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썰렁한 전주 남부시장. 남부시장 상인들은 “할인점 때문에 손님이 뚝 끊겼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할인점이 지방 중소도시에 진출해 기존 상권을 윽박지르며 재래시장과 영세 상인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대규모 유통업체의 공세에, 설상가상으로 소비심리마저 위축되면서 “장사로는 호구조차 어렵다”는 하소연이 곳곳에서 들린다. 유통산업 현대화가 늦은 지방일수록 할인점의 등장으로 인한 충격은 더 크다. 일부 상인들은 하루 매출 5만원을 올리기도 버거운 실정이다. 4월 발표된 산업자원부의 조사 결과, 대형 할인점 주변의 중소 소매상인 10명 중 9명이 할인점이 들어선 이후 매출이 급감했다고 응답했다. 상인들이 할인점의 대형트럭을 향해 “돈을 가득 싣고 서울로 올라가고 있다”며 욕설을 퍼붓는 것도 모두 바닥으로 떨어진 매출액 때문이다.
“할인점 통해 돈은 서울로 … 지방 돈 씨 마른다”
9월18일 오후 충북 청주시 서문시장. 청주 최고의 시장이었다는 이곳은 이가 빠진 듯 상가 곳곳의 셔터가 내려져 있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시장 입구에서 순댓가게를 하는 원용덕씨(62)는 “다 죽었다. 할인점 때문이다. 돈이 여기서 돌아야 하는데 청주 밖으로 다 나간다. 언제까지 장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3억원이 넘던 2층짜리 건물의 시세는 1억원 남짓으로 곤두박질쳤고, 시장 세입자들의 권리금은 사라진 지 오래다. 서문시장이 쇠락한 것 역시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할인점 탓이다. 인구 60만명인 청주에 할인점이 8개나 들어섰으니 기존 상권이 몰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해엔 설상가상으로 서문시장 정문 바로 앞에 까르푸(한국까르푸 운영)가 매장을 열어 신음하던 시장은 직격탄을 맞고 사실상 ‘사망했다’.
찬거리를 사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려야 할 오후 시간인데도 3시간 동안 시장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채 10명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물건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직까지 시장을 지키고 있는 상인들은 “마땅히 소일거리가 없어 문만 열어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고춧가게를 하는 심승춘씨(65)는 “40년째 장사를 해왔는데 지금처럼 파리를 날린 때가 없었다”며 혀를 찼다. 이웃한 대전상회의 신동근씨(65)는 “매출이 전혀 없다”며 거인처럼 서문시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까르푸 건물을 흘겨봤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 물건을 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전북 전주시 남부시장 상인들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 차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던 남부시장은 그 화려한 명성을 뒤로 한 채 겨우 자리만 보전하고 있었다. 채소, 건어물, 가구, 그릇, 주단, 양품, 가방, 옷, 식료품 등 물건의 종류는 없는 게 없지만, 수십년 된 낡은 건물과 화장실 하나 찾기 어려운 낙후된 시설은 과거의 명성을 무색케 한다. 손님을 기다리다 지친 몇몇 상인들은 아예 누워 곤한 잠을 청하거나,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소일한다.

청주 서문시장의 한 상인이 손님을 기다리다 지쳐 잠들어 있다.
남부시장에서 그릇가게를 30년간 운영해온 이창재씨(56) 부부의 고민도 깊어만 간다. 과거 이씨 부부는 하루 매출 30만~40만원의 짭짤한 수익을 올려 주위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1998년 전주에 할인점이 들어서면서 이씨 부부에게도 시련이 다가왔다. 정신없이 가게를 찾던 손님들은 온데간데없고, 하루 3만원의 매출이라도 올리면 ‘장사 잘했다’고 말할 정도가 됐기 때문. 한 달 순이익이 고작 60만원에 불과한데 현재 다섯 가족의 생활비는 200만원이 넘게 든다고 한다. 그나마 과거에 저축해놓은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씨 부부는 “몇 십년간 똑같은 장사를 해온 사람이 이제 와서 무슨 일을 하겠느냐”며 고개를 떨궜다.
할인점으로 인한 충격은 인구가 50만명이 넘는 중급 도시보다 인구 10만~20만명 단위의 소도시에서 훨씬 크다. 인구 60만명의 청주, 전주 상권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데 각각 할인점 8개, 5개가 필요했다면 그보다 작은 도시에선 1~2개의 할인점이 전체 상권을 초토화하고 있다.

폐업한 점포가 많아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청주 서문시장.
평화시장은 할인점 2곳의 공격을 받고 시장의 기능을 잃었다. “폐업하는 가게가 늘고 있느냐”는 질문에 상인연합회 회장 이승호씨(43)는 “시장 상가의 절반이 가게를 내놓았다”며 한숨으로 답을 대신했다. 내놓은 가게가 팔리지 않는 터라 상인들은 발만 동동 구르며 찾는 이 없는 가게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시장 곳곳에선 화투판과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료함도 달랠 겸 재미 삼아 치고 마시는 거란다. 할인점 얘기라도 꺼낼라치면, 육두문자 섞인 고성 아니면 한탄이 돌아왔다. 한 상인은 “평화시장에서 장사해 자식들을 대학까지 보냈다”며 “장사도 안 되는데 술기운으로라도 버텨야지 그나마도 없었으면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손님도 없는데 진열은 무슨…’ 추석 전에 들여놓은 물건을 그대로 쌓아놓은 청주 서문시장의 한 가게.
김씨의 말처럼 김천시 중앙시장 우시장 등도 ‘죽어나는’ 모두 매한가지다. ‘시내’라고 불리는 역전 거리도 예전 같으면 북새통을 이뤘을 오후 9시께 대부분의 업소가 셔터를 내리기 시작했다. 장인의 정육점을 지키고 있던 최재화씨(30)는 “추석 대목에도 벌이가 거의 없었다”며 “김천에선 더 이상 장사로 밥 벌어먹기는 힘들게 됐다”고 한탄했다.
영세상인뿐만 아니라 중소도시 내의 제조업자들의 할인점에 대한 불만도 극에 달한 상태다. 기존 상권에 납품을 해오던 청주의 제조업자들과 도매업자들은 상권이 죽으면서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고 한다. 청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이두영 사무처장은 “할인점의 공격으로 영세 소매상뿐만 아니라 도매업자들까지 무너지고 있다”며 “외지 물품이 청주에 쏟아져 청주 상품의 판로가 막히고 있으며 수익금을 서울로 가져가는 탓에 청주 경제가 빠르게 공동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북 익산 중앙시장에서 20년 동안 양말장사를 해왔다는 K씨는 “며칠째 하나도 팔지 못했다”며 울상을 지었다.
할인점의 대규모 공습에 넋을 잃고 당하기만 한 상인들은 업종 변경도, 경영 개선도 어렵다고 호소한다.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해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는 ‘시장 재건’을 내걸고 낙후시설에 투자하거나 ‘공무원 한 달에 한 번 시장 가기’ 등의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대형 유통자본의 공세에는 역부족이다. 충북대 이만형 교수(도시공학)는 “할인점으로의 지역상권 집중과 이에 따른 지역 상인들의 몰락이 가뜩이나 어려운 지방경제의 숨통을 시시각각 조이고 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