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2

2005.11.29

남극의 잃어버린 세계 개봉 박두?

러시아 보스토크 호수 시추 재개 … 타국 과학자들 “호수 오염 불러” 이의 제기

  • 김홍재/ 사이언스타임즈 편집장 ecos@ksf.or.kr

    입력2005-11-23 15:4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남극의 잃어버린 세계 개봉 박두?
    쥬라기공원, 할로우맨 등 SF 영화에 자주 사용되는 조금은 뻔한 줄거리. 흔히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과학자가 등장해 판도라의 상자를 무모하게 열려고 한다. 처음에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다.

    실제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해 눈길을 끌고 있다. 광활한 남극대륙을 배경으로 러시아 과학자들이 악역을 맡은 시나리오가 한창 무르익고 있다. 남극에 존재하는 잃어버린 세계의 봉인을 뜯는 작업을 러시아 과학자들이 서둘러 진행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춥다는 남극 중에서도 가장 추운 곳이 러시아의 남극기지가 위치한 보스토크다. 남극점에서 동남쪽으로 1250km 떨어진 동남극 빙하고원 지대에 위치한 이곳은 연평균 기온이 영하 55℃로, 수은주가 영하 89.2℃까지 떨어져 최저기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등 선진국들의 남극 진출 열풍 속에서 러시아가 이상하게도 평평한 보스토크에 자리를 잡은 것은 반세기 전인 1957년. 한동안 보스토크 기지는 지구상에서 가장 춥고 외딴 곳에 위치한 쓸쓸한 연구시설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1977년이 지나면서 상황이 완전히 변했다. 기지 밑에 거대한 호수가 존재한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당시까지 과학자들은 평균기온이 영하 55℃인 곳 밑에 0℃에서 얼어버리는 물이 존재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대한 호수가 발견된 것이다. 두꺼운 빙하가 극지방의 차가운 공기를 차단해줄 뿐만 아니라 지구 내부에서 나오는 지열이 새나가는 것을 막아줬기 때문에 호수는 얼지 않고 존재할 수 있었다.



    기지 밑 호수 지구 전체 민물 양 5%

    ‘보스토크 호수(Lake Vostok)’라고 명명된 호수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인공위성과 갖가지 첨단 탐사장비가 동원됐다. 그 결과 1990년대 호수의 대략적인 프로필을 작성할 수 있게 됐다. 호수는 두께 4km에 달하는 얼음 밑에 존재하는데, 길이는 230km 너비는 50km 수심은 500m나 된다. 호수에는 무려 5400km3의 물이 들어 있는데, 이는 지구 전체 민물호수 양의 5%에 해당한다.

    막대한 호수의 크기는 보스토크 호수가 중요한 이유 중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보스토크 호수는 남극대륙에 얼음이 얼기 시작한 1600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남극대륙이 얼어붙을 당시의 정보를 고스란히 간직한 타임캡슐이 되었다. 1600만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격리된 호수에는 지구상의 생물들과 전혀 다른 새로운 생물들이 살고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호수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1989년부터 러시아는 프랑스와 손잡고 직접 땅을 파고 들어가는 작업을 시작했다. 시추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는데, 그 유명한 보스토크 빙심(Vostok Ice Core)이 바로 그것. 보스토크 빙심은 지난 40만년 동안 이산화탄소 양의 증가와 대기 사이의 상관관계를 처음으로 보여줬고, 그동안 지구 기후가 네 차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1999년 3600여m까지 얼음층을 파고 들어가 호수를 불과 150m 남겨놓은 상태에서 시추 작업이 중단됐다. 남극탐사 관련 국제위원회에서 시추 작업을 계속하면 깨끗한 물이 보존돼 있는 보스토크 호수를 심각하게 오염시킬 수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는데, 이를 러시아가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보스토크 호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도 최근 6년간 잠잠했던 러시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최근 보스토크 호수 시추 작업을 다시 진행한다는 의사를 공식 표명한 것. 남극에 여름이 찾아오는 올해 11월 중순부터 시추 작업을 재개한다는 내용이다.

    러시아 남극탐험대 책임자인 발레리 루킨 박사는 “2005~2006년 남극 여름 시즌에 50m를 파내려가고, 2006~2007년 여름 시즌에도 50m를 더 시추할 계획이다”면서 “2007~2008년에 나머지 50m를 파내려가면 드디어 호수의 물과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루킨 박사는 러시아 과학자들이 호수를 오염시키지 않는 시추 방법을 고안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국가의 과학자들은 호수를 시추하는 이번 계획이 너무 서둘러 진행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러시아가 사용하려는 기술이 지금까지 테스트된 적이 전혀 없어 시추가 진행되면 보스토크 호수의 물을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오염시킬 것이라는 주장이다.

    영국 남극조사단의 시넌 엘리스에반스 박사는 “러시아의 시추공은 60t이 넘는 기름(기계 안에 들어 있는)과 부동액, 박테리아로 가득 차 있다”면서 “만일 이 물질들이 호수로 흘러 들어가면 호수를 망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는 이에 대해서 꿈쩍도 않고 있다. 영국 가디언지는 11월13일 루킨 박사의 말을 인용, “시추공에 흐르는 일부의 기름과 부동액만 신경 쓰면 되며, 압력을 고려하면 시추공에서 호수로 오염물이 흘러 들어가지 않고 대신 솟아오를 것이다”는 러시아 측의 생각을 상세히 보도했다.

    지구 생성 비밀 간직한 ‘판도라 상자’

    이에 대해 영국 브리스틀대학 지질학과의 마틴 시거트 교수는 “남극 서부의 엘스워스 호수처럼 남극에는 지금까지 140여개의 호수들이 발견돼 있다”면서 “불완전한 기술을 갖고 있는 러시아가 남극에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호수를 서둘러 탐사하도록 내버려둬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시거트 교수는 현재 영국의 엘스워스 호수 탐사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데, 탐사에는 로봇을 사용할 예정이다. 앞으로 5년 안에 탐사 로봇을 내려보내 생명체를 찾고, 호수의 침전물을 분석하고 견본을 수거해 돌아온다는 계획이다.

    우주과학자들도 보스토크 호수의 탐사에 로봇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목성의 제2위성인 유로파(Europa) 등에도 수km 두께의 얼음층 밑에 호수가 존재한다고 생각되는데, 남극의 호수가 로봇 탐사를 시험할 장이 되기 때문이다. 유로파 등의 호수는 외계 생명체가 존재할 유력한 장소로 예측되고 있다.

    주변 국가의 견제가 계속되더라도 소유권을 주장하는 러시아가 불도저 전략을 고수하기 때문에 시추 작업은 이번 주 내 시작될 예정이다. 호수 탐사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일이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남극의 잃어버린 세계 개봉 박두?

    남극대륙의 위성사진. 남극대륙의 두꺼운 얼음 아래 숨겨진 보스토크 호수를 설명하는 단면도(오른쪽).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