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의 후계자로 점쳐지고 있는 문현진씨
지난 50년 동안 통일교를 이끌어온 최고 지도자는 ‘재림주’를 자처하는 문선명 총재. 문총재는 8월2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참심정혁명과 참해방석방시대 천일국 입적축복식’에 참석해 금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채 ‘평화의 왕’ 등극식을 치러 대내외에 건재를 과시했다.
올 3월 미국 워싱턴의 상원의원 전용 빌딩에서 열린 ‘평화의 왕관 시상식’과 같은 형식으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스타니슬라브 슈스케비치 전 벨로루시공화국 대통령, 나카지마 마모루 전 일본 과학기술청 장관, 김민하 대통령통일고문회의 고문, 이철승 서울평화문화재단 이사장 등 국내외 인사들이 참석했으며, 통일교 신도들은 전국 3516개 읍면동에 모여 인터넷 중계를 통해 문총재의 ‘대관식’ 장면을 지켜봤다.
박보희씨 파워게임서 밀렸다?
문제는 이날 문총재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듯한 모습이 감지됐다는 점. 위아래 하얀 양복을 입고 부인 한학자씨와 함께 무대에 선 문총재는 눈에 띄게 불편해 보였다. 올해로 85살인 문총재는 간간이 미소 짓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그의 평화 메시지는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 곽정환 회장이 대신 읽었다.
이에 따라 통일교 내부에서는 창교 50주년을 맞은 올해 문총재의 후계 구도 정립이 본격화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한 교단 관계자는 “정주영 회장 사망 후 현대가 급속히 몰락한 이유는 후계자 자리를 놓고 형제와 가신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라며 “통일교의 미래를 위해서는 문총재 생전에 교통정리가 끝나야 한다”고 밝혀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했다.
천일국 입적축복식에서 ‘평화의 왕’으로 등극한 문총재 부부가 손을 맞잡고 기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 통일교 관계자는 “그동안 박 전 이사장은 문총재 3남 현진씨의 장인으로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 회장을 맡고 있는 곽정환씨와 갈등 관계에 있었다”며 “박 전 이사장의 구속은 곽회장이 실질적인 2인자로서 교단 내 실권을 장악했음을 대외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통일교 내부에서는 교단의 법통이 현진씨에게로 넘어갈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문총재가 현재의 부인 한학자씨와의 사이에 낳은 자녀는 모두 14명. 문총재의 첫 자식은 이혼한 전부인이 낳은 성진씨지만, 그는 어머니가 다르다는 이유로 이미 후계 구도에서 탈락한 상황이다. 통일교 신자들이 ‘참가정’이라고 부르는 문총재 부부와 열네 자식들 가운데 현진씨가 유력한 후계자로 점쳐지고 있는 것이다.
문총재의 자식 가운에 둘째 아들인 흥진씨는 84년 사망했고 둘째 딸 혜진씨와 여섯째 아들 영진씨도 이미 사망했다. 남은 열한 명 가운데 현재 통일교 내에서 공식적인 직책을 맡고 있는 이는 대학생 단체인 ‘세계대학원리연구회’회장, 현진씨뿐이다.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 곽정환 회장
효진씨는 20일 ‘입적축복식’에 참석해 새로운 부인과 함께 문총재 내외에게 곤룡포를 전달하는 대표자 역할을 함으로써 다시 후계 구도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받고 있지만, 통일교의 교리상 그가 다음 총재 자리에 오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한때 검토됐던 것이 문총재의 부인인 한학자씨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방안. 하지만 지금껏 ‘어머니’자리에 충실하던 한씨가 전면에 나서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적지 않아 이 안은 현재 사실상 폐기된 상태라는 게 통일교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에 따라 가장 적절한 방안으로 등장한 것이 현진씨를 전면에 내세우고, 어머니 한씨와 장인 곽회장을 브레인으로 포진시켜 ‘수렴청정’하게 하는 구도다. 아직 30대 중반에 불과한 현진씨가 문총재만큼의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 구도는 통일교의 상징적인 대표성과 실질적인 권력을 적절히 조화시킬 수 있는 최고의 카드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를 위해 지금 통일교 내부에서는 문회장 아래서 각자의 지분을 갖고 있던 가신들과 형제들의 위상을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세대 원로들은 대부분 해외 파견
이러한 분위기는 5월1일 충남 아산시 선문대에서 열린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도 일부 감지됐다. 곽회장의 ‘세계평화초종교초국가연합’이 주최한 이날 행사에서 문총재는 통일교 50년 역사 동안 공이 있는 이들에게 ‘장기근속 공로상’을 수여했는데, 행사 팸플릿에 가장 유력한 가신 가운데 하나인 박 전 총재의 이름이 인쇄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한 통일교 신도는 “팸플릿을 보며 박 전 총재 이름이 빠진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행사에서는 박 전 총재가 곽회장과 나란히 공로상을 받았다. 뒤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팸플릿에 박 전 총재의 이름이 빠져 있는 걸 보고 문총재가 직접 챙겨서 상을 주도록 했다더라”고 전했다. 교단 내 실권을 장악한 곽회장이 가신들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박 전 총재를 제외시켰지만, 문총재가 직접 나서 최소한의 예우는 갖추도록 지시했다는 설명이다.
한 통일교 인사는 “박 전 총재는 90년대 중반 일본에서 일명 ‘판다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통일교의 대중국 투자 사업을 도맡아 하다가 수억 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 돈을 날리며 문총재의 신임을 잃었다. 그 후 곽회장과 현진씨에게 힘이 실렸다”고 밝혔다. 한때 둘째 아들 고 흥진씨의 장인으로 막대한 권력을 누렸던 박씨는 이제 교단 내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얘기다.
통일교 1세대 원로그룹 인사들도 대부분 해외 통일교 지부의 회장으로 나가 있는 상태. 김영휘 2대 협회장은 영국 회장으로 나가 있으며, 세계일보 사장을 역임했던 황환채 3대 협회장은 우즈베키스탄에 파견되어 있다. 80년대 초·중반 협회장을 맡았던 이재석 목사 역시 현재 대만에 있다. 이들은 통일교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문총재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등 국내에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주력은 해외사업이다. 한국에서 후계자에게 불필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차원으로 보인다는 게 통일교 관계자들의 얘기다.
한국문화재단 박보희 전 이사장
이에 대해 통일교의 한 관계자는 “후계를 언급한다는 게 불경스러운 일이어서 드러내놓고 얘기하지는 못하지만 현진씨가 문총재의 후계자가 되는 방향으로 모든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통일교가 전 세계에 뻗어 있는 만큼 현진씨에게 한국과 문총재에 대한 제사권을 주고, 다른 형제들과 가신들에게는 외국의 교권을 주는 방식으로 후계 문제가 정리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세계 193개국에 신도를 둔 국제적 종교 집단이자 국내 경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군인 통일교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