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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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류' 는 예언자?

나오는 소설마다 현실의 실제상황 예측…한국 문단엔 시대 앞서가는 작가 없어

  • 입력2005-06-17 1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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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카미 류' 는 예언자?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1980년대 이후 일본 문단을 이끌어온 또 한 명의 무라카미. 무라카미 류(村上龍·48)는 일본 신세대 문학의 선두주자로 불리며 사형 전쟁 독재 섹스 마약 폭력 등 일본 사회의 병리현상을 주제로 한 수많은 작품을 썼다. 최근 일본에서 새삼 그의 주가가 높아진 것은 소설 속의 사건이 잇따라 현실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방송 뉴스보다 빠르고, 어떤 해설기사보다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본다.

    “요미우리 신문에 ‘인 더 미소 수프’를 연재하던 중, 정확히 프랭크가 가부키초의 펍(Pub)에서 대량 살육하는 부분을 연재할 때 고베에서 아주 참혹한 토막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연재의 끝 부분, 프랭크가 지금까지의 반생을 고백하려 할 때 14세 소년이 그 토막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됐다.”

    류는 97년 8월 ‘인 더 미소 수프’의 연재를 마친 후 한 인터뷰에서 소설의 상황과 실제 상황이 맞아떨어진 것에 대해 우울하고 불쾌한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사실 고베에서 연쇄 토막살인 사건이 터지자 신문사에는 당장 소설 연재를 중단하라는 항의 전화가 하루 100통도 넘게 걸려올 만큼 사람들은 소설과 현실 상황을 혼돈했다. 류의 말을 좀더 들어보자.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프랭크의 고백 장면에서는 상상력과 현실이 내 속에서 싸웠다. 현실은 상상력을 침식하려 했고, 상상력은 현실을 쓰러뜨리려고 했다. …개인의 정신은 말이 되지 않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 비명을 번역하는 것이 문학의 사명이라고 한다면 앞으로 상상력은 말할 것도 없이 새로운 시련에 부딪힌다. 나는 그 일이 우울하고 불쾌하다고 생각한다.”

    류는 ‘피어싱’이라는 작품 후기에서 ‘소설은 번역’이라고 했다. 즉 “말을 잃고 허덕이는 사람들의 외침과 속삭임을 번역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의 소설을 ‘예언’이라고 치켜올린다. 1976년 24세에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군조(群像) 신인문학상과 아쿠타가와상을 동시에 거머쥐며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 이래, 류는 줄곧 일본 사회를 앞질러 갔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난 유아 학대, 원조교제, 은둔, SM, 학생들의 부등교(不登校) 문제는 소설을 쓴 직후 혹은 거의 동시에 유사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지난 4월 출간된 소설 ‘공생충’(公生蟲)도 현실 사건과의 유사성 때문에 화제를 뿌렸다. 주인공은 은둔 소년 우에하라.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아파트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는 그에게 유일한 외부 통로는 인터넷이다. 그는 어린 시절 죽은 할아버지의 코에서 회색의 끈 같은 벌레가 나와 자신의 눈 속으로 들어오는 체험을 했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을 간직해 왔다. 유일하게 인터넷 사이트에 그 사실을 고백한 뒤 메시지가 날아든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살인-살육, 자살할 권리를 위임받은 자에게만 기숙하는 공생충이라는 벌레다.” 메시지를 읽은 소년은 곧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아파트를 나선다.

    실제 지난 5월 일본 열도를 경악케 한 17세 소년의 충동적인 고속버스 살인사건(15시간의 인질극 끝에 승객 1명 살해)은 ‘공생충’의 스토리 라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데서 충격적이었다.

    최근 시사주간지 ‘아에라’는 무라카미 류의 예언력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뤘다. 특히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그의 시대를 앞서보는 예언력의 원천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류는 “시대를 예측한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다만 알고 있는 것을 소설로 전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는 무섭도록 공부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아에라’는 2년 전 월드컵축구대회 관전기를 쓰기 위해 프랑스를 여행하던 류의 손에서 줄곧 떠나지 않은 책이 헤지펀드의 거물 조지 소로스 자서전이었다고 전한다. 이런 ‘공부’를 바탕으로 그는 올해 불황의 늪에 빠진 일본을 배경으로 한 경제소설 ‘희망의 나라의 엑소더스’를 썼다.

    87년 다국적 기업의 초국가적 권력 문제를 다룬 ‘사랑과 환상의 파시즘’을 집필할 때 그는 100권이 넘는 경제서를 탐독하고 수많은 경제계 관계자와 인터뷰를 했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지배, 대자본의 주가조작 등을 누구보다 앞서 소설 속에 담아낼 수 있었다.

    또 그는 흔히 사람들이 세상을 읽는 방식에 의문을 품는다. 원조교제를 다룬 ‘러브 앤 팝’을 쓰기 위해 시부야 거리에서 여고생들을 만나고 텔레크라와 러브호텔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원조교제의 목적이 단지 ‘샤넬과 프라다 백’만은 아님을 발견했다. 그것은 표면적인 동기에 불과했고, 그 이면에는 브랜드 상품을 구실로 타자와의 만남에 굶주려 있는 여고생들의 심리가 깔려 있었다. 이처럼 스스로 표현할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꺼이 펜을 들어 작가의 의무를 다한 것이 결과적으로 ‘예언’이 됐을 뿐이다.

    류는 ‘러브 앤 팝’을 쓴 뒤 “동기조차 알지 못하는 행동을 하고, 때로는 윤리를 넘어서는 인간의 선구(先驅)적인 언어를 번역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정의 내린 바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침체와 쇠퇴의 길을 걸어온 한국문학은 우리의 내면을 번역하기는커녕 대중을 따라가기에도 숨이 찬 형편이라는 점에서 류와 비교된다.

    문학평론가 장은수씨는 “최근 한국문학은 70년대에서 90년대 초에 개발된 상상력의 전략을 반복하고 있을 뿐, 새로운 상상력이 출현하지 않고 있다. 천편일률적인 시대 또는 세태 소설, 페미니즘으로 포장된 저질 불륜소설, 고백할 내면이 고갈된 상태에서 자동으로 쏟아내는 사소설, 거기서 거기인 역사소설…. 순문학 전체가 거의 문고본 시리즈처럼 매뉴얼화됐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송인소식’ 35호). 그에게 한국에도 일본의 무라카미 류처럼 시대를 앞지르는 작가가 있느냐고 묻자 “앞서가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작가도 찾기 어렵다”고 말한다.

    권명아씨(문학평론가)도 “80년대에는 취재를 해서 소설을 쓰는 보고문학이 유행했지만, 요즘 작가들은 그조차 안한다”면서 “젊은 시절에는 로맨틱한 일탈을 꿈꾸다가 나이가 들면 자연소설 혹은 명상소설에 매달리고 상상력이 고갈되면 역사소설로 가는 게 정해진 길처럼 됐다. 그러다 보니 현실 밀착성이 떨어지고 문학이라는 고귀한 성채에 갇혀 그것을 고상한 예술로 착각한다”고 지적했다. 이미 일반인들에게는 얘깃거리도 되지 않는 수준의 일탈(불륜 혹은 엽기)을 가지고 마치 대단한 경험인 양 포장해 내놓는 게 요즘 ‘소설’이라는 것이다.

    ‘현대사상’의 김성기 주간은 ‘한국문학의 어제-오늘-내일’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더 이상 창작물을 읽지 않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제부턴가 작품 읽기에 대한 흥미가 일지 않았다. 남의 일기장을 더 이상 훔쳐보기 싫다고나 할까. 그것도 ‘위악’과 ‘구토’와 ‘포즈’가 버무려진 일기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 자기 고민이나 자의식만을 지나치게 노출하고 있는데, 정작 나(독자)에게 필요한 건 이 세상 사는 데 쓸 만한 정보다.”(‘동서문학’ 2000년 봄호)

    이처럼 세상 사는 데 쓸 만한 정보를 주지 않는 작가와 소설이 과연 21세에도 살아남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나마 90년대에 떠오른 일군의 신세대 작가들 가운데 전경린 송경아 배수아 김영하 백민석 정영문 등에게서 한국문학의 가능성을 보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창작과 비평’의 최원식 주간은 그 희망조차 버리게 만든다.

    “90년대를 대표하던 신세대 작가들이 요즘 들어 급속히 낡아버렸다. 시대는 바뀌었는데 그들은 성장을 멈춰버렸다.”

    애초에 무라카미 류처럼 시대를 앞지른 한국작가를 찾겠다는 노력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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