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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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제로지대’의 노숙자들

IMF 실직과는 다른 ‘자발적 홈리스’에 가까워 … 각종 재활대책 ‘있으나마나’

  • < 황일도 기자 > shamora@donga.com

    입력2004-11-25 13: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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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 제로지대’의 노숙자들
    사람들은 그를 ‘민상사’라 부른다. 서울역과 서소문공원 일대에 사는 400여명 노숙자 가운데 민상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걸걸한 목소리와 아무데나 참견을 마다하지 않는 성격 덕분에 그는 이 지역의 ‘군기반장’으로 통한다.

    민기남씨(54·가명). 올해로 세 번째 서울역에서 겨울을 맞는 장기 노숙자다. 기자가 그를 만난 11월20일 저녁에도 그는 구걸로 번 돈 5000원을 털어 술판을 열었다. 소주 서너 병을 안고 친구들을 불러모아 술이 얼큰하게 오르는 참이었다. 추웠던 날씨가 반짝 풀린 탓에 역 광장 한쪽 월드컵 기념품을 파는 상점의 벽을 바람막이 삼아 만든 자리에는 금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서울역 앞 지하도는 노숙자들 사이에서 텃세로 가장 악명 높은 곳이다. 이미 ‘노숙자의 메카’로 굳어진 탓에 의료 지원, 무료급식 등이 다른 지역보다 낫다. 을지로나 영등포역 등은 서울역이 만원이 되자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뻗어나간 경우다. 이 때문에 다른 곳에서 오는 노숙자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민씨가 간혹 나타나는 낯선 얼굴에게 앞장서서 텃세 부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노숙자들이 달라지고 있다. 이곳을 지켜본 활동가들은 서울역 노숙자들이 이미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단순한 군중이 아니라 대부분 서로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 관계라는 것. 숨겨둔 돈이 있어 인심이 후하지만 성깔이 대단해 아무도 함부로 못하는 사람은 대머리 박씨고, 군밤모자를 쓰고 다니는 쭛씨 할아버지는 이번 겨울을 나기 어렵다는 얘기 등등 술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진 소문으로 서울역 지하도에 비밀은 없다.

    ‘희망 제로지대’의 노숙자들
    서울시 노숙자대책반의 자료에 따르면 2001년 10월 현재 노숙자는 3213명. 거리 노숙자는 총 457명이다. 이들은 혹한기에만 200명대로 줄어들 뿐 여름이 오면 다시 500명을 넘어선다. 정작 문제는 노숙자군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려진 ‘IMF 실직 노숙자’ 개념은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 이미 거리생활에 적응해 자신들만의 룰을 만들어가며 살아가는 ‘서구식 홈리스(homeless)’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술자리에 모여 앉은 사람들에게 굳이 노숙하는 이유를 물었다. 담요를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있던 변창익씨(53)가 대답 대신 바지를 걷어올린다. 왼쪽 무릎 아래가 허전하다. “내가 월남에 갔다 왔거든. 살아 돌아오기는 했는데 고엽제야. 반년도 넘게 병원에 있다 다리를 잘랐지.”

    재기를 시도하며 힘겹게 가정을 꾸렸지만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이가 기형아로 사산하면서 파탄이 났다. 충격에 빠진 아내는 집을 떠났고 그는 내기 바둑이나 도박으로 연명하다 서울역에 자리잡았다. “기초생활보장? 연금? 사기 한번 걸려봐, 아무것도 안 남지. 당신도 너무 자만하지 마. 인생 망가지는 거 한순간이야.” 술 취한 변씨가 삿대질을 해가며 기자를 노려봤다.

    다음날 아침 10시. 지하도 구석구석에서 늦은 새우잠에서 깨어나 꾸역꾸역 따뜻한 역 구내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오랜만에 서울역을 찾은 건설일용직 중계업체 한성용역의 이강복 실장과 마주쳤다. 구인조건은 월급 75만원에 숙식 제공. “딱 다섯 명이 관심을 보이네요. 전보다 서울역에서 사람 구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갈수록 심해져요. 일할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니까요.” 결국 단 한 사람만이 이실장을 따라나섰다.

    일어나 앉은자리에서 전날 먹다 남은 소주병을 꺼내든 이용희씨(48·가명)는 “일을 하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당뇨에 결핵까지 한꺼번에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골에서 농사짓다 7년 전 상경했다는 그는 고물수집 등으로 전전하다 6년 전 영등포의 한 공업사에 취직해 판금과 도장 일을 시작했지만 병이 깊어지면서 2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일할 필요도 없지. 잠은 지하도에서 자면 되고, 밥은 돌아다니며 무료급식 챙겨먹으면 되니까.” 소주 한 병을 깨끗하게 비운 이씨는 “술이 몸에 나쁜 줄은 알지만 자고 깨면 몰려오는 추위에 견딜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도 마음은 편해. 아옹다옹 살지 않아도 되고,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고. 내가 이래서 쉼터에 못 들어가.”

    ‘희망 제로지대’의 노숙자들
    한림대 의대 산업의학과 주영수 교수팀이 총 201명의 노숙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및 검사자료에 따르면, 서울의 경우 3개월 이하 단기 노숙자는 10% 가량인 반면 46개월 이상이 42%를 넘어섰다. 이는 노숙자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입증한다고 주교수는 말한다. “자활한 노숙자가 사회에 복귀하고 실직한 사람이 새로 유입되는 예전 패턴은 더 이상 없다고 봅니다. 거리에서의 삶을 더 자연스럽게 여기는 거죠.”

    이들의 건강상태 역시 악화되고 있다. 주교수팀의 통계는 서울 노숙자의 7.5%가 당뇨병, 8.0%가 만성B형 간염을 앓고 있는 데다 비율이 꾸준히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명 중 한 명꼴(4.4%)로 전염병인 결핵을 앓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 특히 중증환자가 늘고 있음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지난해 서울과 경기도에서 숨진 무연고 행려노숙자는 각각 442명과 114명. 수도권에서만 하루 2명에 가까운 노숙자가 목숨을 잃는 셈으로, 이는 1999년 서울시 전체 연간 사망률 1.2%의 4배가 넘는 숫자다.

    이용희씨와 함께 앉아 있다 지하도 구석에 볼일을 보고 돌아선 박동오씨(57)가 물이 먹고 싶다며 지하상가에 있는 한 분식집을 향해 나섰다. 박씨와 주인 한모씨(49)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말도 하지 않고 물통을 손에 든 박씨의 행동에 주인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물 먹고 싶다고 얘기하면 따라 줄 거 아니에요? 왜 씻지도 않은 손으로 물병을 만져요?” 박씨의 목소리도 함께 올라간다. “내 손에 뭐가 묻었다고 그래? 노숙자라고 괄시하는 거야?” 의자를 발로 차며 욕을 내뱉은 박씨가 돌아선다.

    기자가 다가서자 분이 풀리지 않은 한씨가 말을 이었다. “사지 멀쩡해서 왜 일을 안 해? 누구는 안 아픈가, 다 아파도 약 먹어가며 일하는 거지.” 한꺼번에 실어가지 않고 놔두는 서울시가 원망스럽다는 한씨는 “밥 주고 잠자리 주니까 노숙자들이 느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IMF 사태 이후 상당 시간이 지나면서 노숙자를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은 이미 차가워졌지만 서울 노숙자 쉼터 ‘자유의 집’의 최성남 재활사업본부장은 “노숙자를 제삼자 입장에서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들이 정상인처럼 사고하고, 정상인 같은 의지를 보여줄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

    “예전의 노숙자가 ‘전락한 사람들’이었다면 이들은 ‘평생을 노숙자가 될 수밖에 없는 길을 달려온 사람들’입니다. 사회보장시스템이 커버하지 못하는 부랑인들이 지금의 노숙자인 거죠.” 만성 중증질환을 앓고 있는 무연고 환자, 장애인, 노인, 정신질환자, 알코올 중독자 등이 다수를 이루는 이들은 좌절감이나 공포를 치료하는 재활 프로그램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최본부장의 견해다.

    서울시의 고민도 여기 있다. 노숙자 집단의 성격이 변해 자활대책이 실효를 거두기 어려워진 부분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노숙자를 방치할 수도 없다는 것. 서울시 노숙자 대책반의 최승연 운영지원팀장은 “그렇다고 쉼터에 강제 입소시킬 수도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부랑인과 노숙자를 각각 다른 과에서 나눠 맡고 있는 상황에서 ‘부랑인화된 노숙자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어렵다는 고충이었다.

    ‘희망 제로지대’의 노숙자들
    11월23일 저녁 7시. 매주 금요일 이 곳에서 정기검진을 벌이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진료팀이 지하도에 도착하자 곳곳에 흩어져 있던 노숙자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10여명의 의사들과 의대생들이 진료와 투약, 차트 정리에 나섰지만 밀려드는 사람들에 비해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현장에서 만난 인의협의 정일용 공동대표는 “가능성도 없는 재활 프로그램에 인력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보다 차라리 이들이 정말 필요할 때 갈 수 있는 현장시설을 갖추는 게 더 합리적”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가장 시급한 것은 매일 문을 여는 의료시스템. 지금의 진료로는 응급처치도 힘들다는 것이 정대표의 말이다.

    이와 함께 샤워와 빨래시설, 필요할 때 따뜻하게 잘 수 있는 쪽방도 현장 근처에서 제공돼야 한다고 노숙자다시서기지원센터 황운성 소장은 말한다. “물론 쪽방 쿠폰을 나눠주면 술과 바꿔 먹는 사람이 생길 겁니다. 신문에선 또 ‘의지 없는 노숙자들에게 왜 예산을 낭비하느냐’는 소리가 터져 나오겠죠.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들이 살 수 있습니다.”

    지하보도를 나선 밤 9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노숙자 한 명이 거대한 대우빌딩 계단 앞에 누워 있는 또 다른 노숙자를 향해 다가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사회는 재활의 의지도, 삶에 대한 애정도 상실한 이들이 도심의 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왜 우리 사회는 서구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노숙자를 감추려 하는지 모르겠다”는 한 자원활동가의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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