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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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복 벗고 앞치마 두른 ‘은발의 요리사’

고등법원장 출신 오카모토 겐씨 선술집 차려 제2인생 … “판사 때보다 더 만족”

  • < 이영이/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 yes202tokyo@hotmail.com

    입력2004-11-25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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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복 벗고 앞치마 두른 ‘은발의 요리사’
    일본어 ‘사바쿠’라는 단어는 ‘(죄인을) 재판한다’와 ‘(생선 등을) 자른다’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단어는 똑같지만 사람을 ‘사바쿠’하는 일보다 생선을 ‘사바쿠’하는 일이 훨씬 재미있고 보람있습니다.”

    전직 고등법원장, 현직 선술집 주인 겸 요리사. 일본 오사카(大阪)고등법원 앞에 있는 선술집 ‘파루’ 주인 오카모토 겐(岡本健·69)의 두 가지 이력이다. 그가 제2의 인생으로 요리사의 길을 선택한 것은 8년 전의 일. 오사카고등법원장을 끝으로 판사직을 그만두면서 조리사 학교에 입학하자 주변에서는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평소 집에서도 요리를 즐겨 해온 그로서는 새로운 인생에 대한 두려움보다 설렘이 더 컸다. 아들 둘을 둔 그는 평소 집에서 식사준비를 해왔고 아이들 소풍 때마다 주먹밥을 만들어주는 등 요리를 통해 부자간의 정을 다져왔다. 그는 “법정에서 판결을 내릴 때 고심하던 것에 비하면 정성껏 만든 음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며 새로운 인생에 발을 내디뎠다.

    조리사 학교에서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젊은이들과 함께 1년간 요리를 배웠다. 스스로 우월감도 열등감도 모두 버리고 젊은이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공부했다. 덕분에 졸업할 때는 400명 중 최우수학생으로 선발돼 골드아카데미상을 받기도 했다.

    “거의 40년 만에 학교생활을 다시 시작해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우선 차림부터 전혀 달랐지요. 헐렁한 T셔츠에 엉덩이까지 바지를 내려 입는 기묘한 차림을 한번 흉내내 보았더니 생각보다 편하더군요. 일할 때 셔츠가 빠져나오지도 않고요. 젊은이들은 그렇게 실용적인 면이 많지요.”



    조리사 학교를 졸업한 후 지인의 도움으로 다른 가게에서 4개월간 실무를 익힌 다음 지금의 가게를 열었다. 가게 간판은 ‘일품주방(一品酒房) 파루’. 무엇보다 요리를 정성껏 만든다는 의미에서 ‘일품주방’이라는 네 글자를 택했고 영어로 동료, 친구(Pal)라는 뜻의 ‘파루’를 넣어 이름을 지었다.

    가게 면적은 12평 남짓, 좌석은 카운터를 포함해 20여석에 불과한 작은 규모다. 일하는 사람이래야 부인과 종업원 1명이 전부. 영업은 오후 5시에 시작하지만 생선이나 채소를 직접 손질하며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아침 10시부터 이튿날 새벽 1시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는 “맛있는 요리 한 접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힘들여 준비해야 하는지 알아달라”고 덧붙인다.

    이 가게의 메뉴는 40여가지. 처음에는 회나 생선조림, 굴튀김 등 술안주 중심 메뉴로 시작했지만 주먹밥 등 간단한 요깃거리를 원하는 손님이 많아져 메뉴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가 자랑하는 솜씨는 도미머리조림, 연어구이 등 생선요리. 간장이나 각종 소스는 전부 그가 직접 담근 것만 사용한다. 또 재료는 항상 신선한 것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음식값이 조금 비싼 편이다.

    가장 어려워하는 요리는 튀김요리. “기름온도를 160~200℃까지 10℃씩 나누어 조절합니다. 예를 들면 닭튀김은 160℃의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튀기지만 채소튀김은 190℃에서 시작해 야채를 넣으면서 180℃로 낮춘 뒤 빠르게 튀겨내지요.”

    이 가게의 인기 메뉴인 굴튀김도 까다롭기는 마찬가지다. 처음에 200℃에서 굴을 넣고 튀김옷을 재빨리 튀기고 굴에서 수분이 나오기 시작할 때 건져내야 겉은 파삭파삭하고 굴은 입안에서 녹을 듯이 부드러워진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몸으로 익힌 조리법이다.

    그의 요리하는 모습을 보면 대단한 정열이 저절로 느껴진다. 그는 조리사 학교에 입학했을 때 어린 동급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여든 살까지 열심히 하고 싶다. 여러분에게는 조리사 학교에서 공부하는 1년 동안의 시간이 지금부터 요리사로서 살아갈 40년간의 기초를 닦는 중요한 시기다. 나는 20년밖에 남지 않았다. 20년 가운데 1년을 소중히 하고 싶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젊은 사람들이 10년 걸리는 것을 자신은 가능한 한 단시간 내에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의 가게는 전 직장인 오사카고등법원에서 가깝다 보니 판사 등 동료 후배들이 많이 찾는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의 요리 솜씨에 이끌려 찾아오는 일반 손님이 훨씬 많다. 판사에서 요리사로 변신한 그의 전력이 알려지면서 전직을 희망하며 상담하러 오는 장년층 손님도 적지 않다.

    “얼마 전 사업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진 손님이 가게에 찾아왔습니다. 한참 얘기를 나누고는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며 돌아갔지요. 그 후 그의 가족들에게 감사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가 이곳에 다녀간 뒤 활력을 되찾아 새 일을 시작했다고요.”

    요리사가 되기 이전 판사로서의 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36년간의 판사생활에 후회는 없다”는 그는 오사카고등법원 내에서 인간적인 판사로 유명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피고인의 부모가 법정에 방청객으로 참석한 가운데 피고인에게 집행유예 선고를 내릴 때였다. 그가 재판 진행과 관계없이 갑자기 피고인에게 “지금까지 부모님에게 불효를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피고인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대답하자 그는 “부모님께 그런 각오를 다시 한번 말씀드리라”고 요구했다. 피고인과 부모는 서로 눈물을 흘리며 대화를 주고받았고 법정 내 다른 방청객들까지 감동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판결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는 것. 피고인이 도와달라고 호소하는데도 공소를 기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재판도 있었다. 판사 초년시절에는 중요한 판결을 내릴 때마다 복통으로 고생하기도 했다.

    “육체적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지금의 생활과 비교해 보면 판사 시절이 조금 더 여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판사 때보다는 요리사로서의 제2인생이 더욱 만족스럽습니다. 판결 때마다 겪는 심리적 고통도 없잖아요. 물론 가게를 운영하다 보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점도 있지만 역시 충실히 인생을 살고 있다는 느낌에 뿌듯하지요. 다만 앞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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