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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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찾을 희망으로 30년 참았다”

귀국한 재독 인사 김성수씨 … 유학 중 간첩으로 몰린 뒤 恨과 분노 그리고 민주화 인생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3-09-24 15: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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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 찾을 희망으로 30년 참았다”

    김성수 한독문화원 회장은 9월19일 해외 민주인사 귀국추진위원회의 초청으로 43년 만에 고국을 찾았다.

    ”여러분들의 따뜻한 얼굴, 다정한 시선을 대하니 30년 세월 맺혔던 한이 조금은 풀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가 영화 속 인물인 것처럼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한순간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었으니까요.”

    청운의 꿈을 안고 독일로 떠났다 간첩으로 몰려 귀국하지 못했던 재독 동포 김성수씨(67·한독문화원 회장)가 9월19일 34년 만에 머리 희끗한 노년이 되어 고국땅을 밟았다. 그는 1973년 최종길 교수 사건과 1987년 파독광부 간첩단 사건 배후조종 등의 혐의를 받아왔다. 이번 방문은 최병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대표 등 200여명의 추진위원과 14개 단체가 결성한 ‘해외 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 보장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집행 위원장 임종인 변호사·이하 귀국추진위)의 노력 덕분이다. 정부가 귀국추진위가 귀국을 신청한 귀국 대상 인사 50명 가운데 36명의 조건 없는 귀국을 허가한 것.

    “독일에는 아직도 귀국하지 못한 30여명의 민주 인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직도 두려워하며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우리만 와서 그분들에게 죄송스럽습니다. 그분들을 위해서 더욱 노력했으면 합니다.”

    “조국 찾을 희망으로 30년 참았다”

    부인 김방지 여사(오른쪽)는 외로운 이국생활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김대중 정권 들어 그에게도 귀국 자체는 허용됐지만 반성문을 써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그는 귀국을 미루어왔다. 1980년대 돌아가신 아버지뿐 아니라 지난해 돌아가신 어머니의 임종도 보지 못해 통한의 눈물을 흘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반성문이나 준법서약서를 쓰거나 국가정보원의 조사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이 과거에 죄를 지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어서 그는 그것을 거부했던 것. 서약서는 종이쪽지 한 장에 불과하지만 그에게는 전 인생을 걸고 지켜온 자존심과 맞바꾸는 것이다.

    부모 임종도 못 지켜 통한의 눈물



    “최종길 교수 사건 때는 유학생 가운데 안기부 직원도 있었는데 개중에는 송두율 교수의 고등학교 2년 선배도 있었습니다. 함께 밥도 먹고 어울렸는데 나중에야 그가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직원인 걸 알았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밖에서 저를 만나자고 해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헤럴드 트리뷴지에서 최종길 교수 사건을 크게 보도해 제가 그 사건에 연루됐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중에 우리 대학 교수 3명이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 정부가 동백림 사건 이후 다시 이런 사건을 조작한다며 안기부 직원을 쫓아내고 저의 정치망명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간첩사건으로 그의 삶은 암흑으로 뒤덮였다.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들 상당수가 등을 돌렸다. 그러나 이 사건은 평범한 철학도였던 그를 민주화운동으로 이끈 계기가 됐다. 당시 독일에서도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이에 힘입어 그와 송두율 이삼열씨 등은 민주사회건설협의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고국의 민주화를 위한 운동을 벌였다.

    “박정희 정권이 몰락하고 민주화의 봄이 오면 우리들도 귀국할 수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상황이 나빠졌습니다. 당시만 해도 고향의 가족들과 전화연락도 안 돼 외로움을 극복하기 힘들었습니다. 이후 전화로라도 어머니나 누이들과 연락이 닿았지만 전화기 저편에서 울기만 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조국 찾을 희망으로 30년 참았다”

    수십년 만에 고국을 방문한 김성수 박사와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관계자 등 33명이 귀국 환영식 행사에 참가해 감격에 겨워하고 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들은 민주화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 하에 통일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1981년 해외기독교통일협의회를 발족해 통일운동을 펴나갔다. 자연히 그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갓 유학 온 이들과 광부들에게 사사로운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광부로 왔다 그와 가까이 지냈던 김모씨는 모친이 위독해 귀국한 뒤 안기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던 중 파독광부 간첩단 사건의 배후로 김성수씨를 지목했다. 그러나 그 뒤 김씨는 독일에 가서 “공안당국의 강요로 거짓 진술을 했다”며 김성수씨에게 무릎 꿇고 잘못을 빌었다고 한다.

    “그동안 아내가 주로 경제활동을 했습니다. 저는 무역업도 하고 시청에서 청소년 담당 교육원 노릇도 했지만 대외활동에 더 치중했지요. 민주화운동 하던 이들은 자기 돈과 시간, 공부, 심지어 가정까지 희생해야 했습니다. 대부분 넉넉하지 못했고, 부부가 함께 활동하던 이들은 더욱 힘들어 가정이 깨지는 일도 많았습니다. 저는 가정이라도 유지했으니 그나마 행복한 축에 들지요.”

    동양철학을 전공해 동서양 철학을 비교하는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간첩사건을 계기로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바꿨다. 당시 독일에서 독일농민전쟁에 대한 관심이 일면서 그는 동학을 떠올렸고, 군사정부에서 금기시했던 ‘동학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시작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근대 사상이 있다는 것을 독일인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 이렇게 해서 그의 논문 주제는 ‘동학농민운동의 이념적 발전’이 됐고, 1980년 그는 튀빙겐대에서 정치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학에 대한 관심은 지금까지 이어져 몇 년 전에는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을 독일어로 처음 번역 출간했다. 이 책은 동양사상에 관심 있는 독일과 스위스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런 인연으로 이번 귀국 뒤 그는 천도교측으로부터 두 번의 강연을 요청받았다.

    독일서 우리말 강습 등 한독 교류 한몫

    그의 소꿉친구이자 전직 교장인 정철현씨(68)는 “공부밖에 모르던 친구가 민주화 투사가 됐다는 것조차 믿어지지 않았다”며 “당국의 감시 때문에 그와 연락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그는 간첩이 아니라 여전히 마음씨 고운 소중한 내 친구”라고 말했다.

    현재 한독문화원 회장을 맡고 있는 김씨는 한국인과 결혼한 독일인들에게 우리말 강습을 하는 한편, 이들 부부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올 가을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한·독 시와 음악의 밤’도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김씨는 아내 김방지씨(60)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고 있다. 최근에는 외손자까지 얻어 할아버지 소리를 듣고 있지만 김씨는 아직도 목소리 카랑카랑한 ‘청년’이다. 서울 종로 비원호텔에서 34년 만에 고국에서 첫 밤을 보낸 다음 아침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심경을 전했다.

    “일어나자마자 비원과 인왕산을 보며 다시 한번 제가 있는 위치를 가늠해보았습니다. 30년 세월이 흘렀지만 조국과의 간극이 빨리 메워질 것 같아 감회가 새롭습니다. 전부터 산 타는 걸 좋아했는데 옛친구들과 함께 시간 내어 산행을 하며 우리 땅의 냄새를 맘껏 맡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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