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대 6년제’를 반대하며 의사결의대회를 하고 있는 의협 회원들
이번 싸움에서 이들이 선택한 ‘무기’는 서로의 비리를 캐기 위한 감시단 구성이다. 의협은 일단 지방 약사회 회장의 비리 폭로에 이어 약사들의 불법조제 비리를 계속 터뜨리겠다며 ‘으르릉’거리고 있다. 이에 맞서 약사회 측은 이미 의사 50명의 비리 사실을 확보했다며 큰소리를 치고 있는 상태. 한편 차기 대권주자를 장관으로 모시고 있는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는 행여나 싸움의 불똥이 복지부로 튈까 전전긍긍하며 물밑 진화에 부산한 모습이다.
의협, ‘사람 잡는 약사’ 보도자료 뿌려
만약 비리 폭로전이 이대로 계속 이어질 경우, 두 단체 모두 심각한 도덕적 상처를 받을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이들 단체 소속의 온건파 회원들은 서로간의 ‘비리 폭로전’이 결국 환자들의 불신만 사는 ‘공동 자멸의 길’이라며 ‘전투 무용론’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의협이 의약분업 철폐와 약대 6년제 반대를 계속 고집하는 이상 이들 단체의 직능 도덕성을 건 승부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싸움에서도 먼저 포문을 연 쪽은 의협. 최근 약대 6년제 도입을 두고 약사회와 크게 논쟁을 벌인 의협은 7월20일 아주 이색적이면서도 충격적인 보도자료를 뿌렸다. 지금껏 약사회 정책과 약사 직능 전체를 비판해왔던 의협은 이 보도자료에서 약사 한 사람에 대한 비리를 A4 용지 4장에 걸쳐 설명한 뒤, 고소장까지 첨부했다. 보도자료의 제목은 ‘불법 임의조제가 사람 잡는다’. 누가 보더라도 의협이 이 한 약사의 비리를 약사 사회 전체의 불법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지금껏 약사 개인의 비리 사건이 적지 않았지만 의협은 왜 유독 이 약사에 대해서 대대적 홍보에 나선 것일까. 이는 문제 약사가 약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그의 혐의 내용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의협이 ‘사람 잡는’ 약사로 지목한 김모씨(48)는 바로 대한약사회의 모 광역단체 지부장. 전체 약사회의 집행부 임원이자 해당 광역단체를 대표하는 약사인 김씨의 비리가 언론에 보도될 경우 약사 사회 전체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기에 충분했다. 특히 그의 혐의는 장기 복용할 경우 치명적인 부작용을 일으키는 스테로이드제제를 의사 처방 없이 10년간 속여 팔아 환자에게 불치의 질환을 앓게 했다는 충격적 내용.
의협의 이런 태도는 올 1월 한 약사를 검찰에 고발해 구속시켰을 때와 전혀 다르다. 당시 그 약사는 스테로이드제제를 관절염 환자에게 투여해 당뇨병을 유발시킨 혐의로 구속됐다. 의협은 당시 따로 보도자료조차 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각 언론이 의협이 낸 장문의 보도자료와 소송장을 그대로 받아 썼고 약사회는 치유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양약계의 약대 6년제 추진을 반대하며 무기한 시험 거부에 들어간 한의대
그러던 중 임씨는 2003년 12월 말부터 몸이 안 좋아지더니 올 1월에는 숨쉬기가 곤란해지고 의식이 혼미해져 안동의료원으로 이송됐다. 보름달처럼 부풀어오른 얼굴과 피부를 덮은 솜털, 물소의 등처럼 굽은 어깻등, 임씨의 상태를 보며 내린 의사의 진단은 쿠싱증후군과 폐색전증(肺塞栓症). 임씨를 문진한 담당 의사는 스테로이드제제 장기 복용으로 인한 호르몬 불균형이 쿠싱증후군을 가져온 것으로 추정했다. 1월20일 서울 경희의료원이 내린 진단도 마찬가지. 의료진은 쿠싱증후군이 완치가 불가능한 질환임을 통보했고, 임씨는 현재 혼자서 일상적인 생활조차 못할 만큼 상황이 악화됐다.
일반인이 알고 있는 스테로이드제제는 대부분 피부연고제지만 정작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경구용 알약이다.
의협은 임씨 가족들이 이런 내용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장을 법원에 접수하자 바로 보도자료를 내고, “스테로이드제제를 장기 복용할 경우 쿠싱증후군과 혈전증 등의 부작용을 일으키는 줄 알면서도 약물을 처방 조제한 것은 명백한 ‘업무상 주의’ 위반 행위며, 2001년 6월 의약분업 이후 스테로이드제제는 반드시 의사의 진찰과 처방에 의해서만 투약하도록 정한 전문의약품인데도 약사가 조제해 판매한 것은 불법 임의조제 행위에 해당한다”고 비난했다.
김약사에게는 약물조제 교부 과정에서의 설명 의무 위반 혐의까지 추가됐으며, 임씨 가족과 변호인 측은 이를 근거로 임씨 치료비와 위자료 8000만원, 아들들에게 위자료 각각 500만원을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의협은 김약사의 행위를 보건범죄특별단속법 위반으로 형사처벌이 가능한 ‘무면허 의료행위’로 해석하고 있지만 정작 김약사를 형사고발하지는 않았다.
의협은 소송이 제기되자마자 정해진 수순을 밟아나간다. 김약사에게 향해진 여론의 화살을 약사 사회 전체와 의약분업으로 돌려놓은 것. 의협 김선욱 법제이사는 “의약분업이 전면적으로 시행됐는데도 약사에 의한 불법 임의조제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전제한 뒤 “약화 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밝혔다. 약화 사고의 책임이 전적으로 약사들에게 있다는 이야기였다.
의협 산하 대한개원의협의회는 성명서를 통해 “이번 사건은 약국의 불법 조제, 판매에 의해 일어난 스테로이드제제 장기 복용 부작용 사례 중 극히 일부분일 뿐”이며 “이는 정부의 직무유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의협이 이처럼 보도자료와 성명서를 내고 맹공을 퍼붓는데도 맞대응을 삼가고 있던 약사회가 발끈하고 일어선 것은 의협이 감시원 50명을 동원해 전국 대도시 약국의 불법 임의조제 등 불법행위를 감시하겠다고 나서면서부터. 약사회 산하 전국 16개 시도지부장협의회는 성명서를 통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몰래카메라를 찍어온 의협이 앞으로 감시단을 운영해 약국들을 형사 고발한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의 대응을 할 것”이라며 “내과개원의협의회에서 고발하는 약국의 2배수에 달하는 병·의원의 불법행위를 관계당국에 고발할 방침”이라고 반박했다.
협의회는 오히려 “임의조제라는 용어는 의사가 처방전 없이 행하는 탈법적 행태의 조제를 지칭하는 것이지, 약사에게는 임의조제라는 용어가 성립될 수 없다”며 “의사의 불법 조제행위를 비롯해 비의료 인력을 통한 의료기관의 각종 불법 상담과 진료행위, 환자유치 행위에 대한 감시에 나설 것”이라고 다짐했다. 약사회는 이를 ‘최후의 경고’라고 밝혔다.
더욱이 의협의 공세 이후 숨죽이고 있던 이번 사건의 당사자 김약사도 피해자 임씨의 쿠싱증후군이 스테로이드제제에 대한 확증이 없는 상태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김약사는 “촌로인 임씨의 처지가 딱해 처방전 없이 약품을 배달해준 것은 명백히 잘못됐지만 스테로이드제제를 처방한 것은 극히 제한된 경우밖에 없었다”며 “또 쿠싱증후군은 스테로이드제제뿐만 아니라 다른 환경에서도 발현할 수 있어 임씨의 경우는 재판을 해봐야 결과를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 임씨의 변호를 맡고 있는 변호인단은 임씨를 진단한 의사들한테서 스테로이드제제가 임씨의 쿠싱증후군을 일으킨 직접적 원인이라는 소견서를 아직 받아내지 못하고 있으며, 2002년 이전에 김약사가 임씨에게 약을 처방해줬다는 사실도 증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실제 김약사가 임씨에게 지어준 조제약 중 스테로이드가 들어 있었는지에 대한 부분도 피해자들의 진술에 의한 것일 뿐, 실제 임씨가 받은 약품을 분석한 결과는 없다.
때문에 약사회는 이번 소송을 의사회가 어떤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철저하게 준비한 ‘기획 소송’이라고 확신한다. 약사회는 의사회가 ‘불법 임의조제’와 ‘스테로이드제제’를 싸움의 재료로 선택한 이유는 자신들이 줄곧 주장해온 ‘의약분업 철폐’의 근거를 약사들의 비리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의약분업이 스테로이드제제와 항생제의 오·남용을 막는다는 취지에서 시작했는데 약사들이 이를 지키지 않으니 의약분업을 그만두어야 하지 않겠냐는 논리다. 이번 사건 이후 대한개원의협의회 측은 “이번 사건은 의약분업의 가장 큰 취지인 약의 오·남용의 위험에서 국민이 전혀 보호되지 않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라며 “의사들은 약국에서의 불법 대체조제와 임의조제 및 판매가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의약분업 4년 동안 오로지 희생만을 강요당해왔다”고 밝혔다. 실제 대한내과의사회는 “의약분업의 근간이 무너진 상황에서 의약분업을 재검토하고, 약국 조제료만 낭비하는 의약분업을 철폐하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약국은 과연 임의조제의 온상인가? 약사들은 오히려 의사들이 불법 임의조제를 일삼고 있다고 주장한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여당과 약사회가 의사에게만 전적으로 주어져 있던 약품 선택권(상품명 처방)을 의사와 약사 모두에게 주는 방식(성분명 처방)으로 변경하려 한다는 소식은 의협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를 막기 위해서 의협은 약사들에 의한 임의조제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국민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증명해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사회 측은 이 사건이 지난 10년 동안 연기돼왔던 약대 6년제 도입에 한의사협회와 약사회가 합의를 하고, 복지부가 이를 받아들이려 하던 시점에서 발생한 것에 더욱 주목하는 분위기다. 의사회는 약사회의 약대 6년제 도입 주장이 국부의 낭비이고 세계적 추세에도 반한다며 반대입장을 분명히 해왔다. 약사회 산하 시도지부장협의회는 “약대 6년제의 당위성을 호도하기 위한 국민적 기만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며 “의료계가 불법조제 사례 수집에 나선 것은 최근 불거진 의사회 내부의 부정 의혹과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편법”이라고 공격했다.
이번 사건의 변호인이 의협의 법제이사(김선욱 변호사)라는 점도 약사회의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한 원인이 되고 있다. 때문에 약사회는 “의협이 전국적으로 환자를 물색한 뒤, 집행부 임원이자 지역회장인 김약사를 함정 단속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변호를 맡고 있는 법률사무소 측은 “피해자 임씨의 아들이 마침 우리 사무소에 상담을 해와 알게 됐고, 해당 사건을 의협 법제이사가 맡으면서 우연히 의협이 알게 된 것이지 의협이 사건을 조사해 넘긴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상황이 폭발 일보 직전의 대치정국으로 흐르자 바빠진 것은 복지부 관리들이었다. 사회·문화 분야에 대한 국정 운영을 김근태 장관에게 맡기겠다는 청와대 입장이 발표된 시점에서 이런 일이 터지자 행여나 불똥이 김장관에게 튀지나 않을까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 김장관은 약사회와 의협을 일주일 차이로 만나며 ‘협조’를 부탁했다. 이들 모임에 참가한 약사회와 의사회의 내부 인사는 김장관이 한 많은 이야기 중 유독 같은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모르는 것이 많으니 많이 도와주십시오.”
과연 김근태 장관은 ‘정책 실패와 비리의 지뢰밭’이라고 불리는 복지부의 수장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대권에 도전할 수 있을까. 서로 주먹을 내보이고 있는 의사들과 약사들은 “정치적인 봉합책만으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쿠싱증후군(Cushing Syndrome)
호르몬 불균형으로 얼굴, 목, 몸통의 비만증, 척추연화에 의한 척추후만증, 고혈압, 무월경, 다모증, 성기 기능 약화, 고혈당, 보라색 반점, 다혈증, 근육 무력화 등의 증상을 동반하는 질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