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9

2001.04.12

이재용씨 e삼성 지분정리

디지털맨에서 전자맨으로 변신…삼성측 ”대주주였을 뿐 e삼성 경영 관여 안해”

  • < 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byeme@donga.com >

    입력2005-02-23 14: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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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씨 e삼성 지분정리
    “e삼성은 사실상 벤처가 아니었다.”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한 관계자는 이 말 한마디로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장남 이재용씨(33)와 e삼성을 둘러싼 논란의 전말을 설명했다. 지난 3월27일 삼성이 발표한, 그룹의 e비즈니스 사업 개편 내용의 핵심은 일명 ‘JY 브랜드’로 불린 인터넷 회사들의 주주 변경이었다. JY는 최근 삼성전자 상무보로 선임된 이재용씨의 영문 이니셜이며, 변경 대상은 이누카 가치네트 등 이씨 소유의 e비즈니스 업체들이었다. 통합메시징서비스(UMS)업체인 이누카는 아예 4월1일부로 서비스를 중단해버렸다.

    삼성측은 “이재용 상무가 삼성전자에 근무하게 됨에 따라 e삼성(JY 소유 인터넷 벤처 통칭) 지분을 정리하게 됐다”며 “공정거래위원회, 참여연대 등이 제기해 왔던 삼성-e삼성간 부당 내부거래 및 지원 의혹을 해소하고, 이씨가 삼성전자 경영 수업에 전념토록 하기 위해 취한 조치”라고 밝혔다. 삼성측은 주주 변경이 이씨의 벤처 경영 실패로 인식될 것을 우려해 “모두 설립 초기 단계 회사들인 만큼 경영성과 측정이 어려우며, 이재용씨는 e삼성의 대주주였을 뿐 실제 경영에는 관여한 바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e삼성 지분 조정 사태를 사실상의 ‘경영 실패’로 받아들이고 있다. e삼성 소속 벤처기업군의 실패가 아니라, 이재용씨의 물적-사회적 토대 및 입지 강화를 위해 e삼성 프로젝트를 기획-진행해 온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의 실패라는 뜻이다.

    e삼성이 출범한 것은 지난해 초. 주체는 그룹 구조조정본부(이하 구조본) 재무팀이었다. 신응환 이사를 중심으로 인터넷 태스크포스팀을 결성, 창업을 주도했다. 비슷한 시기 이건희 회장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재용이가 당장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아직 이르나, 젊은 사람으로서 인터넷 사업이나 디지털 경영 쪽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 그런 새로운 사업 분야에서 가급적 많은 경험을 쌓아보도록 권유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구조본이 지난해 1월 중순 새롬기술에 약 1000억원을 투자한 것도 이재용씨가 인터넷 비즈니스를 통해 경영 일선에 등장하리라는 설을 굳히는 데 일조했다. 이 당시 삼성 관계자들은 이씨가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박사과정에서 e커머스를 전공중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러한 와중에 이씨는 e삼성의 대주주가 됨으로써, 삼성의 미래를 이끌어갈 ‘디지털 맨’으로서의 영향력과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일각에선 그를 아시아 최고 갑부 리자청의 아들 리처드 리(34)에 비유하기도 했다. 리처드 리는 아버지가 준 종자돈으로 인터넷 사업을 일으켜 단시일에 ‘아시아의 빌 게이츠’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이처럼 e삼성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재용씨의 순조로운 경영권 승계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e삼성을 통해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뒤 그룹에 화려하게 입성한다는 전략이라는 것. 그러나 삼성측이 이재용씨의 입성(入城) 창구로 원래부터 e삼성을 노린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재계에 몸담고 있는, 삼성 구조조정본부 출신 인사에 따르면 애초 이씨의 인터넷 사업 진출 발판으로 거론된 기업은 유니텔이었다. 그러나 사업내용이 한정돼 있고 규모가 지나치게 큰 데다 펀딩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이 계획은 유보됐다. 이 관계자는 “e삼성이라는 벤처 사업체를 출범시킨 이면에는 분명히 외부자금을 흡수하고 코스닥 활황에 기대, 미국 아마존식의 ‘대박’을 터뜨리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렇게 조성한 자금으로 그룹 지분을 사들여 (삼성에) 보란 듯이 데뷔한다는 복안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상황은 의도했던 대로 풀려가지 않았다. 우선 그룹 내부의 갈등에 부딪혔다. e삼성의 사업 내용 중 상당 부분이 각 계열사별로 추진해 온 인터넷 비즈니스 영역과 겹쳤던 것. 경쟁 논리로만 생각한다면 양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JY브랜드’의 힘은 막강했다. 각 사의 인터넷 사업 담당자들은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삼성 계열사에서 신사업 기획을 담당하고 있는 A씨는 “직원들 사이에 e삼성이 구조본을 통해 그룹 전체의 인터넷 비즈니스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그로 인해 크고 작은 불만의 소리가 터져나왔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8월에는 삼성-e삼성 간 부당 내부거래 및 지원 여부에 대한 공정거래위의 조사가 시작됐다. 그룹과 e삼성은 한 목소리로 “그런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의혹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사업 기획 자체는 물론 자금-핵심인력마저도 구조본을 통해 조달받은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e삼성과 가치네트 대표를 맡고 있는 김성훈씨도 구조본 출신이다.

    더 확실한 ‘증거’는 구조본 인터넷 태스크포스팀을 이끌었던 신응환 이사가 삼성을 그만둔 뒤 e삼성인터내셔널의 대표를 맡은 것. 그러나 신이사는 최근 e삼성인터내셔널의 구조조정이 임박하자 사표를 내고 지난 3월 삼성 구조본 상무보로 발빠르게 ‘원대복귀’했다. 소속사도 삼성 SDI로 바뀌었다. 그는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김징완 구조본 경영진단팀장-김인주 재무팀장으로 이어지는 구조본 재무라인의 핵심 인사 중 한 명이다.

    물론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도 삼성이 e삼성 프로젝트를 접을 수밖에 없었던 요인 중 하나다. 코스닥 폭락이 이어지고 닷컴주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e삼성의 장밋빛 꿈은 말 그대로 ‘꿈 같은 소리’가 되고 말았다. 더구나 이재용씨의 그룹 입성이 확정된 지금에 와선, 오히려 e삼성의 존재가 이씨에게 짐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e삼성 처리와 관련해 구조본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었다고 한다. 재무라인은 ‘정리하자’는 편인 반면 비재무라인은 ‘좀더 지켜봐야 한다’는 뜻을 고수한 것. 이러한 재무-비재무라인간 갈등은 상속세 처리 방식이나 자동차 사업 존폐를 결정하던 때에도 불거졌던 것으로 ‘삼성식’ 신사업 진출 과정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것들이다.

    한편 삼성 구조본은 e삼성 지분 정리 결정 이후 잦은 말 바꾸기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재용씨는 디지털 맨이 아니라 글로벌 맨으로 인정받길 원한다’ ‘재용씨는 새롬기술 투자나 e삼성 운영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이씨의 박사 학위 논문 주제는 e커머스가 아니라 컴퓨터산업이다’….

    이같은 태도에 대해 삼성의 한 중견 간부는 “그래도 주연 배우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라며 “돈과 간판만 있으면 된다는 구태의연한 자세가 e삼성 실패의 요인”이라고 비난했다.

    e삼성 주식 인수 소식이 전해지자 제일기획, 삼성SDI 등 해당 계열사의 주가가 떨어지고 투자 등급이 하향 조정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영국에서 발행되는 파이낸셜 타임스는 “실패한 닷컴 기업을 살리는 쉬운 방법은 아버지의 재벌사에 떠넘기는 것”이라며 “요즘은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이런 내용을 가르치느냐”고 비꼬기도 했다. 적절하고 투명한 절차 없이 초기 인터넷 기업에 수백억원을 지불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지난해, 그토록 자주 이재용씨의 ‘성공 모델’로 언급됐던 홍콩의 리처드 리 역시 첨단 기술주 폭락으로 지난해 말부터 상당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러나 아버지 리자청은 이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으며, 아들 역시 “아버지의 도움은 필요 없다”며 홀로서기를 고집하고 있다.

    반면 이재용씨는 어떤가. 현 단계에서 e삼성 프로젝트는 실패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 부담은 현실적으로 적지 않은 삼성 계열사들의 몫으로 돌아갈 판이다. e삼성 프로젝트의 실패가 곧 이재용씨의 실패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이 배태한 시장의 불신, 고쳐질 성싶지 않은 ‘관행’의 어두운 그림자는 삼성의 표현대로 ‘이제 막 경영수업을 시작하는’ 그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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