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불볕더위에 가장 좋은 피서법은 뭘까. 개인적으로는 독서와 영화감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집에서 과일 먹으며 재미있는 책을 읽는 것과 시원한 극장에서 대략 두 시간 동안 스크린 속 세계를 여행하는 것. 특히 소설이나 영화나 여름철엔 공상과학(SF)이 최고다. 그런 면에서 좋은 자극을 받은 두 작품이 있다. 영화로는 ‘아이, 로봇(I, ROBOT)’(사진)이고, 책으로는 ‘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는가(I, CYBORG)’다.
영어 원제가 거의 비슷한 이 두 작품은 인조인간과 인간의 미래를 그리고 있지만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더 많이 보여준다. ‘SF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시모프의 원작을 영화화한 ‘아이, 로봇’은 인간의 모습을 본떠 만든 기계인간이 반란을 일으켜 인간을 공격한다는 내용. 결국 악전고투 끝에 기계들을 진압하고 인간이 승리하지만, 발전될 로봇들과 인간이 미래에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문제제기의 전통에는 거의 대부분의 공상과학 영화가 줄을 서 있다. ‘블레이드 러너’ ‘스타워즈’ ‘터미네이터’ ‘A.I’ 등 인간 편에 선 착한 로봇이 조금 나오고, 인간 정복욕에 불타는 엄청난 수의 반란 로봇들이 등장한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이 수행하는 일을 대체할 기계인간, 즉 ‘로봇’의 발명에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지대한 노력이 있어왔지만, 한편 그러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창조한 신에 항거했던 신화 속의 인간 전통이 우리가 창조한 피조물도 우리에게 그렇게 할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낳게 했기 때문일까. 그래서 우리는 산업혁명 이후 19세기 동력기와 기계에 밀려 공장에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기계파괴운동(러다이트 운동)’을 벌였듯이, 미래에 로봇이 인간의 영역을 침해하면 분연히 투쟁할 잠재적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반면 자서전에 가까운 책인 ‘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는가’를 집필한 영국인 교수 캐빈 워릭은 인공지능을 연구하면서 인간 자체가 로봇화하는 혁신적 실험을 위해 자기 몸에 스스로 전자부품들을 이식한 과학자다. 그는 오히려 기계의 미래를 더 믿는 듯하다. 캐빈 워릭이 생각하는 ‘사이보그’의 개념은 단순히 기계적인 ‘로봇’이 아니라, 네트워킹에 의해 지식을 교환하고 원격 의사소통을 수행하는 ‘유비쿼터스’적 존재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괴짜 철학자인 조지 다이슨의 말이 명쾌할 것이다.
“진화와 생명 게임, 그 테이블 위에 세 명의 경기자가 있다. 인간, 자연 그리고 기계다. 나는 자연의 편이다. 하지만 자연은 궁극적으로 기계를 지지한다.”
로봇, 사이보그, 인공지능은 사실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계의 진화를 두려워하는 동안 생명공학이 더 빨리 발전해버렸다. 이들과의 공존에 대해 정말 깊이 고뇌해야 할 때다.
영어 원제가 거의 비슷한 이 두 작품은 인조인간과 인간의 미래를 그리고 있지만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더 많이 보여준다. ‘SF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시모프의 원작을 영화화한 ‘아이, 로봇’은 인간의 모습을 본떠 만든 기계인간이 반란을 일으켜 인간을 공격한다는 내용. 결국 악전고투 끝에 기계들을 진압하고 인간이 승리하지만, 발전될 로봇들과 인간이 미래에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문제제기의 전통에는 거의 대부분의 공상과학 영화가 줄을 서 있다. ‘블레이드 러너’ ‘스타워즈’ ‘터미네이터’ ‘A.I’ 등 인간 편에 선 착한 로봇이 조금 나오고, 인간 정복욕에 불타는 엄청난 수의 반란 로봇들이 등장한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이 수행하는 일을 대체할 기계인간, 즉 ‘로봇’의 발명에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지대한 노력이 있어왔지만, 한편 그러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창조한 신에 항거했던 신화 속의 인간 전통이 우리가 창조한 피조물도 우리에게 그렇게 할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낳게 했기 때문일까. 그래서 우리는 산업혁명 이후 19세기 동력기와 기계에 밀려 공장에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기계파괴운동(러다이트 운동)’을 벌였듯이, 미래에 로봇이 인간의 영역을 침해하면 분연히 투쟁할 잠재적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반면 자서전에 가까운 책인 ‘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는가’를 집필한 영국인 교수 캐빈 워릭은 인공지능을 연구하면서 인간 자체가 로봇화하는 혁신적 실험을 위해 자기 몸에 스스로 전자부품들을 이식한 과학자다. 그는 오히려 기계의 미래를 더 믿는 듯하다. 캐빈 워릭이 생각하는 ‘사이보그’의 개념은 단순히 기계적인 ‘로봇’이 아니라, 네트워킹에 의해 지식을 교환하고 원격 의사소통을 수행하는 ‘유비쿼터스’적 존재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괴짜 철학자인 조지 다이슨의 말이 명쾌할 것이다.
“진화와 생명 게임, 그 테이블 위에 세 명의 경기자가 있다. 인간, 자연 그리고 기계다. 나는 자연의 편이다. 하지만 자연은 궁극적으로 기계를 지지한다.”
로봇, 사이보그, 인공지능은 사실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계의 진화를 두려워하는 동안 생명공학이 더 빨리 발전해버렸다. 이들과의 공존에 대해 정말 깊이 고뇌해야 할 때다.