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은 제갈량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그 위에 제갈량의 일생을 묘사한 긴 시를 썼다. ‘제갈무후도’(1695년).
어느 해 정역간은 두 친구와 함께 과거시험을 볼 겸, 관광할 겸 한양에 올라왔다. 그들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시내 구경에 나섰다. 창덕궁 담을 끼고 걸어가는데, 두 친구가 역간을 골려주고자 국왕이 사는 그곳을 부잣집이라고 속여 한번 넘어가보라고 권했다.
영문을 모르는 역간은 호기심에 친구들의 어깨를 타고 담을 넘어 들어갔다. 넓은 정원을 지나 한참을 들어가니 큰 전각(殿閣)이 나타났는데, 문은 활짝 열려 있고 불이 대낮처럼 환하게 켜 있었다. 수만 권의 서적이 들어찬 방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역간은 많은 책 중에 평소 보고 싶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 있어 감격한 나머지 책을 펴들고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그 방은 바로 숙종의 서재로, 마침 숙종이 산책하러 나간 사이 역간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숙종이 돌아와 보니 괴이하게 생긴 선비가 자신의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국왕은 이 당돌한 선비를 놀려주기로 마음먹고 “제가 이 집 주인입니다만, 댁은 누구십니까?”라고 말하면서 시작(詩作)을 제의했다. 국왕이 먼저 시를 지으면 역간이 이에 대구(對句)하는 식이었다.
역간의 문재(文才)가 뛰어남을 알아차린 국왕은 모처럼 인재를 발견한 것을 내심 기뻐했다. 숙종은 곧바로 술상을 차려 역간을 대접했으며, 초지(草紙·초벌로 쓰는 종이) 한 권을 주고 내일 과거 답안은 꼭 이 종이에다 쓰라고 했다. 물론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은 숨겼다.
서재를 찾아온 시골 선비 놀려주기
그 후 역간은 여관에 돌아와서 두 친구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들은 친구들은 다시 역간을 속이기로 마음먹고 “초지는 약해서 찢어지기 쉬우니 다른 종이를 사주겠다”면서 초지는 자기네들이 들고 이튿날 과거시험장에 들어갔다. 시제(試題)는 ‘불천석(不踐石)’이었다. 그러나 옆의 친구가 역간의 글을 보고 “그건 틀렸어”라고 하자 역간은 답안지를 찢고 다른 글을 지었다.
역시 명문이었으나 또 한 친구가 “그것도 틀렸으니 다시 쓰라”고 했다. 역간은 답안지를 또 찢어버렸다. 두 친구는 역간이 버린 답안지를 얼른 주워 초지에 옮겨 쓰고 자신들의 이름을 적어 제출했다. 숙종은 많은 답안지 중에 초지가 둘이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답안지 작성자를 불러냈으나 사람이 다른 것을 알고 그 사연을 엄격히 따졌다.
두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숙종은 역간을 어전에 불러놓고 웃으며 “그대는 관리로서 적합하지 않으니 고향에 내려가 책이나 읽는 게 좋겠네”라고 어명을 내렸다. 그 후 역간의 별명은 ‘춘추(春秋)’로 불리게 됐고, 그것이 다시 천치(天痴)로 변해 천치 정역간이 탄생했다.
숙종과 관련된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미행(微行)을 나온 숙종은 젊은 여인이 홀로 밭일하는 것을 봤다. 밭둑 수양버들 그늘 밑에서는 아기가 잠을 자고 있었다. 숙종이 무슨 사연인지 알아보려고 여인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여인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리를 돌리더니 멈췄던 호미질을 계속했다. 마치 ‘웬 건달이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라는 태도였다.
숙종은 여인의 말문을 열어볼 생각으로 재차 말을 건넸으나 여인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렇다고 물러서기도 쑥스럽게 된 숙종은 어떻게 하면 이 난처한 상황을 모면할까 하여 잠시 머뭇거렸다. 바로 그때 그늘 밑에서 자던 아기가 깨어나 울었다. 숙종은 곧장 그늘 밑으로 달려가 아기를 안고 달래며 여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제야 여인은 호미를 놓고 일어서서 아기를 받아 젖을 물리며 머리에 쓴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그러자 숙종은 말없이 밭 가운데로 나가 호미를 들고 풀포기 밑을 마구 끼적거렸다. 여인은 숙종의 모습이 어색해 보였는지 웃으면서 만류했고, 숙종이 못 이기는 척 허리를 펴며 여인을 쳐다보니 여인의 냉랭한 표정이 어지간히 풀린 듯했다.
숙종이 호미를 놓고 손을 툭툭 털며 나무 그늘로 오면서 “여자의 몸으로 이 넓은 밭을 어떻게 맬 작정이오? 그래, 도움이 될지 누가 알겠소. 어디 사정 얘기나 들어봅시다”라며 광주리를 가운데 놓고 여인과 마주앉았다. 여인은 숙종의 정색한 표정에 적이 안심이 됐는지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사연인즉 몇 해 전 남편 친구의 호의로 토지 한 뙈기를 빌려 소작을 했는데, 올해 봄 남편이 갑자기 아내와 갓난애를 남겨놓고 죽었다는 것이다. 의탁할 곳 없는 젊은 과부는 농사라고는 겨우 지난해와 올해에만 지어봤을 뿐 농사 지식이 전혀 없고, 그렇다고 중도에 그만둘 형편도 아니어서 힘닿는 대로 정성을 다할 뿐이라 했다. 여인은 “한창 나이에 떠난 남편의 뒤를 못 따른 미망인이 무에 떳떳하겠습니까”라며 눈물을 흘렸다.
얘기를 듣고 난 숙종은 눈시울이 뜨거워져 “아주머니, 너무 낙심 마십시오. 남기고 간 소중한 혈육이 있지 않소”라며 위로한 뒤 일어나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그럼 상심 말고 일 잘하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떠났다. 잠시 후 그는 10여 명의 농부를 데리고 여인이 일하는 곳으로 왔다. 호미질에 열중하던 여인은 뜻밖에 사람들이 몰려들자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숙종은 여인을 본 척도 않고 밭을 가리키며 농부들에게 일을 부탁했다.
숙종은 농부 두 사람을 시켜 술을 받아오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밭에서는 농부들의 농부가(農夫歌)가 가락마다 흥이 났다. 숙종이 주위를 잊고 행복한 생각에 잠긴 동안, 어느새 농부들이 일을 끝냈다. 그 후 보기만 해도 목젖이 꿀떡거리는 막걸리와 누르스름한 대구포를 놓고서 술잔이 몇 차례 돌았고 통성명이 이어졌다.
농부들과 대작하며 격의 없는 담소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농부가 대구포를 씹어가며 숙종에게 “댁은 뉘시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숙종은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나는 이 서방이라 불러주시오. 크으∼ 술맛 참 좋다. 이거 뉘 집 솜씨요?”라며 말꼬리를 돌리려 했다.
그때 저편 소나무 그늘에서 낯선 사람들이 나타나 ‘이 서방’ 앞에 엎드려 절하며 “상감마마, 미처 대령치 못해 황공하옵니다”라고 하자, 지나가던 한량인 줄 알고 너니 내니 같이 떠들던 농부들은 질겁하며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본색이 드러난 숙종은 더 이상 농부들과 어울릴 수 없자 “흥이 깨져 안 됐는걸. 상관 말고 끝까지 담소를 나누라”며 지금까지의 이 서방과는 달리 의젓한 거동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당황한 농부들을 안심시켰다. 농부들은 물론 여인도 그 앞에 엎드렸다.
“죄송하옵니다. 이 지각없는 백성들의 무엄한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숙종은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용서할 일 없다. 내 오히려 즐거웠거늘”이라며 관원이 대령한 말에 올라 궁궐로 향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를 살면서도 우리 선조들은 상하귀천을 뛰어넘어 웃음을 잃지 않았고, 이러한 웃음 속에서 국왕과 국민은 신분적 거리감보다 오히려 따뜻한 인간의 정을 발견했다. 물질적으로는 지금의 우리보다 어려웠지만 해학의 자유를 만끽한 선조들이 부러워지는 것은 어쩌면 지금 우리가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