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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행창의 자전거 유럽 기행

제정 러시아의 꽃 안녕! 상트페테르부르크

지구상 가장 아름다운 도시 서양화 한 폭 … 거리에는 자본주의 바쁜 발걸음 여기저기

제정 러시아의 꽃 안녕! 상트페테르부르크

제정 러시아의 꽃 안녕! 상트페테르부르크

물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야경. 40여개의 섬에 380개의 교량으로 이뤄진 도시를 흐르는 강은 발트해로 들어가는 네바강이다.

에스토니아와 러시아의 국경선에 흐르는 강줄기에 놓인 다리 중간쯤에서 멈췄다. 꼭 14년 만에 다시 발을 딛는 이 땅!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이다. 당시 러시아는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좌지우지하던 양대 제국의 하나였다. ‘사회주의 소련연방’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는 공포와 암흑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나라. 그러나 지금은 ‘민주주의 러시아연방’이란 이름 아래 새로운 체제로 탈바꿈한 뒤 자칭 ‘사회주의 천국’에서 ‘자본주의 아수라장’으로, 궁핍과 배고픔에 허덕이는, 여전히 어두운 이미지로 다가오는 나라다.

국경을 통과해 철조망으로 이어진 긴 통제구역을 벗어나, 일상적인 풍경이 펼쳐진 러시아 국경도시 이반고로트 시내에 접어들었다. 옛 소련 시절 지방도시 특유의 콘크리트 건물들이 뿜어내는 회색 삭막함이 가득한 거리 풍경이다. ‘소련 제국’의 식민지에 불과했던 강 건너 에스토니아의 국경도시 나르바에는 생동감과 활기가 충만했는데…. 역사의 움직임은 이렇게 아이로니컬하다.

제정 러시아의 꽃 안녕! 상트페테르부르크

꽃을 팔기 위해 거리에 앉아 있는 할머니들.

연일 내리던 빗줄기가 러시아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멈췄다. 도시 중앙을 가로지르는 M11호 국도에 올랐다. 목적지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는 150km 남짓한 거리. 평지 위 일직선 도로만 따라가면 된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국도변 마을 풍경은 고요만 가득하던 발틱 3국의 도로변 풍경과 사뭇 다르다. 이끼 낀 슬레이트, 세월이 느껴지는 낡은 나무 지붕들 아래로 한집 한집 현재형인 삶이 자리하고 있다. 도로변 마을에는 입구마다 조그만 나무상자 위에 버섯과 야채, 들판에서 꺾은 듯한 꽃다발을 올려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들이 앉아 있다. 이색적인 점은 네온사인을 내건 술집과 상점들 또한 도로변에 앉은 할머니들 수 못지않게 많다는 것이다. 윤회하는 역사 속에서는 어떤 제국도, 고귀한 이념도 절대 진리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묵묵히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제정 러시아의 꽃 안녕!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원에서 술을 마시며 자유를 만끽하는 ‘자본주의’ 러시아의 시민들.

국경을 넘은 뒤 이틀째 되는 날 늦은 오후, 제정 러시아의 도읍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했다. ‘소련’ 시절에는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 도시는 자체로 러시아혁명의 상징이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아름답기로 이름난 이 도시에 들어서는 순간 대로변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손을 들고 반기는 친구는 거대한 레닌 동상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니 ‘반갑다’. 사회주의 소련 제국의 피의 역사와 현 러시아의 처참한 현실은 이론가이자 사상가였던 레닌의 잘못만이 아닐 것이다. 권좌에 앉아 단맛만을 즐기는 속물 위정자들이 만들어낸 역사의 산물일 뿐이다.

제정 러시아의 꽃 안녕! 상트페테르부르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징 레닌 동상 앞에 선 필자.

소련 당시 ‘레닌그라드’ … 레닌 동상이 먼저 반겨



리토아니아를 여행할 때 만났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동양학부의 러시아인 친구에게 도착 소식을 알렸다. 마중 나온 20대 초반의 여대생 둘.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모습이다. 대학 기숙사를 예약하고 왔다는데도 비어 있는 아파트가 있다면서 손목을 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소련 시절과 지금을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더 좋은가라고 물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소련 시절보다 몇 곱절 힘든 게 사실이지만, 누구의 허락이나 감시를 받지 않고 이렇게 외국 친구를 초대할 수 있는 삶의 자유가 보장되는 지금이 더 좋단다. 빵이 자유를 대신할 수 없는 게 인간의 삶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친구들과 함께 숙소로 짐을 옮겼다.

사회주의에서 민주주의로 180도 체제 전환을 이룬 이 땅! 러시아 사람들에게 지금의 삶은 역사의 대전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고, 현재 그 흐름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가 이곳을 다시 찾은 나의 관심사다. 아직도 필자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라시아대륙 동쪽에서 서쪽으로 여행하다가 ‘레닌그라드’에 도착한 지 채 며칠 지나지 않았던 날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당일 밤 서유럽으로 탈출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게 벌써 14년 전인 1991년 8월 중순의 일이다.

제정 러시아의 꽃 안녕! 상트페테르부르크

운하로 둘러싸인 제정 러시아의 고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 풍경.

지난 여행 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된 시내 산책에 나섰다. 제정 러시아 시대의 막대한 부가 만들어낸 아름다움으로 ‘유럽의 꽃’이라고 불리는 고도(古都). 육중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건축물들이 이중삼중으로 흐르는 운하와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끝도 없이 이어진,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를 걷자 옛 소련 시절 고요함과 운치로 한 폭의 서양화를 연상시켰던 이 도시의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도시 곳곳에서 어느새 자본주의의 천박한 색상이 드러나며 고풍스런 아름다움을 한층 떨어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상으로 도시의 인구는 사회주의 시절보다 25%나 줄었지만, 생존을 위한 ‘자본주의식’ 바쁜 발걸음의 인파는 거리에 물결을 이루고 있다.

제정 러시아의 꽃 안녕! 상트페테르부르크

바쁜 걸음으로 시내를 걷고 있는 시민들.

러시아가 경제 체제를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하면서 가격 자율화를 시행해 물가가 2000% 넘게 올랐다고 한다. 경제활동 수준은 50%나 떨어졌고, 실업률과 범죄율, 빈부 차는 급격히 늘었다. 지금은 러시아 역사에서 최악의 시기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니 ‘산 입에 거미줄 칠 순 없다’는 심정으로 혼자 두세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질 수밖에. 약육강식의 잔인한 정글법칙이 존재하는 자본주의로 뛰어든 러시아가 시장경제의 거대한 공동묘지로 바뀌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낮선 이방인 돕는 순수함과 여유로움도

러시아에 가기 전, 체제 전환 이후 러시아에서 인종차별이 심해졌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하지만 필자는 러시아에서 낯선 이방인을 진심으로 도와주려고 애쓰는 인간적 배려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현실이지만, 아직은 자본주의 때가 많이 타지 않은 순수함이 남아 있는 덕분인 듯했다. 며칠 동안 기억을 찾아 옛 시가지 일대를 돌았다. 여행 도중 한 나라에 2주일이나 머무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인데도, 기억을 떠올리며 옛 시가지 일대를 돌아다녔다. 다음 여정지 스칸디나비아로 향한 준비를 막 끝내고 나니, 이곳에서 느꼈던 여유로움, 아름다운 제정 러시아의 고도가 들려주던 숨소리에 대한 아쉬움이 울컥 일었다.

제정 러시아의 꽃 안녕!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현지 친구 집에서 함께 식사하고 있는 필자.

하루쯤 하는 일 없이 조용히 지낼까 하고 있는데, 친구들이 찾아왔다. 같은 학과 친구의 생일 파티가 있는데 떠날 날이 며칠 안 남았으니 송별회를 겸해 1박2일 여행을 떠나자고 한다. 다들 배낭에 침낭까지 매달고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기차로 2시간이나 북쪽을 향해 달려야 나오는 숲 속, 커다란 호숫가의 아담한 별장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축배를 들고 축하 메시지를 담은 카드를 전달하는 등,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생일파티를 즐긴다. 하지만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는 축배! 또다시 축배에 축배! 정열적이자 감성적인 슬라브 민족의 후손이라는 게 분명히 이해된다. 그들과 어울리다 보니, 언제 어떻게 잠자리에 들었는지 기억조차 남지 않았다. 뜨거운 생일파티에 기억 없는 송별회를 치른 셈이다.

다음날 새벽녘, 먹구름 아래로 어둠조차 채 가시지 않은 시내를 빠져나와 북서쪽 숲 사이로 이어진 국도 M10호선에 올랐다. 따뜻한 친구들이 있는 곳도 푸근해 좋지만, 미지로 향해 재촉하는 여정 또한 그 못지않게 좋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러시아 호반의 국경도시 비보르크를 지나자 산속 도로를 끼고 이어지는 호수 같은 운하를 따라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는 국경지대가 펼쳐진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 지 삼 일째 오후, 언젠가 꼭 한 번 더 찾고 싶은 러시아를 되돌아보고는 비무장지대를 지나 러시아-핀란드 국경선에 접어들었다.

◈편집자주 / 편집자의 착오로 핀란드 여행기가 먼저 게재됐습니다. 필자는 러시아를 지나 핀란드로 떠났으며, 거기서부터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다음 원고는 스웨덴으로 이어집니다.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바랍니다.



주간동아 2005.01.04 467호 (p74~75)

  • 글·사진=행창/승려 haengchang@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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