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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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인 사냥꾼’ 일확천금은 꿈인가

한국 사이버스퀘터들 도메인 선점경쟁…잦은 분쟁에 큰돈 못 벌고 주소 넘기는 일 많아

  • 입력2005-09-26 11: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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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메인 사냥꾼’ 일확천금은 꿈인가
    지난해 박모씨 (서울 회기동)는 ‘hyosung.com’을 네트워크솔루션즈(미국 도메인 등록업체)에 등록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효성그룹에 전화를 걸어 2000만원을 주면 넘겨주겠다고 제의했지만 효성측은 이를 거부했다. 박씨는 얼마 후 다시 전화를 걸어 이번에는 1억원을 요구했다. 효성측은 재차 거부했다.

    올 3월 박씨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1억5000만원을 불렀다. 박씨는 “tax.co.kr(세무회계 서비스 웹사이트)가 2억원에 팔렸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3월 말까지 자신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요구액은 더 올라갈 것이라고 효성을 압박했다. 3월 말 효성그룹은 박씨의 제의에 응하는 대신 국제지적재산권기구의 중재조정센터(이하 중재센터)에 중재(Arbitration)를 신청했다.

    주소 팔아먹기 ‘현대판 봉이 김선달’

    효성측은 “hyosung이 세계적으로등록된 자신들의 상표이고 효성과 전혀 관계없는 박씨는 순전히 도메인을 팔아넘길 목적으로 선점한 것”이라며 박씨와의 전화통화 내용 등을 증빙자료로 제출했다. 중재센터에서는 박씨측에도 소명을 요청했으나 박씨는 응하지 않았다. 지난 6월 중재센터는 “hyosung.com를 효성측에 무상 양도해야 한다”는 결정(Transfer Decision)을 내렸다. 그동안 hyosung.co.kr를 사용해온 효성그룹은 이제 최상위 도메인인 ‘hyosung.com’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전형적인 ‘사이버스퀘터’인 박씨는 이런 식으로 무려 50개 이상의 도메인을 선점해 놓고 있다고 한다. 금호닷컴(kumho.com), 동부닷컴(dongbu.com)도 박씨 소유로 확인됐다(금호그룹이 현재 사용 중인 도메인은 kum ho.co.kr, 동부그룹은 dongbu.co.kr). 조사 결과 박씨가 보유하고 있는 도메인 중 47개는 등록만 됐을 뿐, 웹페이지도 안 만들어진 상태. 박씨는 도메인 등록을 할 때 ‘Christ’ ‘Jesus’ 같은 이름을 쓰고 주소도 허위로 기재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점들은 박씨가 애써 등록해놓은 도메인을 빼앗기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사이버스퀘터(cyber-squatter). 박씨와 같이 돈 될 만한 인터넷 도메인을 선점하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사냥꾼을 일컫는 말이다(영어로 ‘squat’란 주인 없는 땅, 또는 공유지를 먼저 점유해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뜻). 서부개척시대에 백인들이 그랬듯이 20세기 말에 발견된 신천지인 인터넷 공간에서 영토 선점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business.com’이 750만 달러(약 84억원)에 경매되고 컴팩이 ‘altavista.com’을 335만 달러(약 37억원)에 사들였다는 소식은 사이버스퀘터들을 일확천금의 꿈에 부풀게 했다. 이 현대판 골드러시에서 승부를 가르는 것은 순발력과 기발한 착상. 영리하고 발빠른 한국의 사이버스퀘터들이 이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한국이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의 도메인 보유국으로 도약한 것도 상당부분 이들의 ‘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사이버스퀘터들이 도메인 분쟁에 휘말리는 일도 자연 많아질 수밖에 없다. 사이버스페이스의 영토분쟁을 관장하는 곳은 제네바에 있는 국제지적재산권기구(WIPO) 중재조정센터. 이 센터가 최근 웹사이트(http://arbiter.wipo.int)에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문을 연 이후 올 7월7일까지 한국의 업체나 기관이 도메인을 빼앗겼다며 중재를 신청한 건수는 단 3건. 반면 한국인이 국내외 업체나 기관, 인명 관련 도메인을 선점해 놓고 있다가 중재에 회부된 건수는 그 7배나 많은 21건이었다. 이는 미국 영국 스페인 캐나다에 이은 세계 5위의 기록(‘표’ 참조).

    중재센터는 웹사이트에 중재결정 내용도 공개하고 있다. 이중 한국의 사이버스퀘터나 업체가 관련된 도메인 분쟁 사례를 찾아보니 흥미있는 사건 내막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Netkorea Co.란 업체의 대표라고 밝힌 한모씨. 그는 3년 전 toefl.net과 toeic.net을 자신의 도메인으로 등록했다. 한국인을 위한 영어정보 사이트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토플과 토익 시험을 주관하는 미국의 ETS (Educational Testing Service)는 그 도메인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한씨는 적절한 금액을 지불하면 도메인을 넘기겠다고 했다. ETS측은 도메인 등록-유지에 들어간 최소한의 비용은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 후 양측은 몇 차례 접촉을 더 했으나 합의에 실패했다. ETS측은 WIPO에 중재를 신청, 지난 4월 양도 결정을 받아냈다. 결국 한씨는 이 도메인들을 돈 한푼 못 받고 돌려줄 수밖에 없게 됐다.

    인천의 정모씨는 97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worldcup2002.com, worldcup2002.net, 2002worldcup.com, worldcup2006.com, worldcup2010.com 등 월드컵 관련 도메인을 무려 15개나 등록했다. 향후 있을 세 차례의 월드컵 관련 도메인을 싹쓸이한 것. 이에 국제축구협회는 중재를 신청해 지난 4월 양도 결정을 받아내 이 도메인들을 되찾아갔다.

    기업-기관뿐 아니라 유명인의 이름도 종종 도메인 분쟁에 휘말린다. 배우 줄리아 로버츠가 ‘juliaroberts.com’을 둘러싼 분쟁 끝에 지난 6월 WIPO 중재센터의 결정으로 그 도메인을 돌려받아 화제가 된 바 있다. 한국의 가수 조용필씨도 비슷한 분쟁 끝에 자신의 이름을 딴 두 도메인(choyongpil.com, choyongpil.net)을 최근 되찾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서울 양재동에 있는 소규모 업체 대표 왕모씨는 98년 12월 네트워크솔루션즈에 ‘Choyongpil.com’을 등록했다. 지난 1월 조용필씨측에서 왕씨와 접촉해 그 도메인을 넘겨줄 것을 요청했으나 왕씨는 거부했다. 대신 왕씨는 자기 회사 광고에 조용필씨 사진을 쓰게 해주면 도메인을 양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조씨측은 이를 거절하고 워싱턴에 있는 YPC International(조용필씨의 해외법인)을 통해 지난 3월 말 중재신청을 했다. WIPO 중재센터는 “왕씨가 조용필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데다 도메인 등록만 해놓고 웹사이트를 운영하지도 않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5월10일 양도 결정을 내렸다.

    위 사례과 같이 도메인 분쟁은 일단 중재에 붙여지면 대부분 사이버스퀘터들에게 불리한 판정이 나온다. 국제지적재산권기구 중재센터의 통계에 따르면 올 1월부터 6월 말까지 중재 결정이 이뤄진 272건 중 83%(225건)는 중재신청인에게 도메인을 양도하라는 결정이었다. 반면, 도메인 등록-보유자가 소유권을 그대로 인정받은 결정은 17%인 47건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힘든 도메인 방어전에서 드물게 성공한 한국업체가 있어 눈길을 끈다.

    인터넷 컨설팅업체인 CPS Korea Corp.(서울 강남구 삼성동). 2년 전 창업한 이 조그만 회사는 매출액 1억 달러가 넘는 다국적 기업 Oilily에 맞서 이겼다. 문제의 도메인은 oilily.com.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오일릴리(Oilily 원래 이름은 Olly’s BV)는 의류 액세서리 등 개인용품 제조업체로 세계 40여개국에 자회사와 판매점을 갖고 있다. 서울에도 오일릴리 매장이 있다. 80년대 초부터 모든 자사 제품에 오일릴리라는 브랜드를 사용해왔으나 도메인은 oilily.com이 아닌 oililyusa.com과 oilily.nl을 사용해왔다. Oilily측은 CPS Korea가 oilily.com 도메인을 부당하게 선점했으므로 반환하라고 주장했다.

    양측의 접촉과정에서 CPS Korea측은 52만 달러(약 6억원)를 주면 도메인을 넘겨주겠다고 제의했다고 한다. 오일릴리측은 이를 거부하고 중재를 신청했다. 이에 대한 CPS Korea측의 답변이 그럴싸했다. 다음은 그 요지.

    “인터넷을 통한 야채와 꽃배달 사업을 하기 위해 지난해 오일릴리란 이름의 도메인을 등록했다. 도메인 이름을 지을 때는 오일릴리란 브랜드가 있는지 몰랐다. 꽃-야채 주문배달 사업을 계획했기 때문에 야채인 ‘오이’(oi)와 백합꽃 ‘lily’를 합성해 도메인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공급업자 선정 등의 작업이 예상 외로 부진해 아직까지 웹사이트틀 활성화하지 못했을 뿐이다.”

    CPS Korea는 이를 뒷받침할 사업추진 관련 서류도 중재센터에 제출했다. 이러한 공방에 대해 중재센터는 지난 5월 “이 도메인이 불성실하게 이용돼온 것은 사실이나 사업 분야가 오일릴리사와 다르므로 기존의 오일릴리 브랜드 이미지를 이용해 소비자들을 오도할 가능성이 없다”는 중재 결정과 함께 오일릴리측의 양도 요구를 기각했다.

    한국의 사이버스퀘터들이 대부분 중재센터의 소명요청에 아예 응하지 않거나 그럴듯한 답변자료를 제출하지 못해 도메인 방어에 실패해온 것과는 달리 CPS Korea는 설득력 있는 답변으로 도메인 방어에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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