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8

2011.08.01

최후 안전판 퇴직연금, 행동경제학에 길을 묻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그 후

  • 김동엽 미래에셋자산운용 은퇴교육센터장 dy.kim@miraeasset.com

    입력2011-08-01 1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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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고플 때 음식을 사러 가면, 배부를 때보다 많이 산다.

    # 시장에서 콩나물 살 때는 몇백 원을 깎고자 애쓰지만, 백화점 명품관에선 정가대로 구매한다.

    # 노후준비가 중요하다고 여기면서도 생활비가 급하면 퇴직금을 중간정산해 쓴다.

    최후 안전판 퇴직연금, 행동경제학에 길을 묻다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 금융회사들은 서로 자사의 상품이 고수익을 올릴 수 있다며 세일즈에 나선다. 한 증권사 상품설명회.

    누구나 한두 번 이 같은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전통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합리적 인간’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전통 경제학자는 경제적·재무적 의사결정을 설명할 때 인간이 합리적이라고 가정한다. 이들은 모든 경제 주체가 자신이 처한 상황과 제약을 합리적으로 이해한 다음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이 합리적이라면 위의 사례같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결정을 내릴 리 없다. 경제학자는 인간이 냉철하다고 가정하지만, 따뜻한 피가 흐르는 현실의 인간은 때론 합리적이지만 때론 그렇지 않다. 그래서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가진 제한적 합리성에 주목한다. 이 학문은 행동경제학의 창시자 격인 프린스턴대 다니엘 커너먼 교수가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으면서 주목받았다. 이후 행동경제학은 정부 정책 결정, 투자 의사결정, 퇴직연금제도에 활용된다.

    한국도 최근 퇴직연금제도의 기반이 되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을 개정해 행동경제학자의 의견을 대폭 수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퇴직연금제도의 ‘디폴트 옵션(Default Option)’에 변화를 준 것이다. 디폴트 옵션이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았을 때 자동으로 특정 사항이 선택되는 것을 말한다.



    먼저 근로소득세와 양도소득세를 내야 하는 납세자의 심정을 비교해보자. 연말이 되면 근로자는 소득공제를 받고자 각종 영수증을 챙기고 서류를 떼느라 바쁘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세금을 일부 돌려받으면 공돈이 생긴 것처럼 기뻐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연말정산이란 매달 월급을 받을 때 세금으로 낸 돈 가운데 일부를 돌려받는 것으로, 공돈이 아닌 자기 돈이기 때문에 기뻐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자를 받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해야 한다. 그러나 부동산을 보유하는 기간에 발생한 자본차익에 부과되는 양도소득세의 경우는 상황이 반대다. 부동산을 매각할 때 받은 돈이 먼저 양도자의 주머니에 들어간 다음 세금을 내는 터라 아까운 생각이 든다. 먼저 세금을 내고 돌려받느냐, 아니면 먼저 돈을 받은 다음 세금을 내느냐에 따라 납세자 기분이 엇갈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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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이하 개정안)은 이 같은 사람의 심리를 감안했다. 특히 디폴트 옵션에 변화를 준 것은 근로자로 하여금 더 많이 저축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먼저 직장을 옮길 때 근로자가 퇴직연금을 수령하는 방법을 바꿨다. 지금까지는 근로자가 퇴직할 때 ‘개인형퇴직계좌(IRA)’를 지정한 경우가 아니라면, 퇴직금에서 퇴직소득세를 공제하고 남은 돈을 현금으로 일시에 지급했다. 그리고 근로자가 6개월 이내에 개인형퇴직계좌를 개설한 다음 여기에 퇴직금의 80% 이상을 적립하면 퇴직소득세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기 주머니에 들어온 돈을 다시 반환하려는 근로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 근로자의 평균 근속기간이 5.7년밖에 되지 않는 터라, 직장을 옮길 때마다 이런 식으로 퇴직금을 받아 써버리면 퇴직금을 통한 노후소득 보장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번 개정안이 내년 7월부터 시행되면 근로자는 직장을 옮길 때 의무적으로 개인형퇴직연금을 개설해야 하고, 여기에 퇴직연금을 강제로 이전해야 한다.

    이번 개정안에서는 퇴직금 중간정산을 엄격히 제한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현행 법 하에서는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사업장 근로자는 퇴직금 중간정산이 가능한 데 반해,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한 사업장 근로자는 주택 구입처럼 대통령이 정하는 사유에 해당하지 않으면 퇴직금을 중간정산할 수 없다. 이러한 차이는 기업과 근로자가 퇴직연금제도를 신규로 도입하는 데 장애로 작용했다. 대부분 기업이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기에 앞서 퇴직금 중간정산부터 하는 것이다.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조사에서는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중간정산을 받은 근로자 비율이 60%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퇴직연금제도가 근로자의 노후소득 보장을 위해 도입된 것임에도 제도 도입이 빌미가 돼 퇴직금 중간정산이 이뤄지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내년 개정안이 시행되면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사업장이라도 중간정산 요건이 엄격해진다. 그럼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중간정산으로 근로자의 노후생활비 재원인 퇴직금이 사라지는 일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개정안은 또한 신설 사업장은 퇴직연금제도를 의무적으로 도입하도록 규정했다. 지금까지는 퇴직금제도가 기본값으로 설정된 상태에서 회사와 근로자가 원할 경우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도록 돼 있었다. 하지만 개정안 시행 이후에는 신설 사업장의 경우 1년 이내에 퇴직연금제도를 의무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퇴직연금이 기본값이 되는 셈이다.

    이와 같은 디폴트 옵션 변화가 제대로 자리 잡으면, 은퇴자금을 모으겠다는 굳은 결심이 없더라도 누구나 적지 않은 노후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넛지’라는 책으로 유명한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탈러 교수의 실험을 살펴보면, 1990년 퇴직연금 가입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디폴트 옵션 몇 가지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근로자 중 절반의 평균 저축금액이 2년 만에 소득의 3.5%에서 11.5%로 늘었다.

    최후 안전판 퇴직연금, 행동경제학에 길을 묻다
    노후를 위한 저축이나 투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다. 문제는 먼 미래를 위해 현재의 달콤한 소비를 포기하고 노후에 대비해 저축하는 사람 또한 많지 않다는 것이다. 퇴직연금이 행동경제학에 새로운 길을 묻는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 은퇴교육센터장으로 일반인과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은퇴교육과 퇴직연금 투자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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