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 투르(Grand Tour). 말 그대로 큰 여행이라는 뜻의 이 말은 18세기 후반에 생겨났다. 유복한 집안의 젊은이가 유럽 전체를 돌아보며 그곳의 자연과 자신들의 문화적 뿌리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의미였다고 한다(‘웬디 수녀의 ‘유럽미술산책’에서). 그랑 투르에는 여행의 교육적 목적을 위해 가정교사나 학자가 동반했고 젊은이들은 아테네, 로마와 같은 주요 도시에서 아예 몇 년씩 머무르며 ‘문화학습’을 했다.
불행하게도 현대인들에게 이런 느긋한 여행은 허용되지 않는다. 시간이 충분하다 해도 가정교사까지 대동한 학습여행은 언감생심이다. 대신 ‘웬디 수녀의 유럽미술 산책’과 같은 책들이 우리에게 아쉬우나마 ‘그랑 투르’를 체험케 해준다. BBC방송의 TV 시리즈 ‘웬디 수녀의 모험’ ‘웬디 수녀와 함께 떠나는 미술 여행’(국내에도 소개됐음)으로 유명해진 웬디 베케트 수녀는 이 책에서 유럽의 대표적인 미술도시 11곳을 찾아간다. 그리고 여행자라면 꼭 한번 들러보게 되는 주요 미술관의 작품을 중심으로 자신의 안목을 덧붙여 감상을 유도한다.
첫번째 여행지는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때문이다. 레이나 소피아에 전시돼 있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대해 웬디 수녀는 “전쟁의 사악함을 훌륭하게 보여주는 작품인지 모르지만, 감정적으로 진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할 만큼 솔직하다. 웬디 수녀의 안내를 받으며 마드리드에서 벨라스케스, 무리요, 고야를 만나고 피렌체로 건너가 도나텔로, 알로리, 젠틸레스키, 보티첼리의 작품을 본다. 이 책은 여행이라는 형식을 빌린 미술입문서로, 전문용어 없이도 얼마든지 작품을 감상하고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종희 교수(한양여대 일러스트레이션학)의 ‘명화로 읽는 성서’는 서양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화(聖畵)의 세계를 소개한다. 주제 선택이 6개월 전 출간된 노성두씨의 ‘천국을 훔친 화가들’(사계절 펴냄)과 유사해 두 저자의 시각차를 비교해 보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이다. 또 저자는 경건과 불경 사이를 넘나드는 화가들의 아슬아슬한 곡예를 읽어낸다. 티치아노와 틴토레토의 그림을 보면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나 정숙한 수산나가 어느새 풍만한 육체의 에로틱한 여인으로 둔갑해 있다. 세속문화가 절정에 달한 르네상스 시대에 성화조차도 에로티시즘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됐던 것이다.
또 예수가 죽은 뒤 그리스도교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성화 화가들의 고민은 도대체 예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기 미술가들은 그리스의 신 아폴론을 모델로 삼았다. 전지전능한 태양의 신이자 아름다운 외모로 표현되던 아폴론은 ‘진정한 태양’인 예수의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예수 이미지는 6세기 이후에나 등장했다고 한다. 저자는 그리스도교 미술이 피어난 고대 로마시대 지하묘지 프레스코화에서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성화에 나타난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짚어준다.
서양미술의 화려한 도판에 눈이 어지러웠다면 다음은 우리 풍속화의 세계로 가보자. 김현주 교수(경희대 국문)의 ‘판소리와 풍속화 그 닮은 예술 세계’는 언어예술과 시각예술 간의 유사성을 찾아가는 뜻깊은 작업의 산물이다. 특히 국문학자가 조선 후기 회화를 연구 대상으로 끌어들였다는 것부터가 발상의 전환이다.
김교수는 우선 판소리와 풍속화가 17세기 말~18세기 초 조선사회 전환기에 등장한 신흥 문예장르로 탄생 배경이 비슷하다는 점을 꼽는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와 ‘춘향전’의 내용을 비교하면서, ‘춘향전’의 내용을 직접 소재로 삼아 그린 그림이 아니라 해도 늙수그레한 노파가 어린 기생과 총각의 연을 맺어주는 그림은, 상상력의 차원에서 상당한 동질성을 띤다고 말한다. 또 예술장르로서 판소리와 풍속화의 내부구조를 뜯어보면 다층적 시점, 유형화된 표현들의 반복 사용, 클로즈업 기법을 통한 세밀 묘사, 대사의 희화적 표현이나 성적 대상에 대한 진솔한 표현이 판소리 사설과 유사하다고 했다.
언어가 지닌 회화성에 주목해 판소리와 풍속화를 연결했다는 점에서 ‘판소리와 풍속화, 그 닮은 예술세계’는 우리의 안목을 넓혀준 소중한 연구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세 권의 책으로 앉은자리에서 몇 년 치 ‘그랑 투르’를 한 셈이다.
웬디 수녀의 유럽미술산책/ 웬디 베케트 지음/ 김현우 옮김/ 예담 펴냄/ 240쪽/ 1만6500원
명화로 읽는 성서/ 고종희 지음/ 한길아트 펴냄/ 296쪽/ 2만5000원
판소리와 풍속화, 그 닮은 예술세계/ 김현주 지음/ 효형출판 펴냄/ 288쪽/ 1만3000원
불행하게도 현대인들에게 이런 느긋한 여행은 허용되지 않는다. 시간이 충분하다 해도 가정교사까지 대동한 학습여행은 언감생심이다. 대신 ‘웬디 수녀의 유럽미술 산책’과 같은 책들이 우리에게 아쉬우나마 ‘그랑 투르’를 체험케 해준다. BBC방송의 TV 시리즈 ‘웬디 수녀의 모험’ ‘웬디 수녀와 함께 떠나는 미술 여행’(국내에도 소개됐음)으로 유명해진 웬디 베케트 수녀는 이 책에서 유럽의 대표적인 미술도시 11곳을 찾아간다. 그리고 여행자라면 꼭 한번 들러보게 되는 주요 미술관의 작품을 중심으로 자신의 안목을 덧붙여 감상을 유도한다.
첫번째 여행지는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때문이다. 레이나 소피아에 전시돼 있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대해 웬디 수녀는 “전쟁의 사악함을 훌륭하게 보여주는 작품인지 모르지만, 감정적으로 진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할 만큼 솔직하다. 웬디 수녀의 안내를 받으며 마드리드에서 벨라스케스, 무리요, 고야를 만나고 피렌체로 건너가 도나텔로, 알로리, 젠틸레스키, 보티첼리의 작품을 본다. 이 책은 여행이라는 형식을 빌린 미술입문서로, 전문용어 없이도 얼마든지 작품을 감상하고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종희 교수(한양여대 일러스트레이션학)의 ‘명화로 읽는 성서’는 서양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화(聖畵)의 세계를 소개한다. 주제 선택이 6개월 전 출간된 노성두씨의 ‘천국을 훔친 화가들’(사계절 펴냄)과 유사해 두 저자의 시각차를 비교해 보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이다. 또 저자는 경건과 불경 사이를 넘나드는 화가들의 아슬아슬한 곡예를 읽어낸다. 티치아노와 틴토레토의 그림을 보면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나 정숙한 수산나가 어느새 풍만한 육체의 에로틱한 여인으로 둔갑해 있다. 세속문화가 절정에 달한 르네상스 시대에 성화조차도 에로티시즘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됐던 것이다.
또 예수가 죽은 뒤 그리스도교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성화 화가들의 고민은 도대체 예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기 미술가들은 그리스의 신 아폴론을 모델로 삼았다. 전지전능한 태양의 신이자 아름다운 외모로 표현되던 아폴론은 ‘진정한 태양’인 예수의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예수 이미지는 6세기 이후에나 등장했다고 한다. 저자는 그리스도교 미술이 피어난 고대 로마시대 지하묘지 프레스코화에서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성화에 나타난 서양미술사의 흐름을 짚어준다.
서양미술의 화려한 도판에 눈이 어지러웠다면 다음은 우리 풍속화의 세계로 가보자. 김현주 교수(경희대 국문)의 ‘판소리와 풍속화 그 닮은 예술 세계’는 언어예술과 시각예술 간의 유사성을 찾아가는 뜻깊은 작업의 산물이다. 특히 국문학자가 조선 후기 회화를 연구 대상으로 끌어들였다는 것부터가 발상의 전환이다.
김교수는 우선 판소리와 풍속화가 17세기 말~18세기 초 조선사회 전환기에 등장한 신흥 문예장르로 탄생 배경이 비슷하다는 점을 꼽는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와 ‘춘향전’의 내용을 비교하면서, ‘춘향전’의 내용을 직접 소재로 삼아 그린 그림이 아니라 해도 늙수그레한 노파가 어린 기생과 총각의 연을 맺어주는 그림은, 상상력의 차원에서 상당한 동질성을 띤다고 말한다. 또 예술장르로서 판소리와 풍속화의 내부구조를 뜯어보면 다층적 시점, 유형화된 표현들의 반복 사용, 클로즈업 기법을 통한 세밀 묘사, 대사의 희화적 표현이나 성적 대상에 대한 진솔한 표현이 판소리 사설과 유사하다고 했다.
언어가 지닌 회화성에 주목해 판소리와 풍속화를 연결했다는 점에서 ‘판소리와 풍속화, 그 닮은 예술세계’는 우리의 안목을 넓혀준 소중한 연구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세 권의 책으로 앉은자리에서 몇 년 치 ‘그랑 투르’를 한 셈이다.
웬디 수녀의 유럽미술산책/ 웬디 베케트 지음/ 김현우 옮김/ 예담 펴냄/ 240쪽/ 1만6500원
명화로 읽는 성서/ 고종희 지음/ 한길아트 펴냄/ 296쪽/ 2만5000원
판소리와 풍속화, 그 닮은 예술세계/ 김현주 지음/ 효형출판 펴냄/ 288쪽/ 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