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가 끝난 들판이지만 가을 풍광이 여전히 넉넉한 경북 칠곡군 지천면 창평2리. 전형적 농촌 마을인 이곳에 주민들에게 ‘이상한 목수’라고 불리는 정재춘씨(42)가 살고 있다. 3년 전 이 마을에 들어온 그는 20여 년 간 흉가로 방치된 농막을 도심 카페처럼 통유리 집으로 개조하고, 밤마다 새벽까지 무언가를 뚝딱거리다 낮에는 잠을 잔다. 마을 사람들은 가끔 그의 집 안에 목재가 반입되는 것으로 미뤄 목수가 아닐까 짐작할 뿐 실제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사립문 앞에 멋스럽게 걸린 ‘함선 21’이라는 나무간판은 이 집 주인이 배와 관련된 어떤 일을 할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하게 할 뿐이다.
목재와 함선. 혹 그는 목선을 만드는 사람이 아닐까? 첨단문명 시대인 21세기에 ‘웬 나무배냐’는 의혹을 일단 접고 집부터 구경하기로 했다. 마을의 가장자리, 인적 드문 외딴 곳에 자리잡은 그의 집은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오직 적막함만 흐르고 있다. ‘솨아솨아’ 하는 대나무 잎의 마찰음만 숨막힐 듯한 정적을 깰 뿐 집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사립문을 열고 유리창 너머 그의 집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이게 웬일인가!
4만5000톤급 구축함과 항공모함의 16인치 함포가 ‘무슨 일로 왔느냐’는 듯 손님의 가슴을 겨냥한다. 함선의 갑판 위에는 금세라도 날아오를 듯한 아파치헬기와 시에어리어 등 각종 전투기와 토마호크 미사일 발사대도 보인다.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위해 지금도 걸프만에 떠 있는 전함 뉴저지호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다만 210분의 1로 축소된 모형이라는 점과 나무로 제작됐다는 점만 제외하면 실제 뉴저지호와 모든 외관이 똑같다.
이 집의 골방(작업실)에서 만난 정씨는 마을 사람들 말대로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돈 한푼 안 생기는 모형함선 제작에 매달려 빌딩 지하실과 시골집에 틀어박혀 20년을 보낸 그의 인생 이력을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세계에서 단 한 명뿐인 ‘함선 목공예가’다. 해군과 모형 제작업계, 마니아 세계에서는 ‘신의 경지’에 오른 모형 제작가로 통한다. ‘함선 목공예가’라는 직함은 자신이 붙인 것이지만, 그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4만여 종에 달하는 부속품을 모두 나무로 깎아 모형함선을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다. 쇠못 하나 쓰지 않고 0.1mm의 레이더망과 갑판줄도 실측 수치대로 면도칼로 나무를 깎아 만든다.
지난 1월 개설한 그의 홈페이지(http://hamsun21.hihome.com)에는 ‘경이롭다’ ‘놀랍다’는 네티즌과 모형 동호회 회원들의 찬사가 줄을 잇고 있다. 홈페이지를 개설한 후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모형함선 마니아들로 요즘 그의 작업실은 그리 외롭지 않다.
20년 동안 함선을 만들어 왔지만 현재 그가 소장한 모형함선은 뉴저지호,미주리호 등 미 해군 군함과 구소련 전함인 모스크바호, 노보로시스크호 등 모두 4척에 불과하다. 스스로 작품으로 인정하는 작품만 소장할 뿐 습작기간에 해당하는 80년대 작품들은 폐기 처분했거나 다른 사람의 손에 가 있다.
그가 ‘필생의 역작’이라고 생각하는 이 4척의 전함은 모두 150cm의 조그만 크기지만, 제작기간만 꼬박 10년 걸렸다. 군함 한 척당 20개월에서 길게는 26개월이 걸렸다. 함선 자체 부속품만 3만8000종에서 4만 종에 이른다. 70여 대에 이르는 탑재 헬기와 전투기에 들어간 부속품이 각각 200여 종이다. 거기에다 이 모든 부속품을 직접 대패와 조각칼, 면도칼로 제작했다고 생각하면 10년도 그리 긴 기간은 아닐 듯하다. 고작 1cm밖에 안 되는 스크루 하나를 만드는 데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4cm 미만의 닻을 만드는 데 또 하룻밤이 필요했다. 닻에 걸린 5mm의 쇠사슬 하나를 만들기 위해 대형 돋보기를 들이대고 온갖 정성을 쏟아부었다. 이 모두 한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한국사람에겐 손떨림을 제어할 수 있는 특별한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군함을 제작하다 보면 조선 목공예 명장들의 숨결과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실제 정씨의 작품을 보면 조선 목공예가들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진다. 함선 레이더 부분을 만드는 데는 탕건과 갓을 만드는 기술을, 함선 헬기 이착륙 시설에는 상감기법을 사용했다. 구명정과 소화전, 선체 수리용 도끼에 이르기까지 5mm 이하의 선체 부착물도 축소 비율 그대로 제작됐다.
이상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가 목재 모형군함 만들기를 고집하는 데는 목공예와 군함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깔려 있다. 지난 81년 해군 복무 당시 나무로 모형함선을 만들던 그는 그 길로 목재 모형함선에 혼을 빼앗겼다. 그는 “나무의 부드러운 질감, 그것을 소중하게 여겼던 선인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고, 군함의 정교함은 인간의 손재주가 가진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느끼게 한다”고 말한다. 목재 군함을 만들면서 조선시대 공예 명장과 대화하고, 군함을 만든 선진국의 과학기술에 도전하는 느낌이 든다는 것.
하지만 좋아서 하는 고생도 남모를 어려움은 있게 마련. 대팻날에 손이 베이고 손톱이 날아가는 것은 고생 축에도 끼지 못했다. 스승이 따로 없던 그는 자신의 기술에 한계를 느끼고 서른 살의 나이에 창원직업학교에 들어가기도 했다. 순전히 목재로 된 모형군함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89년 항공모함 노보로시스크호의 모형을 만들 때는 팔까지 부러졌다.
그러나 정작 그의 마음을 옥죄는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생활은 무시하고 모형함선에 미쳐 가족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사회적 비난이었다. 그의 말대로 대패와 끌만 가지고 나가면 하루 10만 원은 벌 수 있는 베테랑 ‘대목수’이지만 틈틈이 벌어들인 목수 수입마저 모두 모형함선의 재료와 연장, 함선에 대한 자료를 구입하는 데 썼다.
“식구들에게 미안하지 않다면 정말 미친 사람이죠. 언젠가는 남편과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 줄 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미안함도 그의 모형함선에 대한 열의를 꺾지는 못했다. 모형함선 한 척당 3400만 원에 사겠다는 해군의 제의도, 국내외 조선소와 대형 모형 제작사의 스카우트 제의도 모두 거절했다. 자식과 같은 자신의 작품을 파는 것은 혼을 파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시에 따라 상업적으로 만들다 보면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역시 자료 부족이다. 모형함선 한 척을 만들기 위해 미국 일본 등을 헤맸으나 제대로 된 자료를 얻기가 너무 힘들었다. 구소련의 민스크호가 고철로 국내에 수입된 지난 97년, 그는 뉴스를 듣다가 곧바로 진주항으로 달려가 비디오 촬영을 했다.
이런 그의 노력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해군만은 인정해 줬다. 이 4척의 배는 해군 참모총장배 모형함선 경연대회에서 모두 최고상(금상)을 수상했다. 정씨가 작품을 내면 그해 금상은 무조건 그의 차지가 된다. 대적할 상대가 있을 수 없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자만하지 않고 지금도 미군의 상륙 강습함 WASP호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다.
“이제 작업을 위해 명상에 들어가야 할 시간입니다. 그만 가주시죠. 더 할말도 없고….”
3시간 남짓한 만남이었지만 그의 언행에서 조선 목공예 명장의 의젓함과 기개를 느낄 수 있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요즘 그가 그보다 나이 많은 제자와 함께 고려시대 한선(韓船)모형 복원작업을 새롭게 시작한 까닭도 피를 타고 흐르는 조선 명장의 맥이 그에게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함선 21’ 작업실을 나섰다.
목재와 함선. 혹 그는 목선을 만드는 사람이 아닐까? 첨단문명 시대인 21세기에 ‘웬 나무배냐’는 의혹을 일단 접고 집부터 구경하기로 했다. 마을의 가장자리, 인적 드문 외딴 곳에 자리잡은 그의 집은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오직 적막함만 흐르고 있다. ‘솨아솨아’ 하는 대나무 잎의 마찰음만 숨막힐 듯한 정적을 깰 뿐 집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사립문을 열고 유리창 너머 그의 집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이게 웬일인가!
4만5000톤급 구축함과 항공모함의 16인치 함포가 ‘무슨 일로 왔느냐’는 듯 손님의 가슴을 겨냥한다. 함선의 갑판 위에는 금세라도 날아오를 듯한 아파치헬기와 시에어리어 등 각종 전투기와 토마호크 미사일 발사대도 보인다.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위해 지금도 걸프만에 떠 있는 전함 뉴저지호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다만 210분의 1로 축소된 모형이라는 점과 나무로 제작됐다는 점만 제외하면 실제 뉴저지호와 모든 외관이 똑같다.
이 집의 골방(작업실)에서 만난 정씨는 마을 사람들 말대로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돈 한푼 안 생기는 모형함선 제작에 매달려 빌딩 지하실과 시골집에 틀어박혀 20년을 보낸 그의 인생 이력을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세계에서 단 한 명뿐인 ‘함선 목공예가’다. 해군과 모형 제작업계, 마니아 세계에서는 ‘신의 경지’에 오른 모형 제작가로 통한다. ‘함선 목공예가’라는 직함은 자신이 붙인 것이지만, 그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4만여 종에 달하는 부속품을 모두 나무로 깎아 모형함선을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다. 쇠못 하나 쓰지 않고 0.1mm의 레이더망과 갑판줄도 실측 수치대로 면도칼로 나무를 깎아 만든다.
지난 1월 개설한 그의 홈페이지(http://hamsun21.hihome.com)에는 ‘경이롭다’ ‘놀랍다’는 네티즌과 모형 동호회 회원들의 찬사가 줄을 잇고 있다. 홈페이지를 개설한 후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모형함선 마니아들로 요즘 그의 작업실은 그리 외롭지 않다.
20년 동안 함선을 만들어 왔지만 현재 그가 소장한 모형함선은 뉴저지호,미주리호 등 미 해군 군함과 구소련 전함인 모스크바호, 노보로시스크호 등 모두 4척에 불과하다. 스스로 작품으로 인정하는 작품만 소장할 뿐 습작기간에 해당하는 80년대 작품들은 폐기 처분했거나 다른 사람의 손에 가 있다.
그가 ‘필생의 역작’이라고 생각하는 이 4척의 전함은 모두 150cm의 조그만 크기지만, 제작기간만 꼬박 10년 걸렸다. 군함 한 척당 20개월에서 길게는 26개월이 걸렸다. 함선 자체 부속품만 3만8000종에서 4만 종에 이른다. 70여 대에 이르는 탑재 헬기와 전투기에 들어간 부속품이 각각 200여 종이다. 거기에다 이 모든 부속품을 직접 대패와 조각칼, 면도칼로 제작했다고 생각하면 10년도 그리 긴 기간은 아닐 듯하다. 고작 1cm밖에 안 되는 스크루 하나를 만드는 데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4cm 미만의 닻을 만드는 데 또 하룻밤이 필요했다. 닻에 걸린 5mm의 쇠사슬 하나를 만들기 위해 대형 돋보기를 들이대고 온갖 정성을 쏟아부었다. 이 모두 한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한국사람에겐 손떨림을 제어할 수 있는 특별한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군함을 제작하다 보면 조선 목공예 명장들의 숨결과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실제 정씨의 작품을 보면 조선 목공예가들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진다. 함선 레이더 부분을 만드는 데는 탕건과 갓을 만드는 기술을, 함선 헬기 이착륙 시설에는 상감기법을 사용했다. 구명정과 소화전, 선체 수리용 도끼에 이르기까지 5mm 이하의 선체 부착물도 축소 비율 그대로 제작됐다.
이상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가 목재 모형군함 만들기를 고집하는 데는 목공예와 군함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깔려 있다. 지난 81년 해군 복무 당시 나무로 모형함선을 만들던 그는 그 길로 목재 모형함선에 혼을 빼앗겼다. 그는 “나무의 부드러운 질감, 그것을 소중하게 여겼던 선인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고, 군함의 정교함은 인간의 손재주가 가진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느끼게 한다”고 말한다. 목재 군함을 만들면서 조선시대 공예 명장과 대화하고, 군함을 만든 선진국의 과학기술에 도전하는 느낌이 든다는 것.
하지만 좋아서 하는 고생도 남모를 어려움은 있게 마련. 대팻날에 손이 베이고 손톱이 날아가는 것은 고생 축에도 끼지 못했다. 스승이 따로 없던 그는 자신의 기술에 한계를 느끼고 서른 살의 나이에 창원직업학교에 들어가기도 했다. 순전히 목재로 된 모형군함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89년 항공모함 노보로시스크호의 모형을 만들 때는 팔까지 부러졌다.
그러나 정작 그의 마음을 옥죄는 것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생활은 무시하고 모형함선에 미쳐 가족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사회적 비난이었다. 그의 말대로 대패와 끌만 가지고 나가면 하루 10만 원은 벌 수 있는 베테랑 ‘대목수’이지만 틈틈이 벌어들인 목수 수입마저 모두 모형함선의 재료와 연장, 함선에 대한 자료를 구입하는 데 썼다.
“식구들에게 미안하지 않다면 정말 미친 사람이죠. 언젠가는 남편과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 줄 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미안함도 그의 모형함선에 대한 열의를 꺾지는 못했다. 모형함선 한 척당 3400만 원에 사겠다는 해군의 제의도, 국내외 조선소와 대형 모형 제작사의 스카우트 제의도 모두 거절했다. 자식과 같은 자신의 작품을 파는 것은 혼을 파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시에 따라 상업적으로 만들다 보면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역시 자료 부족이다. 모형함선 한 척을 만들기 위해 미국 일본 등을 헤맸으나 제대로 된 자료를 얻기가 너무 힘들었다. 구소련의 민스크호가 고철로 국내에 수입된 지난 97년, 그는 뉴스를 듣다가 곧바로 진주항으로 달려가 비디오 촬영을 했다.
이런 그의 노력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해군만은 인정해 줬다. 이 4척의 배는 해군 참모총장배 모형함선 경연대회에서 모두 최고상(금상)을 수상했다. 정씨가 작품을 내면 그해 금상은 무조건 그의 차지가 된다. 대적할 상대가 있을 수 없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자만하지 않고 지금도 미군의 상륙 강습함 WASP호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다.
“이제 작업을 위해 명상에 들어가야 할 시간입니다. 그만 가주시죠. 더 할말도 없고….”
3시간 남짓한 만남이었지만 그의 언행에서 조선 목공예 명장의 의젓함과 기개를 느낄 수 있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요즘 그가 그보다 나이 많은 제자와 함께 고려시대 한선(韓船)모형 복원작업을 새롭게 시작한 까닭도 피를 타고 흐르는 조선 명장의 맥이 그에게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함선 21’ 작업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