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1

2000.11.30

“꾸밈없이 내 생각 말했다”

서울대 수시모집 합격 방현영양 ‘면접일지’ …지식보다 사회현상에 대한 주관 요구

  • 입력2005-05-31 1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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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밈없이 내 생각 말했다”
    10월6일 9시30분 초조한 마음으로 서울대 강의실에 도착. 온몸이 떨린다. 챙겨온 언론정보학 관련 자료를 뒤적거려 보지만 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10시45분, 드디어 첫 수험생이 호명됐다. 내 차례를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긴장이 풀려 졸음이 밀려온다. 갑자기 “방현영씨!”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나 조교를 따라 면접실로 갔다. 또 기다림.

    면접실에 들어가니 책상 위에는 종이와 펜이 놓여 있다. 조교가 다가와 문제를 뽑으라며 상자를 내민다. 그냥 아무거나 종이를 집었더니 5번. 무슨 문제일까? 조교가 5번 봉투에서 문제를 꺼내 보여준다. “PC네트워크 게임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가? 이익은 무엇이며 폐해는 무엇인가?”

    앞 수험생이 면접하는 동안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고 정리해야 한다. 메모를 해서 가지고 들어가도 된단다. 메모를 시작했다.

    네트워크 게임의 특징:△경쟁자의 범위 확대-무한 공간 속에서 다양한 대결상대를 만나게 해준다. 한정된 공간 속에서 혼자 만족해야 했던 기존 게임과는 다른 새로운 재미를 줌. △게임 질 자체가 높음-다양한 경쟁자가 공존하여 대결할 수 있는 게임이어야 하므로 그 게임이 추구하는 공간이 광범위하며 참여자를 폭넓게 수용해야 하는 유연성.

    청소년의 특징:감성적 행동특성이 발달하여, 재미있는 것은 이성적 판단보다는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강함. 무한 경쟁이 주는 새로운 재미를 가진 네트워크 게임에 빠질 가능성이 다분함.



    이익:다양한 대결상대를 접함으로써 대결력, 생존력을 쌓게 해줌. 네트워크 상에서의 상상력 발휘로 놀라운 경험과 만남이 가능.

    폐해:집착은 청소년 시기에 경험하고 쌓아야 할 인문적 교육기회를 소멸시킴. 사회 현실감각의 상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청소년 교육의 핵심이다.

    다음은 실제 면접 상황이다. 수시모집에서만 요구되는 추천서와 자기소개서 부분을 생략하고 나머지 면접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편의상 A교수, B교수, C교수로 표기한다.

    A:‘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었다고? 어떤 내용이 감명 깊던가?

    나:예. 우선 인간의 특성과 관련된 부분을 체계적으로 학문적 차원에서 접근한 책은 처음이어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유는 인간이 당연히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교육받았고 저는 맹목적으로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자유는 당연히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이 책은 인간에게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을 때 정작 인간은 도피 성향을 띤다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었죠. 의지적인 자발성이 인간에게 먼저 확립되지 않는 한 자유는 인간에게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공감이 갔습니다.

    C:자신의 가장 큰 단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나:토론 등을 할 때 저와 다른 견해로 공격해오는 것이 괴로워서 상대에게 최대한 동조해 주려는 경향이 있죠. 그래서 우유부단하다는 지적도 많이 듣고요. 앞으로 사회과학 쪽을 공부하려고 할 때 약점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C:문제는 몇번을 뽑았지?

    나:5번이요. 청소년 네트워크 게임.

    C:응, 대답해 봐.

    나:예.(대답이 상당히 장황했다. 나름대로 재미있게 설명할 방법을 찾아 고민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스타크래프트에 중독돼 8명씩 다니지 않으면 허전하다는 우스갯소리도 넣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으셨다)

    C:그 게임 내가 안 해봐서 잘 모르지만 급수가 있고 해서 급수별로 돈을 몇백만원씩 걸고 한다면서? 그런 게 청소년에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나?

    나:(웬 돈 문제? 약간 당황. 내가 그것을 배제했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건가?) 저는 그런 경험을 안 해봐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아까 제가 청소년이 게임에 빠져드는 이유가 무한 경쟁심리를 자극함으로써 재미를 극대화하기 때문이라는 측면에서 설명을 드렸죠? 역시 재미의 측면에서 돈을 거는 문제도 설명될 것 같네요. 특히 도박산업이 번창하는 현대사회의 문제와도 연결될 것 같고요. 자본주의 사회이다 보니 금전욕과 관련하여 인간의 욕구가 더 자극되는 것 같고 청소년이 그런 부분을 접하게 되면 역시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마무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좀 당황해서 그랬다)

    B:(미소로만 침묵하던 이 분이 드디어 질문을 한다) 직접 게임을 해봤다고?

    나:예. 네트워크 게임은 아니고요. 제가 한 것은 전략시뮬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B:기존 게임과 어떤 차이가 있었나?

    나:기존 아케이드 게임과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C:좀 구체적으로 얘기하라고. 추상적인 경향이 강하거든. 쉽게 설명해야 네가 얘기하기도 편할 거다.(아케이드니, 전략시뮬레이션이니 하는 용어에 익숙지 않으신 것 같다)

    나:제가 해본 스타크래프트 게임은…(여기서부터 좀더 구체적으로 스타크래프트에 대한 설명을 했다)…실제로 전략 책자를 접해 보니 전략이란 게 정말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좌측공격, 우측공격부터 벙커를 앞에 짓거나 뒤에 짓거나 등등의 수백 수천 가지의 방법에 따라 승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 즉 참여자가 자신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창조적으로 게임에 임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고 차이점인 것 같아요. 어린 동생들보다도 제가 더 게임을 못하는 것이 그런 창조적 대응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면접이 끝난 뒤 참 허탈했다. 나의 모든 것에 관심을 집중해주는 교수님들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들은 단 몇 분의 대화만으로도 나의 본모습을 모두 파악해버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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