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기본적으로 군사정책이다. 겉보기에 ‘외교’의 영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제 이 외교의 목표를 설정하고 외교의 방향을 좌우하는 것은 군사 정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한반도를 움직이는 전통적인 힘의 원천은 미 국무부라기보다는 국방부, 즉 펜타곤이었고 지금도 이 도식은 변하지 않았다. 판문점 미루나무 절단 사건과 12·12사건 때 미 군부가 보여준 움직임은 펜타곤의 힘을 보여준 사례다.
1970년대 말에 처음 작전이 입안돼 1980년 4월 작전 수행 직전 연기되고 만 미국의 한반도 군사분계선 표식판 보수 작전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1953년 한국전 정전 이후 군사분계선의 표식판은 단 한차례도 보수된 적이 없었다. 대부분이 나무 푯말로 되어 있고 일부가 콘크리트나 철제 표식이었다. 1970년대 말, 주한 유엔사령관 베시는 이 군사분계선 표식판 일부를 보수할 계획을 세운다. 부식되어 인식하기 힘들거나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표식판을 고치거나 새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일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군사적-정치적인 의미는 클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고, 일의 성격상 기본적으로 군사작전이 아니면 안 되었다. 1980년 미 국방부에서 작성돼 백악관으로 보고된 9장짜리 1급 비밀(Top Secret) 문서에는 두 장의 표식판 사진과 함께 보수 작전의 세부 사항이 실려 있다.
유엔사령부와 미8군은 군사분계선에서 4개의 장소를 선택했다. 장소 선택의 기준은 세 가지. 표식 설치 현장에 미군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 유엔사 병력이 부근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언제든 지원해줄 수 있는 곳, 북한군이 쉽게 관찰할 수 없는 곳이었다. 다음은 국방부 1급 비밀문서에 기술해놓은 보수 작전의 세부 계획이다.
‘각 지점마다 3개의 표식을 보수함. 각 표식은 2개의 표지판으로 된 콘크리트, 철제, 목제 말뚝으로 구성되며 표지판 1개는 비무장 지대의 남한 쪽을 향하도록 하고, 또 1개의 표지판은 북한 쪽을 향하게 함. 4개 지점 가운데 한 지점이 1차 보수를 위한 지점으로 유엔사와 미군 사령부에 의해 선택될 것임. 선택된 지점에 대해 북한이 전투 태세 및 공격 준비 태세를 갖추는 징후가 있는지 면밀히 주시해야 할 것임.’
작업반은 9명 이하의 인원으로 구성하도록 했다. 미군 3명, 한국군 3명, 군사정전위원회 인원 2명, 유엔사 고문단(UNC Advisory Group)에서 원할 경우 고문단 자원자 옵서버 1명도 포함시키기로 했다.
‘정전협정에 의거, 작업반원은 완장을 두르고 차량에는 작업반임을 표시하는 깃발을 부착함. 사진기 녹음기 확성기 등은 지참할 수 없음. 자동화기 무장을 하지 않은 최대한 4명의 비무장지대 경찰을 작업반 호위 병력으로 동반할 수 있음.
작업반은 보수 작전뿐 아니라, 작업반이 공격을 받거나 피격될 경우에 대비한 대응조치의 사전 예행연습을 완벽하게 실시함.
공동 취재단은 15~25명의 지원자로 구성하며, 북한이 관찰할 수 있는 위치이되 작업 현장에서 떨어져 있는 곳에서 작업을 관찰하게 될 것임.’
3개항으로 되어 있는 이 극비 문서의 3번항은 보수 작전의 ‘시나리오’에 대해 기술해놓고 있다. 군사 작전 문서의 대부분이 그렇듯 작전 수행을 위한 법적-행정적 절차 및 과정, 군사 행동 과정 등 고려 사항이 모두 이 시나리오에 포함되어 있다.
‘시나리오:
a. 유엔사는 보수 작업이 실시되기 최소 1주일 전에 최초의 표식 보수 작업에 대한 일반적인 계획을 군사정전위원회에 통보함. 4개 후보 지역의 정확한 위치는 공산국 대표들에게는 알리지 않을 것임.
군사정전위원회에 통보하는 날짜는 유엔사와 미 사령부가 선택하며, 역시 유엔사와 미 사령부가 정전위 회담에 앞서 미국 및 한국 관계자 모두에게 통보할 것임.
b. 조선인민군 및 중국군 대표단의 반응은 정전위 회담 24 시간 이내에 합참의장과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될 것임. (중략)
d. 날씨, 시계 및 기타 요인을 감안해 보수 작업 날짜는 유엔사와 미 사령부가 결정할 것임. 4개 지점에 대해서는 정전위 통보 후 보수 작업이 실시될 때까지 면밀히 관찰해야 함.
e. 유엔사령관의 작전 수행 24시간 전에 (1)보수 작업이 수행될 지점 (2)북한군 동향에 대한 유엔사령관의 평가 (3)보수 작업 시간표 (4)최종 작업 완료를 위한 지원 요청 등이 합참의장을 경유해 국방장관에게 통보될 것임. (중략)
h. 유엔사령관은 최초 작업 직후 전체 작전을 평가한 다음, 후속 보수 작업 실시 여부 및 시간을 합참의장을 경유해 국방장관에게 건의함. 나머지 3개 지점에 대한 후속 작업은 유엔사령관의 건의와 국방장관의 승인에 따라 결정될 것임.
j. 보수 작업이 만족스럽고 국방장관의 승인을 얻을 경우 후속 작업은 최초 작업지에서 작업이 완료된 후로부터 7일 이내, 후속 작업 예정일 1주일 내에 군사정전위에 통보될 것임.’
1978년 12월 국방부 차관보실에서 작성해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에게 올린 3장짜리 비망록은 이 작전이 처음에 어떤 과정을 거쳐 수립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문서다.
‘표식판 보수’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 1급 비밀문서에는 초기 단계에 군사 작전을 수립하는 펜타곤 관리들이 워싱턴의 고위 정책결정자들을 움직이는 ‘정치 작전’ 수립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장관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잭 베시(Jack Vessey, 미 8군 사령관, 1976~79년) 장군이 파손된 군사분계선 표식판 보수 계획을 개시해야 한다고 제안했음. (중략) 합참의장과 와이스너 해군 제독, 글라이스틴 주한 대사가 베시 장군의 제안에 동의했음. 국무부 스태프와 비공식적인 토론이 있긴 했지만, 국무부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와는 공식적인 접촉이 없었음. 장관께서 작전을 수행하는 쪽으로 결심하실 경우 다음 단계로 부처간에 공식적인 검토가 이루어질 것임.’
이 문서에 따르면 브라운 국방장관은 1978년 6월 이미 이 작전 계획을 승인한 상태였다. 같은 해 11월말 합참은 일부 작전 계획의 세부 사항을 수정했고, 남은 단계는 국무부와 백악관 스태프들의 검토 작업이었다.
작전 자체가 소규모이긴 했지만, 미 군부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든 것은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북한군의 무력 반응 가능성이었다. 국방부 차관보실의 보고서는 국방부 정보국(DIA)의 상황 평가 내용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수년 전 북한이 두 차례나 적대적인 반응을 했던 것처럼 이번 작전 수행에도 그런 위험이 뒤따르고 있으나, DIA는 수년 전과는 정치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위험은 현저하게 줄어든 것으로 보고 있음.’
작전 수행 현장을 언론에 공개할 것인지의 여부도 검토 대상이었다.
‘작전 계획에서 언급되었듯이 보수 현장을 언론에 공개할 것인지도 별도로 검토해보아야 함. 일부는 언론에 공개하지 않는 것이 위험부담을 줄이는 것이라고 하는 한편, 베시 장군은 취재단을 초청해 현장을 공개할 경우 북한의 난폭한 반응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음.’
작전의 동기와 과정에 아무 문제가 없다, 수행하자는 것이 이 비망록이 내린 결론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작전의 목적이 위험을 정당화하느냐는 것임. 본인은 그렇다고 확신함. 작전 수행 일시를 결정하는 것이 남아 있는 문제임.’
그러나 78년 말에 수립된 이 군사분계선 표식 보수 작업은 수행되지 못한 채 3년을 끌어오다가 1980년 4월 최종 작전 날짜까지 잡혔으나 끝내 연기되고 말았다. 등소평의 방미, 북한 전투서열 보고서 발표, 남북 대화 등 정치-군사적 배경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1970년대 말에 처음 작전이 입안돼 1980년 4월 작전 수행 직전 연기되고 만 미국의 한반도 군사분계선 표식판 보수 작전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1953년 한국전 정전 이후 군사분계선의 표식판은 단 한차례도 보수된 적이 없었다. 대부분이 나무 푯말로 되어 있고 일부가 콘크리트나 철제 표식이었다. 1970년대 말, 주한 유엔사령관 베시는 이 군사분계선 표식판 일부를 보수할 계획을 세운다. 부식되어 인식하기 힘들거나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표식판을 고치거나 새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일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군사적-정치적인 의미는 클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고, 일의 성격상 기본적으로 군사작전이 아니면 안 되었다. 1980년 미 국방부에서 작성돼 백악관으로 보고된 9장짜리 1급 비밀(Top Secret) 문서에는 두 장의 표식판 사진과 함께 보수 작전의 세부 사항이 실려 있다.
유엔사령부와 미8군은 군사분계선에서 4개의 장소를 선택했다. 장소 선택의 기준은 세 가지. 표식 설치 현장에 미군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 유엔사 병력이 부근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언제든 지원해줄 수 있는 곳, 북한군이 쉽게 관찰할 수 없는 곳이었다. 다음은 국방부 1급 비밀문서에 기술해놓은 보수 작전의 세부 계획이다.
‘각 지점마다 3개의 표식을 보수함. 각 표식은 2개의 표지판으로 된 콘크리트, 철제, 목제 말뚝으로 구성되며 표지판 1개는 비무장 지대의 남한 쪽을 향하도록 하고, 또 1개의 표지판은 북한 쪽을 향하게 함. 4개 지점 가운데 한 지점이 1차 보수를 위한 지점으로 유엔사와 미군 사령부에 의해 선택될 것임. 선택된 지점에 대해 북한이 전투 태세 및 공격 준비 태세를 갖추는 징후가 있는지 면밀히 주시해야 할 것임.’
작업반은 9명 이하의 인원으로 구성하도록 했다. 미군 3명, 한국군 3명, 군사정전위원회 인원 2명, 유엔사 고문단(UNC Advisory Group)에서 원할 경우 고문단 자원자 옵서버 1명도 포함시키기로 했다.
‘정전협정에 의거, 작업반원은 완장을 두르고 차량에는 작업반임을 표시하는 깃발을 부착함. 사진기 녹음기 확성기 등은 지참할 수 없음. 자동화기 무장을 하지 않은 최대한 4명의 비무장지대 경찰을 작업반 호위 병력으로 동반할 수 있음.
작업반은 보수 작전뿐 아니라, 작업반이 공격을 받거나 피격될 경우에 대비한 대응조치의 사전 예행연습을 완벽하게 실시함.
공동 취재단은 15~25명의 지원자로 구성하며, 북한이 관찰할 수 있는 위치이되 작업 현장에서 떨어져 있는 곳에서 작업을 관찰하게 될 것임.’
3개항으로 되어 있는 이 극비 문서의 3번항은 보수 작전의 ‘시나리오’에 대해 기술해놓고 있다. 군사 작전 문서의 대부분이 그렇듯 작전 수행을 위한 법적-행정적 절차 및 과정, 군사 행동 과정 등 고려 사항이 모두 이 시나리오에 포함되어 있다.
‘시나리오:
a. 유엔사는 보수 작업이 실시되기 최소 1주일 전에 최초의 표식 보수 작업에 대한 일반적인 계획을 군사정전위원회에 통보함. 4개 후보 지역의 정확한 위치는 공산국 대표들에게는 알리지 않을 것임.
군사정전위원회에 통보하는 날짜는 유엔사와 미 사령부가 선택하며, 역시 유엔사와 미 사령부가 정전위 회담에 앞서 미국 및 한국 관계자 모두에게 통보할 것임.
b. 조선인민군 및 중국군 대표단의 반응은 정전위 회담 24 시간 이내에 합참의장과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될 것임. (중략)
d. 날씨, 시계 및 기타 요인을 감안해 보수 작업 날짜는 유엔사와 미 사령부가 결정할 것임. 4개 지점에 대해서는 정전위 통보 후 보수 작업이 실시될 때까지 면밀히 관찰해야 함.
e. 유엔사령관의 작전 수행 24시간 전에 (1)보수 작업이 수행될 지점 (2)북한군 동향에 대한 유엔사령관의 평가 (3)보수 작업 시간표 (4)최종 작업 완료를 위한 지원 요청 등이 합참의장을 경유해 국방장관에게 통보될 것임. (중략)
h. 유엔사령관은 최초 작업 직후 전체 작전을 평가한 다음, 후속 보수 작업 실시 여부 및 시간을 합참의장을 경유해 국방장관에게 건의함. 나머지 3개 지점에 대한 후속 작업은 유엔사령관의 건의와 국방장관의 승인에 따라 결정될 것임.
j. 보수 작업이 만족스럽고 국방장관의 승인을 얻을 경우 후속 작업은 최초 작업지에서 작업이 완료된 후로부터 7일 이내, 후속 작업 예정일 1주일 내에 군사정전위에 통보될 것임.’
1978년 12월 국방부 차관보실에서 작성해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에게 올린 3장짜리 비망록은 이 작전이 처음에 어떤 과정을 거쳐 수립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문서다.
‘표식판 보수’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 1급 비밀문서에는 초기 단계에 군사 작전을 수립하는 펜타곤 관리들이 워싱턴의 고위 정책결정자들을 움직이는 ‘정치 작전’ 수립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장관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잭 베시(Jack Vessey, 미 8군 사령관, 1976~79년) 장군이 파손된 군사분계선 표식판 보수 계획을 개시해야 한다고 제안했음. (중략) 합참의장과 와이스너 해군 제독, 글라이스틴 주한 대사가 베시 장군의 제안에 동의했음. 국무부 스태프와 비공식적인 토론이 있긴 했지만, 국무부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와는 공식적인 접촉이 없었음. 장관께서 작전을 수행하는 쪽으로 결심하실 경우 다음 단계로 부처간에 공식적인 검토가 이루어질 것임.’
이 문서에 따르면 브라운 국방장관은 1978년 6월 이미 이 작전 계획을 승인한 상태였다. 같은 해 11월말 합참은 일부 작전 계획의 세부 사항을 수정했고, 남은 단계는 국무부와 백악관 스태프들의 검토 작업이었다.
작전 자체가 소규모이긴 했지만, 미 군부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든 것은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북한군의 무력 반응 가능성이었다. 국방부 차관보실의 보고서는 국방부 정보국(DIA)의 상황 평가 내용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수년 전 북한이 두 차례나 적대적인 반응을 했던 것처럼 이번 작전 수행에도 그런 위험이 뒤따르고 있으나, DIA는 수년 전과는 정치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위험은 현저하게 줄어든 것으로 보고 있음.’
작전 수행 현장을 언론에 공개할 것인지의 여부도 검토 대상이었다.
‘작전 계획에서 언급되었듯이 보수 현장을 언론에 공개할 것인지도 별도로 검토해보아야 함. 일부는 언론에 공개하지 않는 것이 위험부담을 줄이는 것이라고 하는 한편, 베시 장군은 취재단을 초청해 현장을 공개할 경우 북한의 난폭한 반응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음.’
작전의 동기와 과정에 아무 문제가 없다, 수행하자는 것이 이 비망록이 내린 결론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작전의 목적이 위험을 정당화하느냐는 것임. 본인은 그렇다고 확신함. 작전 수행 일시를 결정하는 것이 남아 있는 문제임.’
그러나 78년 말에 수립된 이 군사분계선 표식 보수 작업은 수행되지 못한 채 3년을 끌어오다가 1980년 4월 최종 작전 날짜까지 잡혔으나 끝내 연기되고 말았다. 등소평의 방미, 북한 전투서열 보고서 발표, 남북 대화 등 정치-군사적 배경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