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를 넘어선 오후 3시, 숨막힐 듯 땀냄새가 가득한 모 부대 여름캠프의 IBS(고무보트) 훈련장. 햇볕에 벌겋게 얼굴이 익은 10대 여학생들이 10여 명씩 조를 지어 육중한 고무보트를 이용한 훈련을 받고 있다. 머리 위로 들어올린 고무보트의 무게에 여학생들의 몸이 휘청거린다. 이쯤은 별것 아니라는 표정에서부터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얼굴까지 모두 제각각이다.
“목소리가 작습니다!” 모자를 눌러쓴 교관의 호통에 화들짝 놀란 학생들의 목소리가 금세 커진다. “잘 할 수 있습니까?” “악!” “아직도 소리가 작습니다. 잘 할 수 있습니까?” “악!”
해병대 훈련에서는 ‘예’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해병대의 전통에 따라 훈련장에서는 모두 ‘악’이라는 말로 ‘예’를 대신한다.
훈련장 바로 옆에는 같은 나이 또래의 남학생들이 얼차려(기합)를 받는 중. 노 젓기 훈련도중 몇몇 친구들이 꾀를 피운 것이 화근이었다. “하나에 정신, 둘에 통일입니다!” 교관의 지시에 따라 계속되는 팔 굽혀 펴기와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남학생들의 얼굴은 땀과 흙먼지로 얼룩졌다.
이들은 해병대가 97년부터 해마다 개최하는 하계캠프 참가자들. 모두 1600명의 참가자들이 4개 기수로 나뉘어 훈련을 받았다. 해병캠프 참가자의 80%에 이르는 10대 청소년들은 4박5일 간 내무생활 훈련, 유격, 각개전투, 산악행군 등의 과정을 거쳤다.
“기합을 너무 많이 받아 몸이 힘들어요. 그렇지만 체력적으로 큰 도움이 되겠죠.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고요. 그래도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네요.” 강원도 인제에서 온 한현정양(14)의 말이다. “부모님의 강권에 억지로 끌려왔다”고 말하는 정보람양(17, 충남 천안)은 반복되는 선착순과 오리걸음이 불만이다. “하루 종일 언제 끝날까 하는 생각만 해요. 그나저나 지금 몇 시에요?” 교육생은 시계를 갖고 다닐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물론 자원자들만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 이번 해병캠프에 참가한 사람의 경우 긍정적인 반응도 많았다. 고된 훈련에도 밝은 표정인 박재관군(16, 인천 부평동)은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힘도 세진 것 같고 색다른 경험도 하니 좋잖아요. 학교나 집에 돌아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해병대 관계자에 따르면 예전에 캠프에 참가한 교육생이 다시 지원하는 경우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98년 ‘IMF 경제위기를 이기자’는 구호와 함께 번져나간 군대식 극기훈련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이미 해병대뿐 아니라 ‘경찰특공캠프’ ‘특전사 병영체험활동’, 지역 예비군부대의 ‘청소년 체험훈련’ 등으로 확산하고 있다. 여기에 10여 개의 민간업체가 유격훈련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해마다 각급학교에서 단체로 열리는 수련활동 역시 상당수는 군대식 훈련을 모방한 프로그램들이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해병대 관계자들은 훈련과정을 통해 어려움을 이기는 능력과 안보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고 설명한다. 더욱이 학생들의 나이와 체력에 맞게 재구성했을 뿐더러, 훈련과정 내내 구급차가 대기하므로 안전사고 위험 역시 거의 없다는 전언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훈련을 받아본 사람의 의견은 어떨까. 지난해 여름 신입사원 연수 때 한 민간업체의 해병대식 극기훈련에 참가했다는 은행원 A씨(25)는 효과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린다. “협동심을 기른다는 차원에서는 의미가 있겠죠. 그렇지만 업무와 관련한 성과는 거의 없었다고 봐요. 체력조건이 안 되는 사람을 열등한 사람으로 취급한다거나 조직에 해가 되는 것처럼 매도하는 분위기에는 반감이 생기죠.” 애사심을 위해 마련한 캠프가 오히려 애사심을 꺾는 부작용도 초래했다고 A씨는 말한다. “얼차려를 받다 보면 자연히 이런 걸 시키는 회사가 원망스러워지더라고요. 심하진 않았지만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도 있고요.”
서울 강남구 테헤란밸리에 있는 한 벤처기업에 근무하는 B씨(30)는 좀더 비판적이다. 이 회사는 지난 여름 전 직원이 군부대에서 훈련받은 바 있다. “간부에서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것 외에 장점은 전혀 없었다고 봅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생명인 벤처기업에서 집단훈련으로 분위기가 일신되리라 기대하는 것도 앞뒤가 안 맞는 것 아닙니까.” B씨는 극기나 자아성취와 같은 기쁨을 맛보기도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원해서 참여했다면 달랐을지 모르지만, 강제로 참여하는 한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군사문화에 기대어 구성원들을 강제하려는 옛 기업문화의 잔재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효과가 있었다면 그날 하루뿐이었죠.” B씨는 래프팅이나 팀워크 훈련 같은 형태의 극기훈련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삼성인력개발원 HRD컨설팅팀의 손영수 팀장은 1990년대 후반 들어 이러한 훈련방식은 그 효용이 줄어들었다고 설명한다. 삼성의 경우 27일의 신입사원 합숙기간 중 ‘한계극복교육’은 단 하루뿐. 다른 기업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는 지난해 오랜 전통이던 신입사원들의 설악산 대청봉 산행을 없앴다. 손팀장은 “아무래도 창의와 자율을 강조하는 시대다 보니 주어진 환경을 참고 견딜 것을 요구하는 극기훈련의 의미가 엷어진 것이다”고 분석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 8월7일에는 경남 진해 해군훈련장에서 ‘1박4일’의 UDT훈련을 받기 위해 입소한 양궁 국가대표 선수들이 훈련을 거부하고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양궁협회는 논의 끝에 이탈선수 전원에게 1~5년 간 대표자격을 박탈하고 선수촌에서 퇴촌하는 중징계를 내렸다. 논란의 핵심은 과연 이러한 극기훈련이 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이었느냐는 것.
당초 훈련장 입소에 부정적이었다는 선수팀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미 많은 국제대회 참가 경험이 있는 선수들에게 극기훈련이 효과가 있느냐는 논란이 있었다. 세계대회가 임박한 상황에서 오히려 실전경험이나 연습경기가 필요한 것 같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한편 한국청소년개발원의 이광호 박사는 얼차려 같은 다분히 폭력적인 자극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얻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 또 황상민 교수(연세대 심리학)는 “극한체험 훈련이 효과를 얻으려면 무엇보다 당사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기가 원해서 참여한 경우에는 모든 과정이 긍정적인 경험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 이 점에 대해서는 훈련 담당자들도 대부분 인정한다. 단체로 오는 경우 개인 지원자들보다 중도 탈락자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훈련 재개를 알리는 교관의 목소리가 들리자 학생들은 모두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훈련장으로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열을 맞추는, 군인 못지않게 군인스러워진 10대들이었다. 그러나 어려움을 이기고 한계를 극복해 내는 경험에는 ‘집합이 늦어지면 얼차려를 받아야 하는’ 군대식 훈련밖에 없는 것일까. 시대의 흐름에 맞는 합리적인 방식은 없는 것일까. 뜨겁게 내리쬐는 8월의 태양 아래서 쪼그려뛰기를 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는 기자의 머리 속에서는 내내 이런 의문이 맴돌았다.
“목소리가 작습니다!” 모자를 눌러쓴 교관의 호통에 화들짝 놀란 학생들의 목소리가 금세 커진다. “잘 할 수 있습니까?” “악!” “아직도 소리가 작습니다. 잘 할 수 있습니까?” “악!”
해병대 훈련에서는 ‘예’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해병대의 전통에 따라 훈련장에서는 모두 ‘악’이라는 말로 ‘예’를 대신한다.
훈련장 바로 옆에는 같은 나이 또래의 남학생들이 얼차려(기합)를 받는 중. 노 젓기 훈련도중 몇몇 친구들이 꾀를 피운 것이 화근이었다. “하나에 정신, 둘에 통일입니다!” 교관의 지시에 따라 계속되는 팔 굽혀 펴기와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남학생들의 얼굴은 땀과 흙먼지로 얼룩졌다.
이들은 해병대가 97년부터 해마다 개최하는 하계캠프 참가자들. 모두 1600명의 참가자들이 4개 기수로 나뉘어 훈련을 받았다. 해병캠프 참가자의 80%에 이르는 10대 청소년들은 4박5일 간 내무생활 훈련, 유격, 각개전투, 산악행군 등의 과정을 거쳤다.
“기합을 너무 많이 받아 몸이 힘들어요. 그렇지만 체력적으로 큰 도움이 되겠죠.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고요. 그래도 다시 오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네요.” 강원도 인제에서 온 한현정양(14)의 말이다. “부모님의 강권에 억지로 끌려왔다”고 말하는 정보람양(17, 충남 천안)은 반복되는 선착순과 오리걸음이 불만이다. “하루 종일 언제 끝날까 하는 생각만 해요. 그나저나 지금 몇 시에요?” 교육생은 시계를 갖고 다닐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물론 자원자들만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 이번 해병캠프에 참가한 사람의 경우 긍정적인 반응도 많았다. 고된 훈련에도 밝은 표정인 박재관군(16, 인천 부평동)은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힘도 세진 것 같고 색다른 경험도 하니 좋잖아요. 학교나 집에 돌아가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해병대 관계자에 따르면 예전에 캠프에 참가한 교육생이 다시 지원하는 경우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
98년 ‘IMF 경제위기를 이기자’는 구호와 함께 번져나간 군대식 극기훈련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이미 해병대뿐 아니라 ‘경찰특공캠프’ ‘특전사 병영체험활동’, 지역 예비군부대의 ‘청소년 체험훈련’ 등으로 확산하고 있다. 여기에 10여 개의 민간업체가 유격훈련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해마다 각급학교에서 단체로 열리는 수련활동 역시 상당수는 군대식 훈련을 모방한 프로그램들이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해병대 관계자들은 훈련과정을 통해 어려움을 이기는 능력과 안보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고 설명한다. 더욱이 학생들의 나이와 체력에 맞게 재구성했을 뿐더러, 훈련과정 내내 구급차가 대기하므로 안전사고 위험 역시 거의 없다는 전언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훈련을 받아본 사람의 의견은 어떨까. 지난해 여름 신입사원 연수 때 한 민간업체의 해병대식 극기훈련에 참가했다는 은행원 A씨(25)는 효과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린다. “협동심을 기른다는 차원에서는 의미가 있겠죠. 그렇지만 업무와 관련한 성과는 거의 없었다고 봐요. 체력조건이 안 되는 사람을 열등한 사람으로 취급한다거나 조직에 해가 되는 것처럼 매도하는 분위기에는 반감이 생기죠.” 애사심을 위해 마련한 캠프가 오히려 애사심을 꺾는 부작용도 초래했다고 A씨는 말한다. “얼차려를 받다 보면 자연히 이런 걸 시키는 회사가 원망스러워지더라고요. 심하진 않았지만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도 있고요.”
서울 강남구 테헤란밸리에 있는 한 벤처기업에 근무하는 B씨(30)는 좀더 비판적이다. 이 회사는 지난 여름 전 직원이 군부대에서 훈련받은 바 있다. “간부에서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것 외에 장점은 전혀 없었다고 봅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생명인 벤처기업에서 집단훈련으로 분위기가 일신되리라 기대하는 것도 앞뒤가 안 맞는 것 아닙니까.” B씨는 극기나 자아성취와 같은 기쁨을 맛보기도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원해서 참여했다면 달랐을지 모르지만, 강제로 참여하는 한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군사문화에 기대어 구성원들을 강제하려는 옛 기업문화의 잔재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효과가 있었다면 그날 하루뿐이었죠.” B씨는 래프팅이나 팀워크 훈련 같은 형태의 극기훈련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삼성인력개발원 HRD컨설팅팀의 손영수 팀장은 1990년대 후반 들어 이러한 훈련방식은 그 효용이 줄어들었다고 설명한다. 삼성의 경우 27일의 신입사원 합숙기간 중 ‘한계극복교육’은 단 하루뿐. 다른 기업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는 지난해 오랜 전통이던 신입사원들의 설악산 대청봉 산행을 없앴다. 손팀장은 “아무래도 창의와 자율을 강조하는 시대다 보니 주어진 환경을 참고 견딜 것을 요구하는 극기훈련의 의미가 엷어진 것이다”고 분석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 8월7일에는 경남 진해 해군훈련장에서 ‘1박4일’의 UDT훈련을 받기 위해 입소한 양궁 국가대표 선수들이 훈련을 거부하고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양궁협회는 논의 끝에 이탈선수 전원에게 1~5년 간 대표자격을 박탈하고 선수촌에서 퇴촌하는 중징계를 내렸다. 논란의 핵심은 과연 이러한 극기훈련이 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이었느냐는 것.
당초 훈련장 입소에 부정적이었다는 선수팀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미 많은 국제대회 참가 경험이 있는 선수들에게 극기훈련이 효과가 있느냐는 논란이 있었다. 세계대회가 임박한 상황에서 오히려 실전경험이나 연습경기가 필요한 것 같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한편 한국청소년개발원의 이광호 박사는 얼차려 같은 다분히 폭력적인 자극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얻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 또 황상민 교수(연세대 심리학)는 “극한체험 훈련이 효과를 얻으려면 무엇보다 당사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기가 원해서 참여한 경우에는 모든 과정이 긍정적인 경험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 이 점에 대해서는 훈련 담당자들도 대부분 인정한다. 단체로 오는 경우 개인 지원자들보다 중도 탈락자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훈련 재개를 알리는 교관의 목소리가 들리자 학생들은 모두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훈련장으로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열을 맞추는, 군인 못지않게 군인스러워진 10대들이었다. 그러나 어려움을 이기고 한계를 극복해 내는 경험에는 ‘집합이 늦어지면 얼차려를 받아야 하는’ 군대식 훈련밖에 없는 것일까. 시대의 흐름에 맞는 합리적인 방식은 없는 것일까. 뜨겁게 내리쬐는 8월의 태양 아래서 쪼그려뛰기를 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는 기자의 머리 속에서는 내내 이런 의문이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