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빵 속에 여러 가지 얼굴이 있네!” ‘맛있는 미술관’에 전시된 정연두의 ‘식빵 초상화’를 보는 엄마와 아이.
다 만든 완성작을 들고 자랑스럽게 사진을 찍는 가족에서부터 그만 망가져버린 과자 미술품을 들고 엉엉 우는 아이, 테이블 주변을 뛰어다니며 신나게 노는 꼬마들까지…. 마치 거대한 놀이터에 온 것 같았다. 이모, 동생, 조카들과 함께 왔다는 최수정양(13)은 “과자로도 미술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해요”라며 과자로 만든 집을 들어 보였다. 미술계의 불황으로 조용하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하던 미술관이 이처럼 활기에 넘쳐 들썩거리는 광경은 참 오랜만이었다.
이 미술관의 2, 3층에서도 색다른 미술품을 볼 수 있었다. 허공에 뜬 사과들이 매혹적인 빛을 내는 도흥록의 설치작품 ‘애플 2002-I’을 비롯해서 쌀알을 붙여 책처럼 만든 이동재의 ‘무제’, 시금치 즙과 간장, 고추장 등을 발라 그린 오정미의 ‘다이어리’ 등 음식을 소재로 하거나 아예 음식으로 만든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3층에는 팝콘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과자와 사탕으로 지어진 ‘과자집’까지 있다. 인사아트센터가 기획한 ‘맛있는 미술관’의 모습이다. 전시장 벽에는 ‘만지지 마세요’라는 문구 외에 ‘먹지 마세요’라는 문구도 붙어 있다.
‘프린스, 프린세스’ 전에 전시된 오정미의 ‘과자집’과 유영교의 ‘나비’. “하늘에서 팝콘 눈이 내려요.” 어린이를 위한 기획전에 온 엄마들은 아이 못지않게 즐거운 표정이었다. (위 부터)
입장료가 2만∼3만원인 연극이나 음악회에 비해 미술전시는 2000∼3000원의 ‘부담없는’ 가격에 즐길 수 있는 데다 나이 제한이 없어 온 가족이 함께 관람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얌전하게 앉아 있어야 하는 공연물과는 달리 아이들이 돌아다니며 미술작품을 볼 수 있어서 놀이터 역할도 한다. 여기에 더해 공연이나 전시 등을 보고 감상문을 써야 하는 겨울방학 숙제와 방학을 맞아 어린이들에게 문화체험을 시켜주고 싶은 부모들의 바람도 이 같은 전시가 성황을 이루게 된 요인이다.
‘맛있는 미술관’을 기획한 가나아트센터 윤옥영 연구원은 “매년 방학에 맞춰 어린이전을 열고 있는데 갈수록 호응이 커져간다. 특히 올해의 반응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정도”라고 말했다.
어린이 관객의 위력을 실감한 미술관들은 기획전에 그치지 않고 보다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몇몇 미술관은 어린이들이 본격적인 미술 애호가가 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동안 미술관의 어린이 대상 교육 프로그램은 미술 테크닉을 가르치는 미술학원 형식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성곡미술관의 ‘마음으로 그려요’, 아트선재센터의 ‘작가와 함께 하는 미술관은 놀이터’ 등은 어린이들에게 미술을 감상하는 법을 가르친다. 초등학생(1월4∼26일 토·일)과 유아(1월7∼23일 화·수·목)로 나뉘어진 ‘마음으로 그려요’는 현재 성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추상화의 이해’와 연계한 감상교육 프로그램. 아이들과 부모들이 함께 추상화를 감상하고 추상화를 직접 그려보며 미술 감상법을 배운다. 아트선재센터가 올 3월부터 7월까지 5개월간 여는 ‘작가와 함께하는 미술관은 놀이터’ 전도 이와 비슷하다. 이주요 최두수 함진 석낙희 등 신진 작가들이 어린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미술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다면 아이는 언제부터 미술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실제 전시장에서는 부모가 돌 이전의 아기를 데려온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다. 또 서점에서는 ‘유아를 위한 고흐’ 등의 유아용 미술서적도 찾아볼 수 있다. 채 말도 못하는 아이들에게도 고흐나 르느와르의 그림은 과연 감동적일까.
사회심리전문가인 최창호 박사는 “3, 4세부터 6세까지는 우뇌가 급속히 발달하는 우뇌민감기이기 때문에 이 연령의 아이들은 초등학생보다도 무늬, 색감 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피카소 등 대가의 그림 중에는 아이의 시선으로 그려진 작품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작품들은 어른들보다도 오히려 아이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져요. 또 아동발달 심리학자인 피아제의 ‘쉐마’ 이론에 따르면, 어린 시절 겪었던 경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되살아나죠.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성장한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클래식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러나 무작정 아이 손을 잡고 미술관에 간다고 해서 미술감상 교육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뮤지엄교육연구소 이미지 대표는 아이들과 미술관에서 유익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선 미술관에 오기 전, 부모는 아이들로 하여금 ‘미술관에 가고 싶다’는 동기를 유발해주어야 한다. 많은 아이들이 어떤 전시를 보는지에 대한 기본적 정보조차 없이 부모의 손에 끌려온다고. 아이에게 스스로 인터넷 등을 통해 전시 기본 정보를 찾아보게 하면, 아이는 앞으로 볼 작품들에 대해 기대감을 갖게 된다.
전시장에 와서는 작품을 보고 난 느낌을 아이와 솔직하게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아이들에게 30분 이상의 감상은 무리이므로 아이가 다리 아파하고 지루해할 때까지 전시장을 돌아다니는 것은 금물, 부모 위주의 감상이 계속되면 아이는 ‘보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다. 차라리 아트숍과 카페테리아 등 미술관 내의 다른 시설들을 이용해서 아이로 하여금 ‘미술관은 재미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더 좋다.
‘맛있는 미술관’에서 직접 만든 과자 미술품을 구경하는 관람객들. ‘프린스, 프린세스’ 전에 전시된 박수근의 ‘열대어와 병아리와 벌과 고래’(오른쪽).
어린이를 위한 전시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관람 예절의 실종’. 인기 있는 몇몇 전시장은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고 고함을 질러대는 통에 귀가 멍멍할 정도다. 전시기획자들은 입을 모아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들까지 관람 에티켓을 모르는 것 같다”고 말한다. “프린스, 프린세스’ 전에 전시된 과자집, 거울집과 미끄럼틀 등은 아이들을 위한 설치작품입니다. 그런데 어른들까지 여기를 오르내리는 통에 전시장이 더 혼잡스러워지고 있어요.” 갤러리 현대 박규형 아트디렉터의 지적이다.
또 어린이를 위한 공연과 전시가 서울에만 몰려 있는 것도 문제. 공연장과 미술관에서 만난 부모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지방에서 아이 손을 잡고 상경한 경우였다. 지방에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예술프로그램을 거의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몇 천명의 인파가 몰리는 기획전시와 공연들이 서울뿐 아니라 지방까지 골고루 순회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직 성급한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