제시하는 금액은 서울 생활에는 부족한 것이겠지만 광주에서는 아파트를 사고도 남는 돈이다. 다른 지방과 비교해 책정한 금액”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며 협상의 주도권을 잡아나간 일화로 유명하다.
믿을 수 있는 친척에게 자문을 구했던 초창기가 지나고 나서 본격적인 에이전트의 시대가 열린다. 그 효시는 99년의 김동수. 대리인제도가 전무하던 시절 김동수는 LG에서 삼성으로 자유계약선수(FA) 이적을 하며 지인인 이홍재씨를 배석하게 했다. 모델 에이전시 대표였던 이홍재씨의 풍부한 연예계 경험은 김동수의 삼성 이적을 연착륙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단순한 조언이 아닌 법적 자문으로 변화한 것이다.
연봉협상의 풍속도는 매년 대동소이하다. 구단과 끝까지 대립하며 전지훈련장에 가서야 계약서에 사인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첫 협상에 도장을 갖고 나와 두말없이 꾹 눌러 찍는 선수도 있다.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는 삼성의 이승엽.
반면 올해 FA가 걸려 있는 전준호는 적극적 협상 자세를 보이는 선수 중 하나. 스포츠 전문지 기자들에게 일일이 전화 걸어 자신이 주장하는 액수의 합리성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고 이메일을 보내기까지 한다. 전준호가 최근 기자들에게 보낸 이메일 가운데 하나는 8개 구단 톱타자의 출루율 비교. 기록을 통해 자신이 최고임을 알리겠다는 계산이다. 99년에는 LG의 손혁(현 기아)도 ‘내가 1억2000만원을 받아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기록 관련 문건을 팬과 기자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한국과 달리 일본의 연봉협상 핵심은 세금 문제에 있다. 자유직업 종사자군에 속하는 한국 선수들보다 비교적 세금이 많은 일본 선수들은 구단이 세금을 어떻게 처리해 줄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올 1월 일본프로야구선수협의회 회장인 후루타 아쓰야(야쿠르트) 선수는 구단에 연봉을 참가보수와 소비세 부담금으로 명확히 나누고 그중 소비세는 구단이 지불해 줄 것을 요구하는 이색적인 주장으로 화제가 되었다.
야구로 따지면 원조 격인 미국이 철저한 데이터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대신 슈퍼스타들이 연봉협상과 팀 이적을 결정할 때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것은 가족 문제다. 은퇴한 명포수 테리 스타인벡은 “가족과 사슴 사냥할 수 있는 미네소타가 좋다”며 타 구단의 고액 연봉 제의를 뿌리친 적도 있다.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경우 어느 지역이 좋은가’의 문제도 1년의 3분의 2를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미 프로야구 선수들에겐 중요한 요소다.
이제는 옛이야기가 돼버린 낭만적인 삽화 하나. 지난 93년 겨울, LG 최종준 단장과 정삼흠 투수는 술 전쟁을 치르며 연봉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던 중 정삼흠이 갑작스레 태도를 바꿔 순순히 도장을 찍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술 좋아하는 정삼흠을 술로 이겨보겠다고 선동렬 등의 지원사격까지 받아가며 연봉싸움을 펼친 최단장이었지만 승리의 이유는 전혀 엉뚱한 데 있었다. 밤낮으로 술에 지친 남편을 보다못한 최단장의 아내가 정삼흠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도 좋지만 우리 남편 집에 좀 보내달라”고 하소연한 것이 결정적으로 먹혀든 것. 날이 갈수록 정교해지는 프로야구계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그때 그 시절’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