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어느 날 청와대 모 비서관은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바이코리아 펀드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전국을 순회하며 주식투자 설명회를 하던 이회장이 설명회 때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기 때문에 한국의 주식시장은 살아날 것”이라고 강조한다는 얘기를 우연히 듣고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비서관은 이회장과 일면식도 없었고, 그 이후로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이회장은 이날 통화에서 대뜸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에서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호소했다. 당황한 이 비서관은 자칫 불필요한 오해를 부를 수 있다고 판단, “그런 문제는 그쪽과 잘 얘기하십시오”라고 정중히 말한 뒤 “그러나 대통령 관련 얘기는 계속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이회장은 흔쾌히 “염려 마시라”고 화답했다.
이날 통화는 이회장의 그 이후 행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때부터 이미 ‘문제 경영인’으로 주시하고 있던 재경부나 금감위와 언젠가는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고, ‘정치적 줄타기’로 이를 방어하는 이회장식 생존방식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 올해 들어 현대투신 부실문제가 불거지고 이회장이 정몽구 몽헌 형제간 경영권 갈등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의 퇴진문제가 거론됐을 때 그는 정치권을 등에 업고 ‘버티기’로 일관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런 이회장이 8월30일 자진사퇴 방침을 밝혔다. 현대증권은 9월4일 이사회를 열어 이회장의 사퇴서를 수리했다. 이로써 정부-채권단과 현대그룹 사이에 벌어졌던 ‘문제 경영진 퇴진 줄다리기’가 끝나게 됐다. 그러나 사퇴 표명 이틀 전까지만 해도 “사퇴 논의는 있을 수 없다”던 그의 갑작스런 사퇴 배경, 그리고 그가 앞으로 현대그룹 경영에 관여할지 여부 등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익치 회장 본인은 이에 대해 일절 함구하고 있다. 9월1일 서울지법 형사항소8부 심리로 열린 현대증권 주가조작 사건 항소심 첫 공판에 출석한 이회장은 기자들의 질문에 손사래를 치며 입을 굳게 닫았다. 이회장은 또 이날 재판정에 출두하고 빠져나갈 때 미리 나와 있던 현대증권 임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사진기자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금감위나 현대 주변에서는 이회장의 자진 사퇴를 ‘작전상 후퇴’로 보고 있다. 자진 사퇴 형식을 통해 정부의 강력한 퇴진 압박을 피하면서 현대 경영에 계속 관여할 수 있는 묘수를 선택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마침 현대 금융소그룹 외자유치 협상을 원만히 마무리함으로써 적어도 ‘실패 경영인’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됐다고 판단, ‘명예퇴진’ 형식을 빌렸다는 것.
그동안 정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회장이 버티기를 계속하자 현대 주변에서는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정치권에서는 이회장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일었고, 급기야 이회장이 자신의 ‘지원’을 받은 여권 실세들의 발목을 잡았다는 ‘이익치 리스트’ 소문으로까지 번졌다.
심지어 8월7일 개각을 앞두고는 이익치 회장이 여권 실세들을 만나 현대 문제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이헌재 재정경제부 장관과 이용근 금감위원장 교체를 강력히 건의했다는 소문까지 흘러나왔다. 공교롭게도 8·7 개각에서 이헌재 장관과 이용근 위원장이 물러나 이런 소문이 증폭되기도 했다. 또 이위원장이 물러나는 자리에서 “재벌의 힘이 이렇게 강한 줄은 몰랐다”고 말한 것도 묘한 여운을 남겼다.
현대 관계자들은 이익치 리스트 소문에 대해 “터무니없는 낭설”이라고 일축한다. 여권 관계자들 역시 이익치 리스트는 정치적 의도로 누군가 꾸며낸 얘기에 불과하다고 무시한다. 그러나 이들도 여권 일각에서 “대북사업을 주도하는 현대를 정부가 너무 몰아붙이면 곤란한 것 아닌가”라는 의견이 있었던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이익치 회장이 자진사퇴함으로써 ‘국민의 정부와 현대 유착설’도 수그러드는 등 여권으로서는 부담을 덜게 됐다.
이회장이 자진사퇴를 결심한 것은 정부의 압박을 돌이킬 수 없는 대세라고 판단한 때문으로 보인다. 9월 초에는 97년의 현대전자 편법 외자유치와 관련해 이회장의 징계 수위를 결정하는 금감위 산하 증권선물위원회(위원장 정건용 금감위 부위원장)가 열릴 예정이었다. 금감위 안팎에서는 이회장에 대한 징계는 해임권고라는 게 정설이었다.
현대가 유동성 문제를 완전히 극복하지 않은 상황에 이익치 회장을 계속 감싸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는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의 ‘인식’도 이회장 사퇴 결심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정회장은 이근영 금감위원장을 취임 직후 만나 이런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위원장이 “문제 경영인 퇴진은 현대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이라면서 “문제 경영진에는 이익치 회장도 포함된다”고 밝힌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그렇다고 정회장이 이익치 회장을 완전히 버린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게 현대 관계자들의 견해. 한 관계자는 “정회장을 ‘왕자’에서 ‘황태자’로 만들어준 게 누구인데 내칠 수 있겠는가”고 반문했다. 그러나 다른 관계자는 “이익치 회장이 주도한 올 5월의 왕회장(정주영 전 명예회장) 주식 이동을 근거로 국세청이 세금을 추징하자 왕회장이 이회장을 불러 크게 질책한 것으로 안다”면서 왕회장 신임이 예전만 못한 것 같다고 관측했다.
현대 주변에서는 이회장이 현대아산 이사직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점에서 앞으로 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북사업에 전념하는 게 아닌가 전망하고 있다. 현대증권 회장직만 물러날 뿐 실질적으로 현대 금융 소그룹 경영에 여전히 관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받고 있다. 그러나 현대 관계자는 “곧 이회장 스스로 입장 표명이 있을 것으로 안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힐 것으로 본다”고 예상했다.
현재로서 분명한 것은 금감원 고위 관계자의 말대로 이회장이 물러났다고 해서 현대그룹 지배구조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현대가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구노력과 함께 투명한 의사결정 구조 확립 등 내부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이회장은 이날 통화에서 대뜸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에서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호소했다. 당황한 이 비서관은 자칫 불필요한 오해를 부를 수 있다고 판단, “그런 문제는 그쪽과 잘 얘기하십시오”라고 정중히 말한 뒤 “그러나 대통령 관련 얘기는 계속 해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이회장은 흔쾌히 “염려 마시라”고 화답했다.
이날 통화는 이회장의 그 이후 행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때부터 이미 ‘문제 경영인’으로 주시하고 있던 재경부나 금감위와 언젠가는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고, ‘정치적 줄타기’로 이를 방어하는 이회장식 생존방식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 올해 들어 현대투신 부실문제가 불거지고 이회장이 정몽구 몽헌 형제간 경영권 갈등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의 퇴진문제가 거론됐을 때 그는 정치권을 등에 업고 ‘버티기’로 일관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런 이회장이 8월30일 자진사퇴 방침을 밝혔다. 현대증권은 9월4일 이사회를 열어 이회장의 사퇴서를 수리했다. 이로써 정부-채권단과 현대그룹 사이에 벌어졌던 ‘문제 경영진 퇴진 줄다리기’가 끝나게 됐다. 그러나 사퇴 표명 이틀 전까지만 해도 “사퇴 논의는 있을 수 없다”던 그의 갑작스런 사퇴 배경, 그리고 그가 앞으로 현대그룹 경영에 관여할지 여부 등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익치 회장 본인은 이에 대해 일절 함구하고 있다. 9월1일 서울지법 형사항소8부 심리로 열린 현대증권 주가조작 사건 항소심 첫 공판에 출석한 이회장은 기자들의 질문에 손사래를 치며 입을 굳게 닫았다. 이회장은 또 이날 재판정에 출두하고 빠져나갈 때 미리 나와 있던 현대증권 임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사진기자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금감위나 현대 주변에서는 이회장의 자진 사퇴를 ‘작전상 후퇴’로 보고 있다. 자진 사퇴 형식을 통해 정부의 강력한 퇴진 압박을 피하면서 현대 경영에 계속 관여할 수 있는 묘수를 선택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마침 현대 금융소그룹 외자유치 협상을 원만히 마무리함으로써 적어도 ‘실패 경영인’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됐다고 판단, ‘명예퇴진’ 형식을 빌렸다는 것.
그동안 정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회장이 버티기를 계속하자 현대 주변에서는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정치권에서는 이회장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일었고, 급기야 이회장이 자신의 ‘지원’을 받은 여권 실세들의 발목을 잡았다는 ‘이익치 리스트’ 소문으로까지 번졌다.
심지어 8월7일 개각을 앞두고는 이익치 회장이 여권 실세들을 만나 현대 문제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이헌재 재정경제부 장관과 이용근 금감위원장 교체를 강력히 건의했다는 소문까지 흘러나왔다. 공교롭게도 8·7 개각에서 이헌재 장관과 이용근 위원장이 물러나 이런 소문이 증폭되기도 했다. 또 이위원장이 물러나는 자리에서 “재벌의 힘이 이렇게 강한 줄은 몰랐다”고 말한 것도 묘한 여운을 남겼다.
현대 관계자들은 이익치 리스트 소문에 대해 “터무니없는 낭설”이라고 일축한다. 여권 관계자들 역시 이익치 리스트는 정치적 의도로 누군가 꾸며낸 얘기에 불과하다고 무시한다. 그러나 이들도 여권 일각에서 “대북사업을 주도하는 현대를 정부가 너무 몰아붙이면 곤란한 것 아닌가”라는 의견이 있었던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이익치 회장이 자진사퇴함으로써 ‘국민의 정부와 현대 유착설’도 수그러드는 등 여권으로서는 부담을 덜게 됐다.
이회장이 자진사퇴를 결심한 것은 정부의 압박을 돌이킬 수 없는 대세라고 판단한 때문으로 보인다. 9월 초에는 97년의 현대전자 편법 외자유치와 관련해 이회장의 징계 수위를 결정하는 금감위 산하 증권선물위원회(위원장 정건용 금감위 부위원장)가 열릴 예정이었다. 금감위 안팎에서는 이회장에 대한 징계는 해임권고라는 게 정설이었다.
현대가 유동성 문제를 완전히 극복하지 않은 상황에 이익치 회장을 계속 감싸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는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의 ‘인식’도 이회장 사퇴 결심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정회장은 이근영 금감위원장을 취임 직후 만나 이런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위원장이 “문제 경영인 퇴진은 현대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이라면서 “문제 경영진에는 이익치 회장도 포함된다”고 밝힌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그렇다고 정회장이 이익치 회장을 완전히 버린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게 현대 관계자들의 견해. 한 관계자는 “정회장을 ‘왕자’에서 ‘황태자’로 만들어준 게 누구인데 내칠 수 있겠는가”고 반문했다. 그러나 다른 관계자는 “이익치 회장이 주도한 올 5월의 왕회장(정주영 전 명예회장) 주식 이동을 근거로 국세청이 세금을 추징하자 왕회장이 이회장을 불러 크게 질책한 것으로 안다”면서 왕회장 신임이 예전만 못한 것 같다고 관측했다.
현대 주변에서는 이회장이 현대아산 이사직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점에서 앞으로 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북사업에 전념하는 게 아닌가 전망하고 있다. 현대증권 회장직만 물러날 뿐 실질적으로 현대 금융 소그룹 경영에 여전히 관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받고 있다. 그러나 현대 관계자는 “곧 이회장 스스로 입장 표명이 있을 것으로 안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힐 것으로 본다”고 예상했다.
현재로서 분명한 것은 금감원 고위 관계자의 말대로 이회장이 물러났다고 해서 현대그룹 지배구조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현대가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구노력과 함께 투명한 의사결정 구조 확립 등 내부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