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돌베개 펴냄/ 368쪽/ 1만4000원
아우슈비츠로 간 레비는 가스실행을 피해 ‘부나’라고 불리는 제3수용소에서 가혹한 강제노동을 한다.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1945년 1월 27일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5만8000여 명. 하지만 대부분 철군하는 독일에 살해당하고, 중병에 걸려 수용소에 남겨진 7000여 명만 목숨을 건졌다. 레비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꿈에도 그리던 귀향은 녹록지 않았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탓에 열차여행은 10월까지 이어졌다.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루마니아,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통과하는 예측 불가능하고 부조리한 여정. 하지만 그 시간에는 희비극이 함께 녹아 있다. 담임 없는 교실을 휘젓는 악동들처럼, 해방된 포로들은 그들만의 우스꽝스럽고 신나는 잔치를 벌인다.
예컨대 레비의 동료 ‘체사레’는 낭종에 물을 채운 암탉을 속아 샀다가 거기서 오히려 상술을 배운다. 생선 부레에 물을 채워 러시아군에게 비싸게 판 것이다. 또 레비와 동료들은 귀환하는 러시아인들의 말을 잡아먹을 작전을 꾸민다. 살진 말을 골라 사냥한 ‘말고기 스테이크’에 대해 레비는 ‘이것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아우슈비츠 생환자들은 수개월이 더 지나 원기를 회복했을 것’이라고 적는다.
그는 또 ‘길리나’라는 러시아 간호사를 이렇게 묘사하면서 ‘길리나에게는 걱정이라곤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침이면 빨래통을 이고 종달새처럼 노래 부르면서 가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일요일에는 매번 다른 병사와 팔짱을 끼고 산책한다.’라고 한다. 그녀의 약간의 바람기와 명랑함에 대해 묘사한 ‘생을 앞둔 자의 존엄성’이라는 표현은 슬프면서도 웃기다.
전작과 달리, 무거운 상황임에도 레비는 로드무비처럼 경쾌하게 글을 써내려갔다. 이는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 하나하나에 숨결을 불어넣은 덕분이다. 비극을 지나치게 비극처럼 그리면 자괴감과 짜증이 솟구치지만, 담담하게 써내려간 비극은 조용히 마음을 두드린다. ‘휴전’이 그린 50년 전 비극이 카타르시스를 일깨우는 이유다.
‘나는 독일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엄청난 것들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독일인 각각은 우리에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그들 각자가 우리에게 당연히 질문을 할 것이라고,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얼굴에서 읽을 것이라고, 겸손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이라고 나는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고, 자신들의 폐허 속에 피신해 방어하고 있었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 뮌헨에 들른 레비는 독일인들의 질문을 기대했다. 자신들을 수용소로 보낸 그들은 그러나 레비의 눈길을 피했고, 입을 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쏟아낼 증언을 준비하고 있던 레비는 그들의 철저한 무관심에 경악한다. 그런 상황에 혼란과 고통을 느낀 그는 집으로 돌아와 펜을 든다. 두 편의 아우슈비츠 생환기는 아마도 ‘역사를 왜,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인간 본성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레비의 문학적 답변일 것이다.
이미 종전된 상황이었음에도 굳이 ‘휴전’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는 뭘까.
“그것은 숙명적이고 불가피하며 공포스러운 일이 아니라 슬프고도 유쾌한 모험, 광활하고 기묘한 국가들, 여행길의 무수한 친구들의 나쁜 짓,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다채롭고 매력적인 혼돈 등이었다. 당시 유럽은 자유에 취해서 새로운 전쟁의 불안에 떨고 있었다.”
작가의 말에 그 답이 있다. 포로의 신분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전쟁을 치르듯 삶을 견뎌내는 이들에게 세상은, 경비원 없는 수용소와 같았던 것이다. 이 작품은 프란체스코 로지 감독이 1996년에 영화로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