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아무한테도 안 가고 저만 찾아요. 애가 예뻐야 정상인데 이젠 끙끙대는 소리만 들려도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에요. 빽빽 울어도 들여다보지 않다가 지쳐 잠든 아기 얼굴 보면 죄책감이 밀려옵니다. 저 엄마 자격 없는 건가요? 너무 한심해 죽고만 싶어요.”
주부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런 하소연이 올라온다. ‘산후우울증인가요?’라는 제목을 단 글 밑에는 ‘나도 내내 울고 지냈다’ ‘산후우울증,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등 공감의 댓글이 수도 없이 붙는다.
2006년 한 대학병원에서는 산후우울증을 겪는 산모가 10년 전보다 2배 늘었다는 자체 집계를 내놓기도 했다. 고령 산모가 늘고 핵가족이 보편화하면서 산후우울증은 산모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역병이 돼가고 있다.
‘10년 전보다 2배 이상 증가’ 집계도
사내 커플인 회사원 A씨(42)는 10년 전 출산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막막해진다. 중요 부서에서 일하던 남편은 매일처럼 막차를 타고 들어와 새벽별을 보고 나갔다. 머리로는 남편의 사정을 이해했지만 “나 그만 괴롭히고 도우미라도 쓰라”는 냉정한 말엔 오만 정이 떨어졌다. 아기를 지방에 있는 친정에 맡기고 복직한 뒤에도 바쁜 남편 탓에 몇 년 동안 주말마다 혼자 친정에 가 아기를 챙겨야 했다.
그 기간 동안 A씨는 늘 우울함에 시달렸다. 인생에서 큰 실패를 맛본 적 없었다는 고학력 전문직 여성 B씨(37)에게도 출산은 녹록지 않은 경험이었다. 까닭 없이 날카로워져서 남편과 말다툼도 자주 했다. 남편이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느냐”며 어리둥절해도 “아기 때문에 힘들다”는 말 따윈 전혀 하지 않았다. 나약함을 내색하는 건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비춰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긴 탓이다.
만혼이 일반화하면서 30대 중·후반에 첫아이를 낳는 여성이 많아졌다. 이런 고령 출산이 산후우울증 증가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나라한의원 강서점 손지형 원장은 “산후우울증은 몸이 힘들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며 “늦게 첫 출산을 경험한 여성들은 회복이 더디고 체력도 달려 아무래도 육아에 더 좌절감을 겪게 된다”고 설명했다. 고령 산모에게는 남편과 가족의 지원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도 산후우울증을 부추기는 데 한몫한다.
30, 40대는 직장에서 가장 왕성하게 일할 때다. 따라서 그 시기의 남편은 산모를 세심하게 돌아볼 시간적, 물리적 여유가 없다. 일가친지 또한 몸도 마음도 완전히 친정에서 독립했다고 여겨지는 나이 든 산모에게는 아무래도 신경을 덜 쓰게 된다. 더욱 일을 하다 아기가 생겨 그만둔 산모는 자신만 뒤처진 듯한 불안감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근심 때문에 우울증의 수렁으로 빠져들기가 더 쉽다.
이럴 때 산모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남편의 절대적인 지지다. 따라서 우울증 증세가 있는 산모는 자신의 상태를 남편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손 원장은 “만혼한 커리어 우먼 중에는 출산으로 인한 감정기복을 털어놓는 것 자체를 자존심에 상처 내는 것으로 여기는 이도 있다”면서 “스스로 말하고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남편은 절대 먼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충고했다.
산후우울증이 나타난다면 남편, 가족, 친구들에게 증세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상태가 심하다면 전문가 상담도 고려해보자(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보건당한의원 이승환 원장은 “남편의 말에 다친 마음은 어혈(瘀血)로 괸다”며 “이렇게 생긴 산후우울증은 갱년기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서울 마포구에 사는 C씨(42)는 산후 뒷바라지를 하러 지방에서 상경한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면 고마우면서도 묘한 원망이 교차한다. C씨는 모유 수유를 하고 싶었지만 유축기까지 동원해도 젖이 시원스레 나오지 않았다.
수유 때문에 고생해본 적이 없는 어머니는 이런 상황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이해조차 못했다. C씨는 “이럴 때 할머니 세대의 어른이 곁에 있었다면 민간의 묘방이라도 들었을 텐데…”라며 안타까워했다.
큰아이 챙기기는 남편이 도맡아야
핵가족이 일반화하면서 산모들의 일상이 더욱 회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대가족 속에서는 자연스레 전수됐을 육아의 지혜로부터 단절되다시피 했기 때문. 또 잠깐 아이를 맡기고 외출하고 싶어도 집 안에서 조력자를 찾기 힘들다. 이화여대 목동병원 정신과 김수인 교수는 “산모의 우울증 정도가 심각해도 가족 중에 이를 알아채는 사람이 없어, 증세가 악화할 수 있다는 게 핵가족의 취약성”이라고 강조했다.
이럴 때는 산모 스스로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 답답한 속을 터놓고 공감할 수 있는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 손 원장은 “이미 출산을 경험한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사귀기 위해, 산모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 등에 가입하는 것도 좋다”고 충고했다. 여섯 살, 네 살 딸을 둔 D씨(36)의 생활은 최근 막내가 태어나면서 엉망이 됐다.
아기 돌보느라 쌓인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두 딸에게 향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악다구니를 쓰고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하기 일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아이를 때리고 난 후 다시 딸들을 붙들고 울기도 여러 차례였다. 자녀가 있는 산모가 우울증에 사로잡히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자기보호 능력이 없는 아이들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 있기 때문.
우울증에 빠진 엄마는 아이의 행동에 대한 민감성과 반응성이 떨어지고, 훈육의 일관성도 사라진다. 일산병원 정신과 강지인 교수는 “엄마가 아이의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아이는 방임돼 불안해한다. 또 일관된 훈육을 받지 못하면 아이에게 충동적인 이상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경우 남편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강 교수는 “우선 아내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큰아이 챙기기는 남편이 도맡아 해야 한다”며 “아빠가 짧은 시간이라도 큰 자녀들을 돌보고 즐거운 시간을 마련해주면 자녀의 심리적 안정에도 큰 보탬이 된다”고 조언했다. 산모가 우울증 때문에 아파트에서 아이를 던졌다느니, 질식사시켰다느니 하는 사건이 잊을 만하면 터진다.
하지만 뉴스에 나올 만큼 극단적인 경우, 즉 산후정신병을 앓는 사람은 1000명당 1명꼴도 되지 않는다. 산모의 50%가 길어야 2∼3주의 가벼운 우울감을 겪는 데 그치며, 나머지 50%는 그마저도 느끼지 못하고 지나간다. 대부분 산후우울증은 시간이 흐르고 아기가 크면 사라지는 한때의 바람 같은 것이다.
강 교수는 “산후우울증이란 아기를 낳은 산모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자연스런 현상”이라며 “감추기보다 드러내 건강하게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산모는 도움을 청하고 받을 권리가 있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될수록 산모들이 우울의 늪에서 헤어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