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계 없음.
5월 초 급성 담낭(쓸개)염으로 서울 모 병원에 입원한 A씨는 입원 닷새째 되는 날 원무과를 찾았다. 본인이 부담할 치료비는 600여만 원. 일정한 수입이 없는 그는 인터넷 검색 중 알게 된 ‘응급의료비 대불제도’를 이용해 병원비를 내려 했지만 원무과에서는 한사코 “안 된다”고 했다. A씨는 “처음에는 비급여 치료비 때문에 안 된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내가 의료급여 수급자(옛 의료보호 대상자)라는 이유로 말렸다”고 전했다. A씨는 끝내 ‘응급의료비 대불제도’를 이용하지 못했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따라 모든 국민은 응급의료를 받을 권리가 있고, 응급의료 종사자는 응급환자를 발견하는 즉시 치료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만일 응급 상황에 처한 환자가 병원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더라도 병원은 치료를 거부할 수 없다. 의료진이 응급환자를 치료했는데 환자가 치료비를 내지 못하면 그것은 오롯이 병원의 손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의료진은 응급환자에 대한 치료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을 우려가 있다.
온갖 이유 들어 제도 이용 막는 병원
‘응급의료비 대불제도’란 이런 허점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다. 촌각을 다투는 응급환자가 당장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국가가 응급의료비를 대신 내주고, 나중에 환자가 국가에 상환하도록 만든 것.
국민 누구나 법률이 정한 응급 상황에 해당하면 병원 원무과나 응급실에 응급의료비 대불제도를 신청할 수 있다. 의료급여 수급자도, 한국에 불법 체류하는 외국인 노동자도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환자가 신청하면 병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에 대불 신청을 하고, 최소 한 달 이후 환자가 미납한 응급의료비를 국가가 대신 내준다. 심평원은 이후 환자에게 “국가가 대신 지불한 응급치료비를 갚으라”며 환자에게 치료비를 청구하는데, 환자는 이 비용을 최장 12개월까지 분할 상환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급하게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돈이 없는 사람에게 이 제도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다. 하지만 아직 이를 이용하는 환자는 많지 않다. 심평원은 2010년 6422건의 응급의료비 대불 신청을 받아 24억4000억 원을 지급했다. 심평원 한 해 예산(2303억 원)의 1% 수준이다. 중앙응급의료센터가 2010년 조사한 결과 ‘응급치료비 대불제도를 알고 있다’고 답한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10%에도 못 미쳤다.
사실 응급의료비 대불제도는 심평원이나 병원에 모두 부담스럽다. 이 제도는 1995년 도입됐지만 정부는 지난해까지 홍보에 미온적이었다. 심평원 의료급여관리부 김인욱 차장은 “국가 예산은 매년 한정돼 있기 때문에 모든 응급환자에게 대불 지원을 하기는 쉽지 않다”고 전했다.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의 한 관계자는 “응급의료비 대불제도는 국가가 최후 보루로 제공하는 서비스고, 최근 신용카드가 보편화됐기 때문에 이 제도가 필요한 환자는 극소수”라고 말했다. 이에 한국암환자환우회 박진석 사무국장은 “도움 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놓고도 열심히 홍보하지 않는 것은 심평원과 복지부의 직무 유기”라고 비판했다.
병원 역시 이 제도가 달갑지 않다. 실제 응급치료비 대불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환자에게도 “이용 대상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거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근 급성대사장애로 서울 S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B씨 역시 병원에 응급의료비 대불제도를 신청했지만 끝내 이용하지 못했다. B씨는 “병원에서 ‘임금, 근로소득,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한 후 대불제도를 신청할 수 있는데 그럼 후속 치료를 하는 데 차질이 생긴다’며 말렸다”고 말하면서 “결국 고리로 대출받아 치료비를 지불했다”며 억울해했다.
내년 예산 40억 확대에도 여전히 부족
병원 처지에선 행려병자처럼 마땅히 돈을 받을 곳이 없는 환자를 치료한 경우에는 국가가 비용을 지원해주니 도움이 된다. 하지만 치료비가 지급되기까지 최소 한 달이 걸리기 때문에 응급의료비 대불제도를 이용하는 환자가 달가울 리 없다. 게다가 병원은 심평원에 이 제도를 신청할 때 환자진료기록, 응급진료비 미납확인서 등 5개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데 여기에도 인력과 시간이 투입되니 병원 측으로선 껄끄러울 수 있다.
건강세상네트워크 박용덕 사무국장은 “사실 이 제도는 병원 손실을 막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수혜자는 병원이다. 하지만 오히려 병원 측에서 이 제도를 달가워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환자가 응급치료비 대불제도를 신청하면 병원은 토를 달지 않고 신청해줘야 하지만, 순순히 받아들이는 병원은 거의 없다. 병원으로선 한 달 이후 치료비를 국가에서 보전받으니 손해가 아니지만, 절차가 귀찮고 치료비를 빨리 받고 싶은 마음에 환자에게 이 제도를 소개하지 않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병원 역시 할 말은 있다. 모 수도권 대학병원 관계자는 “심평원의 검사가 까다롭기 때문에 서류 준비를 꼼꼼히 해야 한다”며 “만일 환자가 무단 퇴원할 가능성이 있거나 신분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는 응급의료비 대불제도를 이용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또한 “병원 역시 영리단체고, 만일 병원이 진료 서비스를 제공해놓고 돈을 못 받아 손실을 입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다른 환자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병원으로선 치료비 수급을 위한 ‘확실한 방법’을 쓰는 게 낫다”고 덧붙였다.
심평원과 복지부는 2010년부터 이 제도를 국민에게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심평원은 최근 홍보용 포스터 7500부를 제작해 전국 시도 및 시군구, 주민센터 등 3000여 기관에 배포했다. 한 관계자는 “최근 이 제도의 성격이 정부의 ‘친서민 정책’과 맞아떨어지면서 복지부의 관심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심평원 김인욱 차장은 “올해 예산은 22억 원 정도지만 현재 논의 중인 2011년 예산안에는 40억 원 정도로 책정될 예정이다. 병원이 제출하는 문서도 간소화할 전망”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의료계 전문가는 단순한 예산 확대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전망했다. 박용덕 사무국장은 “병원이 환자의 응급의료비 대불제도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처벌할 규정이 없는 것이 문제”라며 “이 제도가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병원을 처벌할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환자가 병원이 아닌 심평원에 바로 응급의료비 대불제도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하면 병원의 횡포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이에 대해 김 차장은 “응급인 만큼 심평원보다 병원에서 직접 처리하는 편이 훨씬 더 신속하다”면서 “예산을 확대하고 대국민 홍보를 늘려 더 많은 환자가 응급의료비 대불제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