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니스 Y.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문학동네 펴냄/ 480쪽/ 1만2000원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사람이 어느 순간 그 사랑이 지겹다고 느껴진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한인 2세 작가 재니스 리를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시킨 데뷔작 ‘피아노 교사’(원제·The Piano Teacher)가 번역, 출간됐다.
2007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픽션부문 우수작품으로 선정되며 출간 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2009년 1월 출간되자마자 ‘뉴욕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시카고 트리뷴’ 등 미국 주요 언론에 서평이 실리며 출간 2주 만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뭐랄까.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다 읽고 난 다음의 소감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다. 장면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 움직임 하나하나가 흰 종이 위의 글자를 뛰어넘어 이미 본 영화를 되새기듯 실감나는 영상으로 펼쳐진다. 책과 영화의 차이라면, 마지막에 찾아오는 감동이 활자로 된 책은 정적인 데 비해 영상으로 된 영화는 동적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피아노 교사’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의 느낌은 책이 주는 정적인 감동과 영화의 마지막 신이 주는 농도 짙은 동적 감동이 교차한 것이었다.
소설은 3명의 남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중국인 대부호 첸 씨 딸의 피아노 교사로 고용된 영국인 유부녀 클레어, 홍콩 사교계를 주름잡는 미모의 혼혈인 트루디, 그리고 사건의 열쇠를 쥔 매력적인 영국 남성 윌 트루스데일. 작가 재니스 리는 다양한 인종과 계급이 공존하고 동서양이 혼재하던 영국식민지 홍콩을 무대로, 참혹한 전쟁과 배신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던 1940년대와 전후, 50년대를 넘나들며 이들 세 사람의 사랑이 어긋나고 좌절되는 과정을 감각적이고 흥미롭게 그려냈다.
윌은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영원의 사랑인 트루디를 잃는다. 전쟁과 무자비한 사람들에 의한 충격, 공포로 통찰력을 잃은 트루디는 윌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한 윌의 망설임 때문에 트루디는 죽음에 이른다. 전쟁 후 평생 트루디의 그림자를 쫓는 윌은 우연히 클레어를 알게 된다. 트루디의 향기가 나는 여자, 그러나 또 다른 여자 클레어는 윌에게 어떤 의미일까. 소설의 두 축인 클레어와 트루디 사이에 윌이 있다.
1942년 홍콩에 전쟁이 닥친다. 영국의 식민지인 이곳에서 영국인들은 고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수준의 생활을 하고, 중국인들은 그들의 시중을 든다. 그러나 일본군의 침입으로 영국인들은 집단수용소에 수감된다. 은행장이 텃밭을 가꾸고, 날마다 디너파티를 열던 대부호의 아내는 적십자 구호품 속의 초콜릿을 놓고 다른 여자와 언성을 높인다. 혼혈인 트루디는 수용소에 갇히진 않았지만 일본인 장교에게 협조하면서 목숨을 부지한다.
그가 홍콩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윌 때문이었을까. 수용소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밖에서 윌을 돕고 싶어서였을까. 위험에 빠진 트루디는 윌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부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윌의 망설임에서 트루디는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었다. 1952년 홍콩은 더웠지만, 흥미로운 곳이라고 클레어는 생각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 마틴과 결혼하고, 그를 따라 홍콩으로 온 클레어는 서머싯 몸의 소설 ‘인생의 베일’에 나오는 키티와 같았다. 그는 키티처럼 홍콩의 여러 가지를 배우게 된다. 그러다 아멜리아의 소개로 중국인 부자 빅터 첸의 집에 피아노 교사로 취직한다. 그곳에서 영국인 운전사 윌을 만난다. 소설은 윌과 트루디, 윌과 클레어를 중심으로 교차한다.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과 가장 참혹한 시절을 트루디와 함께한 윌은 아직도 문을 잠그지 못한다.
이사를 하지도 못한다. 언젠가 트루디가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윌에게 클레어는 어떤 의미일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윌에게 끌리는 클레어는 결국 모든 것에서 손을 놓고 떠난다. 만약 트루디가 윌과 영원히 함께했다면, 윌의 마음에 남는 한은 없을까. 만약 클레어와 윌이 함께라면 클레어는 윌을 영원히 사랑했을까. 어쩌면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은 남은 시간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요즘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적지 않은데, 이 책도 영화로 제작되면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여자가 창가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에필로그가 어떤 영화 장면보다도 영화처럼 다가왔다. 왠지 늦가을 붉게 물든 단풍과 그보다 짙은 노을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감독이라면 어느 배우를 캐스팅할지 상상하게까지 만든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