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25

2010.03.02

“이민법 날벼락 … 오도 가도 못해요”

현지취재 호주 이민 준비 한인들 충격과 혼란 … 기술 배우던 아시아계 유학생들 피해 커

  • 시드니=윤필립 통신원 phillipsyd@hanmail.net

    입력2010-02-24 1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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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월17일 오후 시드니의 호주연방정부 이민부 파라마타지부. 이민부 직원과 상담하려는 사람들이 접수대 앞에 길게 늘어섰다. 인도계와 중국계가 가장 많았고, 한국인도 몇 명 눈에 띄었다. 2월8일 이민부가 기술이민 관련법 개정을 발표한 이후 매일 벌어지는 풍경이다. 이곳 직원은 “자신의 비자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상담하려는 사람들로 연일 북적인다”고 전했다.

    여기서 유이원(28) 씨를 만났다. 1년 전 호주로 건너와 매쿼리대학 통번역 과정에 재학 중인 유씨는 졸업 후 전문직종 기술이민을 신청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우선 4월30일 호주 정부가 새롭게 정비해 발표할 예정인 영주권 취득이 가능한 기술직업 목록을 기다려봐야 한다. 유씨는 “사정이 비슷한 한국인들과 만나 사후대책을 논의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들인 유학비가 얼만데…”

    # 2월12일 오전 시드니 시내에 자리한 사설 기술학교.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유학생으로 활기가 넘쳤던 이곳 분위기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학교 측이 취재를 거부해 학교 앞 길거리에서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와 비자 문제를 상담하고 나오는 길이라는 인도계 재학생 인디라 무한(32)은 “이번 조치로 영주권 취득 가능성이 희박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소연했다.

    “저처럼 요리 직종으로 기술이민을 하려는 인도계 청년은 대개 가난한 가정 출신입니다. 가족 전체의 희망을 걸고 엄청난 학비를 투자했는데, 결국 빚만 잔뜩 지게 됐어요. 되도록 빨리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요.”



    # 2월15일 저녁 시드니의 한인 밀집 거주지역인 스트라스필드. 유학생 최성강(27) 씨를 위한 송별회가 열렸다. 그는 ‘유학 후 영주권’을 신청하기 위해 이미 요리사 자격증을 획득한 상태. 그러나 이번 조치로 자격증이 무용지물이 돼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송별회에 참석한 한인들은 “호주 정부가 유학생들을 상대로 사기 친 것이나 다름없다”고 토로했다. 유학생 1인당 유학비로 연간 5000만원을 쓰는데, 갑작스러운 조치로 쫓아내다시피 하는 것은 너무하다는 얘기다.

    2월8일 호주 정부는 2007년 9월1일 이전에 독립기술이민을 신청하고 영주권을 기다리던 사람 중 이민 요건에 맞지 않는 2만여 명에 대한 비자 심사를 취소하고 이들에게 비자 신청비를 돌려주기로 했다고 전격 발표했다. 또 영주권 심사 때 가산점을 부여했던 ‘부족직업군(MODL·Migration Occupations in Demand)’에서 미용, 요리, 자동차 정비 등을 제외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지난 10년 동안 ‘영주권 제조공장’으로 불렸던 일부 사설 기술학원과 그곳에서 ‘유학 후 이민’이라는 꿈을 키워온 수많은 유학생에게 이번 조치는 폭탄선언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호주 언론은 정부보다는 기술학원과 유학생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다. ‘일부 부도덕한 사설 직업학교와 막무가내로 영주권을 얻으려는 유학생들이 자초한 결과’라는 것이다. 호주 주류사회의 반응도 긍정적인 편이다.

    현 집권당인 노동당이 강력한 이민 정책을 펼치기로 한 것은 어느 정도 ‘정략적 판단’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2007년 12년간 집권해온 자유-국민연립당을 누르고 집권에 성공한 노동당은 올해 실시되는 총선을 앞두고 지지율이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주된 이유는 지난해 말 열린 코펜하겐 환경회의 실패와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청년실업률. 더욱이 노동당 지지계층인 비숙련 기능공들이 해외에서 몰려온 유학생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뺏기고 임금삭감을 감내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려 노동당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도 이번 조치와 무관하지 않다.

    “이민법 날벼락 … 오도 가도 못해요”

    크리스 에번스 호주 이민부 장관.

    호주연방정부의 이민 심사에는 점수제(Point System)가 적용된다. 나이 점수, 직업군 점수, 영어 점수, 경력 점수 등을 합산한 점수가 합격점수 이상일 때 영주권이 나온다. 호주에 친인척이 있으면 100점 이상을, 유학생 독립이민일 때는 120점 이상을 획득해야 한다.

    10여 년 전 도입된 ‘유학 후 기술이민’은 점수 취득을 용이하게 했다. 5, 10점이 부족해 심사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많은데, 호주에서 요리, 미용, 자동차 정비, 회계 등을 배운 뒤 정해진 실습시간을 채우면 무려 15점의 가산점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전 세계에서 유학생이 호주로 물밀듯 밀려왔고 요리, 미용 등 MODL에 해당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사설 기술학교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이는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돼 2009년 호주 국영 abc-TV는 특집으로 ‘이민 논쟁’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여기에 출연한 이민 증가 반대자들은 “MODL 때문에 유학생 수가 10배 이상 늘면서 각종 사회부조리가 생기고 있다”며 “특히 기준 미달의 사설 기술학원들이 호주의 유학산업에 먹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구잡이로 유학을 알선하는 일부 유학원과 이민법무사의 비리가 언론에 폭로되는 일 또한 연례행사처럼 벌어졌다. 이들이 유학생에게 학교를 알선해주면서 학교로부터 상당한 커미션을 챙긴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또 인종 간 다툼으로 인한 인도계 유학생의 사망사고 등이 빈번하게 발생해 인도가 ‘호주는 여전히 인종차별 국가’라고 성토하는 등 외교문제까지 낳았다.

    한편 이번 조치로 큰 피해를 입은 또 다른 유학생 집단은 비영어권 출신들이다. MODL에 속하는 기술을 익혀 영주권 취득 자격요건을 갖췄다 해도, 영어시험인 IELTS (International English Language Testing System)에서 일정 점수 이상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비자 심사가 취소된 2007년 9월1일 이전 비자 신청자 중 상당수는 비영어권 출신으로, 2년 4개월 동안 호주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었다. 다시 말해 영어점수를 수월하게 취득한 영어권 출신 유학생들은 이번 조치가 발표되기 전에 이미 영주권 비자를 얻었던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아시아계 유학생들은 불만을 토로한다. 영어권 국가 출신들보다 불리할 수밖에 없는데, 이민부가 자꾸 영어점수 비중을 높이는 바람에 비자 취득이 늦어졌다는 것이다. 이번 조치로 귀국을 결심한 이들 또한 대부분 아시아계 유학생이다. 영어만 잘하면 전공을 MODL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바꾼 뒤 영주권을 신청하면 되기 때문이다.

    ‘고용주 초청’ 있어야 이민 가능

    2월8일 기술이민법 개정을 발표하는 크리스 에번스 이민부 장관의 표정에는 결기가 느껴졌다. 그는 “이참에 유학과 기술이민의 연결고리를 끊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유학생을 향해서 “학생비자로 호주에 입국했다면 학업에만 충실하라. 당신 비자는 영주권이 아니다”고 쏘아붙인 그는 사실 영국 태생의 이민자다.

    호주 이민부는 올 하반기부터 의료, 보건, 교육 분야의 고급기술 직종 리스트를 도입할 계획이다. 향후 독립기술이민은 고용주 초청(sponsorship) 위주로만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다만 유학생들이 졸업 후 취업을 모색할 기회를 주기 위해 18개월의 임시체류를 허용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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