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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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주에서 8일간 절규한 세자 “하늘이시여, 살려주옵소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융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1-01-03 15: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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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주에서 8일간 절규한 세자 “하늘이시여, 살려주옵소서!”

    정조는 융릉의 석물을 온갖 꽃으로 장식해 아버지를 애도했다.

    융릉(隆陵)은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후에 장헌세자, 추존왕 장조(莊祖, 1735~1762)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헌경왕후, 1735~1815)의 합장릉이다. 융릉은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1-1에 있다.

    영조 38년(1762) 윤 5월 21일 창경궁 문정전 앞뜰에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훙서(薨逝)했다. 세자로 책봉된 지 26년, 28세의 젊은 세자가 아버지 손에 죽은 것이다. 조선 왕실 초유의 사건이었다. 노론 세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영조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호기 때문이었을까? 이후 영조는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추존왕 진종)의 양자로 왕세손(정조)을 입적시켜 대를 잇게 했다.

    영조는 마흔에 영빈 이씨에게서 둘째 아들 사도세자를 얻었다. 세자의 휘(諱)는 선이고 자는 윤관(允寬)이며 호는 의제(懿齊)다. 맏아들 효장세자가 10세에 죽은 지 7년 만에 둘째 선이 태어나자 영조는 그를 세자에 봉하고 15세부터 부왕을 대신해 정무를 맡게 했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앞날은 험난했다. 자신보다 열 살이나 아래인 계모(비) 정순왕후와 후궁인 숙의 문씨의 질투에 시달렸으며,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 공헌한 정순왕후의 부친 김한구 등 노론 일당의 무고로 화병과 정신병을 얻었다. 무고 사건이란 노론의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동궁(세자)이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자신을 따르는 관료들과 무단으로 관서지역을 유람했다’는 내용이 적힌 ‘허물십조’를 상소한 것을 가리킨다.

    ‘허물십조’에 격분한 영조 “자결하라”

    이를 본 영조는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인가”라고 한탄하며 5월 13일 아들을 폐세자 하고 서인으로 강등했으며 자결할 것을 명했다. 사도세자가 부모 앞에서 자결하는 것이 효에 어긋난다고 항변하자 영조는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



    그러나 막상 아들의 죽음을 전해들은 영조는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와 세손(정조)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으랴” 하며 애도의 뜻을 담아 시호(諡號)를 사도세자라 하고 며느리 혜경궁 홍씨에게 혜빈(惠嬪)이란 호를 내려 복권시켰다. 사도란 ‘세자를 생각하며 추도한다’는 의미다. 영조는 친히 아들의 묘역 조성에 관여해 묘호를 수은묘(垂恩墓)라 하고, 장례의 제주로 영의정 홍봉한(사도세자의 장인) 등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신하들을 대동해 백관이 통탄의 곡을 하기도 했다.

    뒤주에서 8일간 절규한 세자 “하늘이시여, 살려주옵소서!”

    융릉은 난간석을 두르지 않은 조선시대 유일의 병풍석 능침이다.

    혜경궁 홍씨는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친어머니다. 모친은 목은 이색의 후손인 관찰사 이집(李潗)의 딸로, 흑룡이 침실에 서리는 태몽을 꾸고 혜경궁 홍씨를 낳았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이 죽은 뒤 혜빈에 추서됐고,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궁호가 혜경으로 올랐다가 대한제국 당시 장헌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헌경의황후로 추존됐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보다 43년을 더 살다 1815년 12월 5일 81세로 승하했는데, 한 많은 자신의 일생을 ‘한중록’에 남겼다.

    뒤주에서 8일간 절규한 세자 “하늘이시여, 살려주옵소서!”

    융릉 병풍석 인석에 새겨진 연꽃은 조형적 걸작으로 평가된다. 풍수 비보 차원에서 조영한 융릉의 곤신지(坤申池, 아래 사진). 원형 연못은 여의주를 상징한다.

    사도세자의 능은 원래 지금의 서울시립대학 뒷산인 중랑포 배봉산에 갑좌경향(甲坐庚向·동에서 서향)으로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사도세자의 친자임을 널리 알리고, 아버지의 능명을 세자의 예에 따라 영우원(永佑園)이라 했다. 이후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현재의 화성 화산(華山)으로 옮겨 계좌정향(癸坐丁向·북동에 남서향)으로 안장한 뒤 원의 호를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

    화산은 800여 장의 연꽃잎이 봉우리를 감싸고 용이 여의주를 둘러싼 형국의 최고 명당지로, 정조의 고모이며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인 화평옹주의 남편 금성군 박명원이 이곳을 추천했다고 한다. 정조는 화산 앞에 있던 화성읍성을 북쪽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고 정성을 다해 능원을 꾸몄다.

    현륭원은 능역을 서울 도성으로부터 10리 밖 100리 안에 둔다는 조선 왕실의 원칙을 무시했다. 정조는 명당인 화산을 추천받아 사도세자의 능역을 조영하려 했으나, 신하들은 100리 밖인 데다 한강을 건너려면 주교(舟橋)를 놓아야 하므로 어려움이 많다고 반대했다. 그러자 정조는 키 큰 장정들을 모아 한 걸음(一步)을 크게 잡은 뒤 화성은 100리 이내라 주장해 천장을 강행했다. 정조의 끝없는 효심이 느껴지는 이야기다.

    그 후 고종 때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면서 능호를 융릉(隆陵)으로 바꾸었고, 시호를 정헌의황제(懿皇帝)로 추존하면서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황후(懿皇后)로 올렸다.

    융릉은 세자의 묘인 원(園)의 형식에다 병풍석을 설치하고 중계 공간과 하계 공간으로 나누어 공간을 왕릉처럼 조영했다. 융릉은 병풍석이 있으나 난간석이 없는 형식으로 이렇게 조영된 조선 왕릉으로는 유일하다. 능침을 둘러싼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 조각은 융릉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이곳의 인석(引石·병풍석 위에 얹은 돌) 끝에 조각된 연꽃은 조선시대 최고의 연꽃 조각으로 평가된다. 또한

    융릉은 문무석인을 배치하고 망주석, 팔각 장명등을 놓아 왕릉처럼 조영했다. 특히 장명등의 상부는 조선 초기 팔각 장명등 형태이고, 하부는 숙종 이후 명릉에서 나타난 사각 장명등을 닮은 구름무늬 다리로 만들었는데 팔면에 조각한 매난국(梅蘭菊)의 무늬가 아름답다.

    뒤주에서 8일간 절규한 세자 “하늘이시여, 살려주옵소서!”

    사도세자를 뒤주에서 죽게 한 노론의 모습인가. 말없이 무표정한 문석인(작은사진)과 무석인의 뒷모습.

    합장릉 형식으로 혼유석은 하나만 놓았다. 이 혼유석 앞에 전서로 12방위 중 계좌(癸坐)를 표시해놓은 것이 특이하다. 융릉의 비각에는 2개의 비석이 있는데 정조와 고종의 친필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정조가 쓴 ‘조선국 사도 장헌세자 현륭원’이고, 다른 하나는 고종이 쓴 ‘대한 장조 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다.

    홍전문 오른쪽에 원형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다. 곤신지는 융릉을 천장한 이듬해 1790년 정조가 조영했으며, 곤신방(坤申方·남서 방향)은 융릉의 능침에서 처음 보이는 합수지로 이곳에 못을 파서 융릉을 명당으로 만들었다. 또한 1821년 제작된 ‘건릉지’ 권1 능원침내금양전도(健陵陵園寢內禁養全圖)를 보면 원형의 여의주 5개가 그려져 있다. 이는 풍수적으로 앞이 허한 까닭에 둥그런 가산을 쌓거나 연못을 파서 인위적인 비보(裨補) 경관을 만든 것이다. 이곳에는 원래 북두칠성을 닮은 가산과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못과 가산 하나씩만 남았고 정자각 뒤편에 가산이 하나 더 있다.

    앞이 확 트이게 비켜 있는 정자각

    뒤주에서 8일간 절규한 세자 “하늘이시여, 살려주옵소서!”

    융릉은 능침의 앞을 확 트이게 하기 위해 정자각과 수복방을 비켜 세운 것이 특징이다.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한을 풀어주는 듯하다.

    융릉의 능침 사찰은 동쪽으로 수백m 떨어져 있는 용주사(龍珠寺)다. 정조가 융릉 참배 때 이곳에 들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산을 화산으로 해 용주사의 불법과 여의주를 끼고 있는 길지에 아버지의 능을 조영한 정조의 뜻을 읽을 수 있다. 용주사는 일반 사찰과 달리 공간 배치가 궁궐과 비슷해 정조가 융릉에 행차할 때마다 임시 궁궐로 사용했다고 한다. 정조는 죽어서도 아버지에게 효를 다하고자 생전에 동쪽 청룡맥 끝자락에 자신이 누울 능역을 조영했으나 순조 때 융릉의 서쪽 능선으로 천장했다.

    융릉은 특이하게도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있지 않다. 원래 조선 왕릉은 신성한 공간인 능침이 참배자나 관람객에게 보이지 않도록 능침과 정자각, 홍살문을 일직선에 배치하는 것이 원칙이다. 즉 정자각이 능침의 가리개가 된다. 그러나 융릉은 정자각이 능침의 앞을 막지 않고 옆으로 비켜서 있다.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의 답답한 심정을 달래려고 일부러 앞이 확 트이게 한 것은 아닐까.

    이처럼 정자각이 옆으로 비켜서 있다 보니 수복방(능역을 지키는 수복들의 근무처)이 능침 앞을 가로막게 돼, 수라간과 수복방이 정자각 앞 신로와 어로를 중심으로 마주하는 원칙을 무시하고 일직선으로 나란히 배치됐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친자인 정조는 융릉의 서쪽 능선에 묻혔다. 정조의 능호는 건릉(健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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