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삼이 쓰고 김영수가 연출한 ‘엄마 집에 도둑 들었네’는 재개발과 보상금 문제로 뒤숭숭한 달동네의 한 하숙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숙집을 중심 공간으로 설정한 무대 위의 풍경에서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다섯 개의 의자다. 포장마차나 공사장에서 봄직한 막의자, 등받이 없는 간이의자, 식탁용 의자, 1인용 소파와 2인용 소파 등 질감과 생김새가 서로 다른 의자가 무대 위에 나란히 공존하고 있다.
불균형이 미학으로 발전할 때는 파격과 세련미를 연출하지만, 미감을 분별할 수 없을 때는 초라하고 조잡해보일 뿐이다. 여기 무대에서의 풍경도 그러하다. 서로 어울리지 못한 채 한 공간에 뒤섞여 있는 의자들은, 바로 그 생뚱맞은 차이와 어색함 때문에 무대 위의 풍경을 잡다하고 비루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조잡스러운 공간을 점령한 인물들 역시 이들 의자처럼 서로 배경이 다른 인간군상이다.
세대수를 늘려 재개발 보상금을 받아내려는 목적으로 모여든 사람들, 가령 가족도 없이 사찰 기와공사를 하던 떠돌이 암돈과 그의 친구인 경비원 한심, 병원 영안실에서 일하는 남북과 건달 대풍, 다방에서 일하는 공자와 가정부 나근예 등 다양한 군상들이 몇 푼의 돈을 쥐기 위해 철거 직전의 하숙집에서 서로 밀고 당기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작품의 표면적인 모습은 이처럼 가난한 달동네의 신산한 삶에 모아지지만, 속살로 들어가면 늙고 소멸하는 것에 대한 쓸쓸함과 그에 대한 관조가 숨겨져 있다. 철거되어야 할 집, 늙음을 두려워하는 암돈과 한심, 또 영안실에서 수십년간 일하느라 모든 생각을 죽음과 시체로 연결짓는 장의사의 기이한 모습은 결국 세상에서 점차 무용해져 가는 낡은 것에 대한 상징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작품 안에 내재된 이런 쓸쓸한 풍경은 이제 원로작가의 반열에 든 작가 이근삼의 내면 풍경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사회를 바라보는 통렬한 풍자에서 벗어나 최근 십여년 동안 이근삼의 작품세계는 ‘막차 탄 동기동창’ ‘이성계의 부동산’처럼 덧없이 사위어가는 인생에 초점을 맞추고, 중심적인 등장인물 역시 황혼녘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40여년째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의 관록 탓일까. 인생의 덧없음을 관조하는 그의 작품은 감상적이지 않다. 객관적이고 치밀하게 계산된 희극적 장치를 통해, 작가는 나약하면서도 허세를 부리는 인간의 양면성을 제시하고, 죽음과 소멸에 대한 공포를 희극적으로 그려낸다. 이런 장치들은 앙상블이 잘 구축된 배우들의 연기력과 결합하여 진가를 발휘하는데, 특히 엉거주춤 뒤로 몸을 뺀 채 허세를 부리며 노년의 쓸쓸함과 삶에 대한 집착을 소화한 윤주상(암돈 역)의 연기는 빼어나다.
문제는 공연의 전반부에 구축되었던 이런 단단함이 공연의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일그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서민극을 표방하며 여러 작품을 연출해 온 김영수는 이 작품 역시 서민극으로 연출해내고자 고심하고 있다. 덕분에 가난과 애환, 좌절과 희망 등 연출가가 추구하는 서민극의 이상이 감상주의를 배제한 채 인생을 통찰하려는 작가의 시선과 어긋나고 있다.
따라서 급격하게 부상하는 철거장면과 등장인물을 연민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공연의 후반부에서 관객들은 연극의 앞과 뒤가 어울리지 않는 난감함에 봉착한다. 삶에 대한 객관적이고 희극적인 통찰력은 삶에 대한 따뜻한 감상주의로 귀결되고, 작가와 연출가의 본격적인 만남은 서민들이 살고 있는 달동네의 고개에 걸려 넘어서지를 못하고 있다. 인간소극장, 8월30일까지.
불균형이 미학으로 발전할 때는 파격과 세련미를 연출하지만, 미감을 분별할 수 없을 때는 초라하고 조잡해보일 뿐이다. 여기 무대에서의 풍경도 그러하다. 서로 어울리지 못한 채 한 공간에 뒤섞여 있는 의자들은, 바로 그 생뚱맞은 차이와 어색함 때문에 무대 위의 풍경을 잡다하고 비루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조잡스러운 공간을 점령한 인물들 역시 이들 의자처럼 서로 배경이 다른 인간군상이다.
세대수를 늘려 재개발 보상금을 받아내려는 목적으로 모여든 사람들, 가령 가족도 없이 사찰 기와공사를 하던 떠돌이 암돈과 그의 친구인 경비원 한심, 병원 영안실에서 일하는 남북과 건달 대풍, 다방에서 일하는 공자와 가정부 나근예 등 다양한 군상들이 몇 푼의 돈을 쥐기 위해 철거 직전의 하숙집에서 서로 밀고 당기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작품의 표면적인 모습은 이처럼 가난한 달동네의 신산한 삶에 모아지지만, 속살로 들어가면 늙고 소멸하는 것에 대한 쓸쓸함과 그에 대한 관조가 숨겨져 있다. 철거되어야 할 집, 늙음을 두려워하는 암돈과 한심, 또 영안실에서 수십년간 일하느라 모든 생각을 죽음과 시체로 연결짓는 장의사의 기이한 모습은 결국 세상에서 점차 무용해져 가는 낡은 것에 대한 상징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작품 안에 내재된 이런 쓸쓸한 풍경은 이제 원로작가의 반열에 든 작가 이근삼의 내면 풍경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사회를 바라보는 통렬한 풍자에서 벗어나 최근 십여년 동안 이근삼의 작품세계는 ‘막차 탄 동기동창’ ‘이성계의 부동산’처럼 덧없이 사위어가는 인생에 초점을 맞추고, 중심적인 등장인물 역시 황혼녘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40여년째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의 관록 탓일까. 인생의 덧없음을 관조하는 그의 작품은 감상적이지 않다. 객관적이고 치밀하게 계산된 희극적 장치를 통해, 작가는 나약하면서도 허세를 부리는 인간의 양면성을 제시하고, 죽음과 소멸에 대한 공포를 희극적으로 그려낸다. 이런 장치들은 앙상블이 잘 구축된 배우들의 연기력과 결합하여 진가를 발휘하는데, 특히 엉거주춤 뒤로 몸을 뺀 채 허세를 부리며 노년의 쓸쓸함과 삶에 대한 집착을 소화한 윤주상(암돈 역)의 연기는 빼어나다.
문제는 공연의 전반부에 구축되었던 이런 단단함이 공연의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일그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서민극을 표방하며 여러 작품을 연출해 온 김영수는 이 작품 역시 서민극으로 연출해내고자 고심하고 있다. 덕분에 가난과 애환, 좌절과 희망 등 연출가가 추구하는 서민극의 이상이 감상주의를 배제한 채 인생을 통찰하려는 작가의 시선과 어긋나고 있다.
따라서 급격하게 부상하는 철거장면과 등장인물을 연민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공연의 후반부에서 관객들은 연극의 앞과 뒤가 어울리지 않는 난감함에 봉착한다. 삶에 대한 객관적이고 희극적인 통찰력은 삶에 대한 따뜻한 감상주의로 귀결되고, 작가와 연출가의 본격적인 만남은 서민들이 살고 있는 달동네의 고개에 걸려 넘어서지를 못하고 있다. 인간소극장, 8월3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